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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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거일 소설가 |
역사를 살피노라면,'어떤 사람들은 위대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위대함을 이루고, 어떤 사람들은 위대함을 떠안는다. (some men are born great, some achieve greatness, and some have greatness thrust upon them)'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삶의 미묘한 결들을 살피는 이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인물들은 아마도 셋째부류일 터이다.
하긴 그들이 역사의 흐름을 가장 잘 드러낸다, 역사가 굽이치는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로 자신의 됨됨이나 역할이 가리키는 것보다 훨씬 큰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게 된 사람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기원전 4세기에 활약한 로마정치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에쿠스(Appius Claudius Caecus)도 그렇게 '위대함을 떠안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당시 로마 정국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기원전 312년부터 307년까지 그는 인구를 조사하고, 세금을 매기고, 주민들의 풍속을 감시하는 중요한 관리인 감찰관(censor)을 지냈다. 이어 집정관(consul), 섭정(interrex), 부집정관(praetor), 그리고 독재자(dictator)와 같은 중요한 자리들을 맡았다.
그는 귀족들의 권리를 줄이고 도시 평민들의 권리를 늘리는 개혁을 추진해서, 정치적 세력과 명성을 함께 얻었다. 연설과 저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문법에도 관심을 가져서, 라틴어 산문과 연설의 기초를 다졌다는 후세의 평가를 받았다.
위에서 본 것처럼, 그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고, 그의 업적도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이었던 로마는 큰 업적을 남긴 위인들을 많이 낸 나라였다. 그래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라는 이름은 아마도 잊혀졌거나 사서의 각주에 남았을 터였다,
그 자체로는 그리 크지 않은 업적 하나가 아니었다면. 감찰관으로 일하던 312년에 그는 로마에서 카푸아(나폴리 북쪽)에 이르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에 그의 이름을 딴「아피아 가도(Via Appia)」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중요한 도로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지는 것은 누구에게도 큰 영광이지만, 그것이 후세에 얼마나 큰 영광으로 판명될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피아 가도는 처음엔 1백32마일이었고 자갈로 덮였었다. 그 뒤로 꾸준히 개선되어 폭이 6미터에 이르렀고 돌이나 용암으로 포장되었다. 아울러 계속 연장되어 브룬디시움(지금의 브린디시로 이탈리아 반도의 남동쪽에 있음)과 레지움(지금의 레지오로 반도의 남서쪽에 있음)까지 닿았다. 브룬디시움은 그리스와 소아시아로 가는 병력들을 태운 배들이 출발하는 항구였고, 레지움은 마주보는 시실리를 거쳐 북 아프리카로 가는 항구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했으므로, 아피아 가도는 모든 면에서 로마의 중심적 도로였다. 특히 그것은 군사적으로 중요했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넘어야 했던 가장 큰 고비들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치른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과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와 치른 세 차례의 '마케도니아 전쟁'이었음을 생각하면, 로마에서 레지움과 브룬디시움에 이르는 아피아 가도의 중요성이 또렷히 드러난다.
자연히, 아피아 가도는 로마 사람들의 사랑과 칭찬을 받았고'원로(遠路)의 여왕' 이라 일컬어지기까지 했다. 덕분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로마 사람들은 열심히 도로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탈리아반도는 촘촘한 도로망으로 연결됐다. 도로망의 중심은 물론 로마였고,'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격언이 나왔다. 영토가 이탈리아반도 너머로 뻗어나가자, 로마 제국은 도로를 크게 늘였고 마침내 지중해를 감싸는 도로망을 완성했다.
도로가 제국의 혈관이란 사실을 로마 사람들은 잘 알았다. 그들은 도로를 새로 내기도 했지만, 지중해 동쪽의 '왕도(王道)'처럼 이미 좋은 도로가 있는 곳에선 그것을 고쳐서 도로망에 편입시켰다.
이런 사정은 중국에서 진(秦)의 시황제(始皇帝, 기원전 247~210)가 전국시대(全國時代)에 연(燕),조(趙), 진(秦) 세 나라가 북방의 동호(東胡)와 흉노(凶奴)를 막기 위해 쌓은 장성들을 개축하고 연결해서 만리장성을 완성한 것과 비슷하다. 로마 제국의 융성기인 기원후 2세기에 제국의 도로망은 5만마일이 넘는 일급 도로와 20만마일로 추정되는 하급 도로로 이루어졌다.
일급 도로는 제국의 통신 업무와 군대의 이동을 위해 설계되어서, 10마일마다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역과 25마일마다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급 도로는 작은 도시들과 농촌 지역들을 주요 도로와 연결했다.
조직적 구상에 따라 튼튼한 기초위에 세워져 곧게 뻗어나간 로마도로는 고대에선 경이적 존재였다. 로마제국이 쇠퇴하면서, 도로망은 빠르게 끊겼지만, 잘 만들어진 도로들은 세월을 놀랄 만큼 잘 견뎌냈다. 그래서 중세 사람들에겐 그것들은 전설적 영웅의 작품으로 생각되거나 아예 악마의 작품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하이웨이(highway)' 란 말은 중세 사람들이 본 로마 도로의 모습을, 곧 낮은 습지를 건너는 높은 둑길의 웅장함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실은 로마의 도로는 지금도 그대로 남은 부분들이 많고 서구의 간선 도로들의 기초가 된 부분들도 많다. 잘 만들어진 다리들은 예외적이고 다리가 무너지기 일쑤인 우리에게 가장 큰 교훈을 주는 것은 2천년의 세월에도 거의 그대로 동부 터키 지방에 서있는 로마의 돌다리들일 것이다.
도로를 만드는 기술은 18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부활되었다. 그 과정에서 불후의 명성을 얻은 사람이 또하나 나왔다. 영국 기술자인 존 라우든 머캐덤(John Loudon McAdam, 1756~1836)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어릴적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도로관리인이 되었는데 마침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돈으로 좋은 도로를 만드는 방법을 시험했고 마침내 배수가 잘된 토대위에 작은 돌 부스러기나 자갈로 포장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 방법은 아주 경제적이어서 널리 채택되었다. 그렇게 쓰이는 포장재는 자연스럽게 '머캐덤(macadam)' 이라 불렸고 돌 부스러기나 자갈들에 아스팔트를 섞어 쓰는 지금도 그런 도로들은 여전히 '머캐덤식 도로(macadamized road)' 라고 불린다.
우리에겐 도로를 잘 만드는 전통이 없었다. 특히 아쉬운 것은 강들이 아주 많은데도, 주요 교통로를 막는 강들에 영구적 다리를 놓으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18세기 말엽에 사신의 수행원으로 청을 세차례 방문해서 청의 문물을 관찰한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북학의」에서 중국의 훌륭한 도로와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도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비교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길을 닦을 때는 모두 땅 거죽을 긁어서 흙의 빛깔만 새롭게 할 뿐, 실제로는 몇 발자국도 평평하게 하지 못한다. 또 돌로 판판하게 깔지 못해서 울퉁불퉁하여 넘어지기 쉽다. 여염 백성들이 전을 열고 물건을 사고파는 곳을 가가라 하는데, 처음엔 처마 밑에 달아지은 집같이 옮겨 들일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차츰 흙을 바르고 쌓다가 드디어 길을 차지하게 되었다. 문 앞에는 나무까지 심어서, 말 탄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길이 좁아서, 다닐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다리에 관한 그의 관찰은 우리 가슴에 더욱 아프게 닿는다. “고을 사이를 통하는 큰길에도 한해 이상 견디는 다리가 없다. 두 갈래진 나무를 세우고 솔잎을 덮은 다음 흙을 덮고서 다니는데, 말의 발이 자주 빠진다. 무너지는 것을 염려해서, 백성으로 하여금 물에 들어가서 교각을 붙잡고 서게 한다.
과연 다리가 무너져서 사람과 말이 다 넘어지는 것을 힘으로 들어서 구원할 수 있겠는가?” 1970년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그런 초라한 전통을 단숨에 끊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도로 자체가 당시로서는 대단한 역사였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막 시작된 우리의 경제발전에 큰 몫을 했다는 점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1917~1979)은 1964년 서독을 방문했을 때 독일의 아우토반Autobahn을 보고 고속도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 야당 지도자들이 특히 거세게 그것을 비판했다는 사실과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집권한 동안에 착공된 경부고속철도가 너무 부실하게 만들어져서 '거대한 고철더미’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나온다는 사실은 박정희의 됨됨이와 업적을 잘 말해준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함으로써 박정희는 그의 큰 허물들로도 초라해지지 않을 업적 하나를 남겼다. 그것은 '떠안은 위대함’이 아니라 '스스로 이룬 위대함’이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