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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준현 경제부 기자 |
[미디어펜=류준현 기자] "돈의 가치를 알고 싶으면 가서 돈을 꾸어보도록 하라. 돈을 꾸러가는 자(者)는 슬픔을 꾸러가는 자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미국 100달러 지폐 초상화의 주인공, 벤자민 프랭클린이다. 누군가의 재산을 빌리려거든 믿음의 근거인 '신용(信用)'이 있어야 한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저신용자'가 누군가의 재산을 빌리려 한다면 그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그래서 신용은 금융산업의 근간이다.
이와 함께 '믿고 준다'라는 뜻의 '여신(與信)'은 금융기관이 고객의 신용을 토대로 돈을 빌려주는, '대출'로도 불린다. 누군가의 돈을 나의 신용으로 끌어썼다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지극히 상식적인 이 용어들의 뜻이 최근 새롭게 쓰여지는 모습이다.
정부는 지난 14일 2차 비상경제민생대책회의를 열고 소상공인·가계·청년·서민을 타깃해 '125조원+α'의 민생경제책을 발표했다. 금리 급등 여파로 일부 차주들의 빚 부담이 급증하자, 정부가 긴급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지난 8일 제1차 회의 이후 6일만이었다. 공교롭게도 14일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수행 부정평가(53%)가 긍정평가(33%)를 앞지르는 이른바 '데드크로스'가 발생한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였을까. 단기간(?)에 내놓은 민심 달래기 정책은 연일 논란이다. 대표적으로 정부는 코로나19 관련 피해 자영업자‧소상공인의 채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대출 원금·이자 감면책을 내놨다. 더 이상 대출 원리금 상환을 유예해선 안 된다는 계산에 따라, 최소한의 빚은 갚으라는 취지로 기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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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가 지난 14일 제2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열고, 소상공인·가계·청년·서민 등을 타깃해 '125조원+α'의 역대급 채무탕감 패키지를 내놨다. 윤 대통령은 채무상담에 나선 국민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한편, 민간 전문가, 현업 종사자들과 금리 상승기 속 소상공인, 주택 구입자, 청년 등 대상자별 상환 부담 경감방안을 논의했다./사진=대통령실 제공 |
문제는 금융권에 반 강제적 참여를 유도하면서 사전 조율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코로나19 금융 지원 실적'은 지난 14일까지 168조 5323억원, 이자유예액 외에 남아 있는 대출까지 포함하면 171조원에 이른다. 4대 금융지주의 9년치 순이익과 맞먹는 만큼, 금융권에서 '관치금융'이라는 불만을 쏟아낼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청년층이 주식·가상자산 투자 실패로 사회적 낙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한 '청년특례 채무조정 제도'도 논란이다. 채무과중도에 따라 이자를 30~50%까지 감면해주고 원금상환도 유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핀셋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만 34세 이하이면서 신용평점 하위 20% 이하로 제한하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가뜩이나 '갈라치기 방역정책'으로 치를 떨었던 '빚투·영끌족'으로선 "왜 나는 구제해주지 않느냐"며 혀를 찰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론이 악화하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지난 18일 긴급 브리핑을 열고 "가상자산 투자실패자 지원대책이 아니다"라고 직접 진화에 나섰다. 김 위원장은 "현실을 좀 더 생동감 있게 표현하다 보니 발표 자료에 '투자 손실' 얘기가 들어갔다"며 "해당 표현이 도덕적해이 논란을 촉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대책은 기존 채무조정 제도의 정신과 기본 취지에 맞춰 설계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채무조정은 '빚투·영끌'족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는 코멘트도 담겼다. 도덕적 해이 논란이 일자 급하게 해명한 것인데, 김 위원장의 발언대로라면 특별한 내용도 아닌 것을 빈 수레만 요란하게 만든 꼴이다.
더불어 신용회복위원회, 법원과 연계를 강화해 '개인회생'을 유도하는 정책은 심히 우려를 자아낸다. 이미 서울회생법원은 지난 1일부터 주식·가상자산 투자 실패에 따른 손실금을 변제해주는 내용의 준칙을 제정해 적용하고 있다. 손실 액수나 규모를 원천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회생을 적극 돕겠다는 취지다. 개인회생시 변제금은 자산평가액을 기준으로 설정한다. 빌린 액수에 상관 없이 갚을 돈을 대폭 줄여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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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본관에서 금융부문 민생안정과제 관련해 제기된 이슈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사진=금융위원회 제공 |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기왕 어려워진 것, 채무 경감보다 '개인회생'이 낫다"는 의견까지 나온다.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 구조조정은 "인생은 한 방" "손실은 국가의 것, 이익은 나의 것"이라는 개인의 알량한 이기심을 부추길 수 있다.
"정부의 복지제도는 가난한 사람을 양산한다. 빈자가 복지시스템 안에 남도록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우리가 갖고 있는 복지 프로그램은 가족 붕괴를 촉진하고,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는 행위를 꺼리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이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검사시절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 언급했던 서적 '선택할 자유'의 저자이자, 대표적인 '시장경제론자' 밀턴 프리드먼 교수의 발언이다. 한 청년이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없는 사회는 부자들도 지킬 수 없다"는 발언을 인용하며 '큰 정부'의 당위성을 논하자, 프리드먼 교수가 이 같이 반박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정부의 이번 대책과 금융위의 해명을 어떻게 바라볼까.
정부는 "빚내기 싫다"며 건전하게 자산관리를 해왔던 이 땅의 선량한 국민들을 한순간 '호구'로 만들어선 안 될 것이다. 더불어 "대출까지 끌어쓰며 '한탕주의'에 빠졌던 자를 왜 구제해주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반 국민들의 불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 금융권이 대출을 유도하면서도 "상품 이용 전 상품설명서, 약관 확인 필수. 모든 손실은 투자자의 책임"이라고 고지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정부 개입으로 빚어지는 도덕적 해이와 역차별 논란은 필연적으로 세대갈등과 '갈라치기' 논란을 양산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 '빚은 갚아야 하는 것'이라는 기본상식이 통하는, '신뢰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바라는 것은 사치인가.
[미디어펜=류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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