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에서 온 남자, 이성에서 온 여자 #02
   
▲ 정소담 칼럼니스트‧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이성녀 정소담
연애에 대한 여자의 착각

“남자친구는 만들었어?”

대학생이 되고 지겹도록 듣던 얘기다. 참나, 남자친구를 ‘만드는’ 건 뭐야? 구린 표현이라 듣기 싫은 체 했지만 신경질이 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신입생 딱지가 바래도록 남자친구를 ‘못’ 만든 나의 자존심은 슬슬 뻐근해 왔다. 몇 해가 지나도록 남자친구가 생기지 않자 불안마저 일었다. 대체 왜! 안 생기는 거야.

지나고 보니 이유는 명료했다. 남자친구는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땐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 즈음의 나는, 어느 날 운명이 나를 폭 들어다 연애라는 늪에 풍덩 던져버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그 날은 도둑처럼 다가오겠지. 그놈의 소설과 드라마를 보고 배운 사랑에 대한 수많은 단상들로 내 첫 연애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나의 스무 살이여.

연애가 곧 사랑이라고 믿는 건 여자들이 잘 빠지는 착각이다. 다소의 교집합과 다수의 유사점이 있을 뿐 이 둘은 매우 다른데도 말이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겠고 잔잔히 시작된 연애가 뜨거운 사랑으로 이어지기도 하겠으나, 목하 열애를 시작한 다수의 커플은 사랑으로 묶인 관계이기보다는 그저 ‘목하’ 좋아 지내는 관계다. 그러니 두어 달 만에 결별도 하고 점 하나를 찍기도 전에 남이 되기도 한다.

연애를 사랑이라 믿는 착각은 또 다른 착각을 낳는다. 이를테면 애타게 기다리던 어느 날 시작될 거라는 그런 착각. 당신이 사랑을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대의 야속한 반쪽이 아직 나타나주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으나 당신이 연애를 못하고 있는 이유는 ‘누구도 당신에게 고백하지 않아서’다. 혹은 도저히 사귈 수 없는 남자들만 당신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다림’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연애는 결코 운명의 산물도 우연한 케미도 아니다.

그저 이 풍진 세상을 함께 견뎌나갈 임시적 ‘아군’ 한 명을 곁에 두는 것이다. 말이 잘 통하든 배를 불려주든 바라만 봐도 삶의 전투력이 향상되든 이유는 다양하겠으나, 어쨌든 지척에 있는 이성에게 가까이 두고 싶은 감성을 불러일으켜야 연애는 시작된다. 연애를 하고픈데 못하고 있다면 당신의 무언가는 바뀌어야 한다. 오매불망 기다리면 시작될 거라는 그 착각을 버리는 것이 첫 번째다.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관점은 연애가 시작된 이후에도 문제를 만든다. 임시적 아군에게서 자꾸 로미오의 모습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외로움 좀 덜자고 연애를 시작했는데, 사귀자마자 드라마가 시작되면 남자는 피곤해서 견딜 수가 없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사랑이 아니니까 변한다.

사랑을 기다리는 드라마 속 청승녀의 가면을 벗고 다가오는 계절에는 설레는 연애를 시작하고픈 여대생의 얼굴이 됐던 봄, 나의 연애는 시작됐다. 돌이켜보니, 아침에 운동장을 뛰고 서점에 들러 신간을 사고 잠들기 전 거울을 보며 예쁘게 웃어 보이는 등 뻔한 노력도 좀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연애’란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아닌, 그저 나만큼 외로운 어떤 이에게 어깨를 빌리는 대신 가슴을 내어주는 일상의 단편임을 알게 된 그 어딘가 즈음에서 나의 연애는 사랑을 닮아가기 시작했던 것도 같다.

   
▲ 이원우 기자

감성남 이원우
연애에 대한 남자의 착각

밤은 남자의 적이다. 태양이 떠있는 동안 남자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감에 넘쳐있다.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운명의 파고를 넘어 성공의 트로피를 거머쥐고야 말겠다는 호전적 자세. 테스토스테론이 태평양 파도처럼 넘실대는 동안의 남자는 (어쩌다 생긴)여자친구에게 해선 안 될 말, 취해선 안 될 태도도 몇 번씩 감행해 버리곤 한다. 그러다 달이 뜨고 나면 엄습하는 불안감에 떠는 것이다. 이미 대낮의 객기는 간 곳 없다.

‘어, 이러다 나 차이면 어떡하지?’

후회와 불안으로 뒤섞인 짐승 한 마리가 되어 미지의 미래 앞에 숨죽이고 몸을 떤다. 그렇게 어둠에 잠식된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면 독야청청 떠 있는 파란 달 하나. 그제야 남자는 깨닫는다. 밤하늘처럼 어두운 나의 비루한 마음에 그나마 달처럼 빛나는 건 그녀 하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My world is dark, when there’s no you.”
(네가 없는 나의 세계는 어두울 뿐이야.)

- Stevie Wonder의 노래 <Moon Blue> 中

이때부터 남자의 밤은 그녀에 대한 후회와 다짐으로 가득 찬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수천 번 다짐하며 잠을 청한다. 그렇게 새 날이 밝고, 다시 만난 그녀에게 하는 남자의 한 마디.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내가 변할게.”

   
▲ 일러스트= 서울여대 시각디자인 3학년 유한을 학생

절박한 표정으로 이 말을 건네는 남자들의 마음은 진짜다. 진심으로 변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살면서 이렇게 깊게 후회해 본 적이 없어”라는 그의 말도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남자의 “변할게”를 믿고 관계를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꿈을 깨서 죄송하지만 남자의 저 말은 거짓일 확률이 매우 높다. 의도가 진실했을지언정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인간이 그저 결심만으로 간단히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점이야말로 연애에 있어서 남자들이 빠지는 가장 큰 착각이다. (현실적인 존재인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서는 이런 실수에 적게 빠진다. 남자들보다 좀 더 똑똑한 것 같다. 그만큼 인생이 재미없기도 쉽겠지만.)

인간의 모든 형질이 100% 생득적인 것은 물론 아니다. 남자들도 변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때일까? A라는 사건 때문에 그 여자친구와 헤어지면 그 다음 연애부터는 적어도 A라는 사건에 대해서는 자세가 달라진다.

한 시대가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휙 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헤어짐으로 인해 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인생의 ‘리얼’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얻는다. 슬프지만 진실이다.

여자들이여, 가만히 두 손 놓고 있어도 아름다운 연애가 시작될 거라고 착각하지 마라. 안 생긴다. 남자들이여, 본인의 의지만으로 수십 년간 쌓아온 더러운 성격을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안 변한다. 안 생(AS)기고 안 변(AP)하는, 이 인생의 씁쓸한 진실을 우리 이제부터 ‘ASAP 법칙’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 법칙을 가능한 빨리 깨닫는 게(as soon as possible) 당신에게도 이로운 일이 될 것이다. /정소담 칼럼니스트‧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이원우 기자

(이 글은 대학생잡지 '바이트'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