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보장·질서유지 및 공익 침해하는 폭력시위는 법 위배
최근 세월호 추모 1주기 행사에서 경찰의 ‘차벽’ 설치에 대해 과잉대응 논란이 일었다. 집회 주최 측은 차벽설치가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침해한다고 판시한 헌재의 2009헌마406결정을 근거로, 차벽설치에 대해 위헌소송을 제기할 거라 밝혔다. 경찰은 집회 참가자들이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려고 시도하는 등 집회신고 구역을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차벽설치가 불가피했다는 반대 입장을 밝혔다. 차벽설치 논란의 근원은 불법·폭력 시위로부터 시작된다. 신고구역에서 예정대로 집회를 평화적으로 진행한다면 차벽이 세워질 이유가 없다. 헌재 결정문에 등장하는 ‘일반적 행동자유권’도 불법·폭력 시위대의 자유를 보호하자는 취지는 아니다.

이에 바른사회시민회의(이하 바른사회)는 이번 차벽 설치 논란을 ‘집회의 자유 대 공공질서 유지’, ‘공권력의 재량권’ 측면에서 짚어봄으로써 위헌 여부를 논의했다. 아울러 현행 집시법이 가진 문제와 한계를 검토하고 우리사회 불법폭력 시위문화를 개선할 방법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바른사회는 30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차벽설치 위헌 논란 어떻게 볼 것인가’ 토론회를 개최했다. 아래 글은 발표자로 나선 김상겸 동국대 법과대학장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김상겸 동국대 법과대학장

공공질서유지와 집회의 자유

Ⅰ. 들어가는 말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 일대는 시위와 경찰의 대응 속에서 소위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세월호 추모행사 집회 이후에 나온 시위가 불법·폭력화한 것에 대하여 시위 측에서는 경찰이 차벽을 설치하고 물대포와 최루액 등으로 과잉 대응한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즉 평화롭게 시위를 하고 있는데 차벽으로 시위의 진행을 차단함으로써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인 공권력의 행사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찰은 세월호 추모행사에서 집회가 신고 된 장소는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이며 광화문광장은 그 대상이 아니었고, 이동하면서 차로 점거 행진을 시도하다가 폭력 시위를 일으켰기 때문에 평화적 시위는 명분일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경찰은 청와대나 주한 외교 공관이 있 광화문광장 일대는 집시법상 집회와 시위를 할 수 없는 공간이며, 그동안 관련 집회나 시위가 불법·폭력 양상을 보이는 상황에서 이를 차단하기 위하여 차벽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집회나 시위와 관련하여 제기된 차벽의 문제는 과거에도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진실이 밝혀졌지만 2008년 우리 사회를 혼란의 용광로로 만들었던 광우병 사태에서 폭력 시위에 대응하여 차벽이 등장하였다. 당시 시위대는 폭력화하면서 경찰의 차벽을 공격하였다. 그런 모습이 2015년에도 재현된 것처럼 광화문 일대에는 민주주의도 법치주의도 없었다.

우리 사회가 집회나 시위에 온정적이었던 것은 과거 오랜 기간 집회나 시위 자체를 못하도록 막았던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 때문이었다. 민주국가에서 여론형성이나 의사소통 내지 의견전달의 중요한 수단인 집회나 시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그 본질을 침해하는 것이다. 그 당시 국민은 부정의한 공권력에 대항하여 개최된 집회나 시위에 대하여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이렇게 집회와 시위를 통하여 우리 사회는 더 빨리 민주화를 경험하였다.

   
▲ 18일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세월호 시위 모습. 세월호 시위 주최 측 추산 2만 명, 경찰 추산 1만 명이 모였다. 세월호 시위대는 불법폭력시위를 자행했다. /사진=연합뉴스TV 영상캡처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집회와 시위가 과격을 넘어서 불법·폭력화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집회와 시위는 국민의 중요한 기본권이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의 이익도 중요하다. 더구나 현대국가는 국민주권국가이다.

모든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그런데 국가의 주인인 국민은 전체 국민을 의미하는 것이고 개개의 국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국가는 공동체이고, 그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공동체를 통하여 보장받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도 중요하고 나아가 공동체의 이익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이나 단체의 주장을 위하여 집회나 시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 및 공동체의 이익인 공익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공익의 존중이 사라지고 있다.

Ⅱ. 집회와 시위의 자유의 주요 내용

헌법은 제21조 제1항에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을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표현의 자유라고 한다. 물론 이를 외국에서 언급하는 표현의 자유와 달리 다루는 견해도 있지만, 집회의 자유는 한 사람만으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모임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집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둘 이상의 사람이 특정한 공동의 목적을 갖고 모이는 특성을 갖고 있다. 즉 집회는 둘 이상의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장소에 모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집회의 개념에 관하여 집시법은 제2조 제2호 시위의 개념에서 ‘다수인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라는 표현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시위는 움직이는 또는 이동하는 집회라는 점에서 그 개념적 요소에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본다.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는 최소 2인 이상이 모인다는 점에서 다수에 의한 표현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집회의 자유도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이란 점에서 개인의 의사형성과 인격발현에 기여한다. 집회의 자유는 사회공동체에서 더불어 생활하는 인간에게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을 통하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위를 확인하고 공동으로 인격을 발현하고자 하는 기본권이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의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집회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기능을 가지며, 집단에 의한 의사표현을 보장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의견수렴과정에서 소수의 의사까지 보장함으로써 다수로부터 소외된 소수를 보호하는 기능을 갖는다.

   
▲ 4월 16일 종로 2가 상황. 세월호 시위대가 경찰버스 위를 점령했다. /사진=폴리스위키 페이스북 제공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개인의 인격발현과 함께 집단으로 의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여론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집단의 의사표현은 민주국가에서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역할은 현대국가에서 발생하고 있는 국민과 국민의 대표기관 간의 의사불일치 등으로 인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기능을 행사한다.

그런데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인격발현이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하여 무조건 긍정적 기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집회와 시위는 다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원하지 않은 사회문제를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대형집회나 시위의 경우 이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의 행동의 자유나 주거의 평온을 방해하며 주변상가의 영업권을 침해하기도 하고 교통문제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여 집회에 의한 사회적 손실이 발생한다. 이러한 손실은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고 집회에 참여하지 않은 국민의 이익을 침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집회나 시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현행 헌법에는 제한규정이 있다. 헌법 제37조 제2항은 어떤 기본권도 일단 국가의 안전보장과 사회질서유지 및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 법률로 제한할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으며, 이 규정에 의하여 집회의 자유도 헌법에 의하여 제한을 할 수 있다. 물론 집회나 시위를 법률로 제한하더라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는 없으며, 그 제한에는 본질을 침해해서는 안 되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또한 헌법 제21조 제2항이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사전허가제도 금지된다. 나아가 개별 법률에 의하여 허가제 형태로 운영되는 것도 금지된다.

   
▲ 4월 16일 스피커로 현장을 정리하려는 경찰에게 삿대질하고 끌어내리는 세월호 시위대. /사진=팩트TV 영상캡처

아무튼 집회나 시위의 자유는 다수인의 모임이란 점에서 장소의 문제가 있다. 현행 집시법은 제11조에서 옥외집회나 시위의 금지장소를 규정하여 제한하고 있다. 이 규정과 관련하여 헌법재판소는 외교기관으로부터 100m 안에서 집회를 금지하는 규정은 위헌결정을 내렸고(헌재 2003. 10. 30. 2000헌바67·83), 각급 법원으로부터 100m 안에서 집회를 금지하는 규정에 대해서는 합헌결정을 하였다(헌재 2005. 11. 24. 2004헌가17). 헌재의 결정에 대하여 최소침해의 원칙과 법익균형의 원칙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렇지만 집시법 제11조에서 집회나 시위 장소에 대한 제한은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요구하고 있는 제한에 따른 것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Ⅲ. 공공질서의 유지를 위한 차벽의 설치와 집회·시위의 자유의 제한

차벽이란 글자 그대로 차를 가지고 벽을 쌓는 것을 말한다. 이 차벽이 갑자기 집회와 시위에서 문제가 된 것은 집회나 시위를 차단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차벽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2011년 헌법재판소가 집회 장소에 대한 차벽설치와 관련하여 위헌 확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기도 하다(헌재 2011. 6. 30. 2009헌마406).

그런데 당시 헌재의 결정을 보면 논란이 되었던 차벽이 시민의 통행이나 활동을 예외 없이 차단하고 있어서 필요하고 적절한 수단을 넘어선 과도한 조치이며, 집회나 시위로 인한 폭력행위일로부터 4일 후까지 차벽조치를 유지해야 할 급박하고 명백한 불법·폭력 집회나 시위의 위험성이 없음에도 계속하여 차벽을 유지한 것은 최소한의 조치가 될 수 없고, 이 경우 보호해야할 공익이 없다는 점에서 위헌이라고 하였다.

이는 불법·폭력 집회나 시위를 차단하기 위한 차벽 자체를 위헌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이 집회나 시위를 차단한 차벽을 위헌이라고 한 것이다. 즉 다시 말하자면 시민의 출입 자체를 완전히 차단하여 집회나 시위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불법·폭력 시위의 위험성이 사라진 후 지속적으로 차벽을 설치하거나, 시민의 통행조차 할 수 없도록 차벽을 설치하는 경우에만 위헌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헌재는 차벽의 위헌성을 기본권의 행사 자체를 못하게 할 정도로 심각하게 침해하여 비례성원칙을 위반한 경우에만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 버스 위에 올라간 시위자들이 경찰관을 구타해서 버스 위에서 밀어 버리는 동영상 장면이다. 폭력으로 얼룩졌던 촛불 시위가 연상된다. 영상에서 나온, 시위자들이 밀어서 추락한 경찰관은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시위대에 밀려 의식불명에 빠졌던 또 다른 경찰관은 31기동대 소속이다. /사진=폴리스위키 페이스북 영상캡처

헌재의 판단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차벽문제는 간단히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시민의 통행 자체를 차단하지 않았다면 위헌의 논란은 의미가 없다. 또한 집시법에 의하여 기본적으로 집회와 시위가 제한된 지역의 경우 집회나 시위를 제한하기 위한 방법으로 차벽을 설치한다면 위헌이라 볼 수 없다. 더구나 집회나 시위는 그 평화성이 제한의 정당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기준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외국의 경우 헌법에서 평화적 집회나 시위만 보장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헌법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격하고 폭력적인 집회나 시위는 그 보장의 한계를 일탈하는 것이다. 헌법은 집회나 시위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이 아니고,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사회의 질서유지 및 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하는 경우 법률에 따라 제한됨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불법·폭력집회나 시위가 발생하는 원인에는 법적용을 엄격하고 객관적으로 하지 못한 공권력에도 있다. 미국이나 독일 등 선진국의 경우를 보면 집회나 시위와 같이 집단행동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보장하면서도 공공질서를 위반하는 경우 철저하게 제한한다. 우리는 해외언론을 통하여 경찰저지선을 넘어선 시위대에 대하여 가차 없이 공권력을 행사하는 외국의 모습을 보았다. 또한 불법·폭력집회나 시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법을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선진국처럼 법적용이나 법집행이 되지 않고 있다. 법치는 국민의 준법의지가 없는 한 공염불이다. 또한 엄정한 법적용과 집행이 되지 않는 한 법치는 실현되지 않는다. 엄격하면서 공정한 법적용과 집행을 통하여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보호하면서 불법·폭력집회와 시위를 추방해야 한다. /김상겸 동국대 법과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