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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
어느 사회이든 공동체가 경험한 특정 사건에 대한 상징이 존재한다. 미국 사회에서 테러는 2001년 뉴욕 쌍둥이 빌딩이 공격받았던 9·11 사건이다. 또 자연재해의 상징은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Katrina)’이다. 아직도 많은 미국인의 머릿 속에는 뉴올리언스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참담한 장면이 각인돼 있다.
2005년 8월 여느 허레케인과 마찬가지로 플로리다 남동쪽 열대성 저기압으로 발생한 카트리나는 플로리다를 가로지르더니 2차로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테네시, 켄터키 등 미국 중심부를 관통하며 1,500 명이 넘는 사망자와 엄청난 재산피해를 입혔다. 특히 저소득층이 밀집한 뉴올리언스 지역은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이 같은 처참한 피해 현장은 고스란히 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에 날라졌다. 10일 가량의 직접 피해와 수 개월간 방치될 수밖에 없던 비참한 현장은 미국 사회를 공황상태에 빠트렸다. 그 곳은 선진국이라는 자부심도, 모든 인종이 함께 살아간다는 미덕도 허울임을 전시한 박물관과 같았다.
카트리나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은 지난 17년간 재건됐다. 낙후 지역이던 몇 곳은 신도시로 개발돼 면모를 일신했다. 하지만 허리케인으로 인해 드러난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 더욱 조밀하게 살피면 빈부 차이가 만든 생존 차이가 남긴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 그동안 피상적이거나 애써 외면하려던 미국 사회의 민낯이 매스컴을 통해 공유됐고 이제는 누구도 부인 못하는 미국 사회의 상처로 남았다. 알려진 대로 허리케인의 피해는 저소득층인 아프리칸-아메리칸(흑인으로 약칭한다)에 집중됐는데 이는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빈부격차로 인한 갈등양상과 정치하게 부합한다. 심각한 빈부차는 재난 극복 과정의 회복 속도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였음은 물론이다.
3년쯤 전에 대학에서 재난학(災難學)을 강의하는 분을 통해 접한 책의 제목은 ‘재난불평등<동녘>’이었다. 팔리지 않는 책이라서 절판까지 갔으나 팬데믹시대를 거치며 책표지도 새롭게 단장하고 팔리는 책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저자 ‘존 머터(John C Mutter)’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지만 사회학자도 행동경제학자도 아니다. 오히려 지질학자로서 전 세계를 돌며 지진과 자연재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물리적 피해가 재난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저술했다.
깨달음의 출발은 아이티(Haiti)에서 일어난 지진이었다. 2010년 1월 12일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인근에서 리히터 규모 7.0의 지진이 발생했다. 인구 1천100만 여명의 아이티에서 10만~80만 명이 사망했고 300만 명 이상의 재해민이 발생했으며 20만 채 이상의 주택이 무너지는 등 나라 전체가 초토화됐다. 정부의 통제권은 상실된 아이티의 통계는 신뢰할 수 없지만 빈곤국이었던 아이티는 회생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재난불평등’을 소개하는 서평은 1906년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한 대지진에 주목한다. 리히터 지진계의 부재 시절이었지만 학자들은 진도 7.8정도로 예측하는 엄청난 재난이었다. 사망자가 3,000명에 달했고 도시의 80%가 피해를 입었다. 또 30만명 가량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도시는 보험금을 노린 방화까지 겹쳐 재만 남았다. 그러나 수개월 만에 샌프란스시코는 활력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파괴력에서 앞섰던 지진피해를 입은 샌프란시스코와 아이티를 비교하며 자연이 가져 온 지진 자체보다 그 사회가 가진 모순으로 인한 피해가 더욱 크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머터가 정말 이야기하고픈 깨달음은 서평에 등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아이티와 뉴질랜드, 호주 등 선진국의 사회 시스템을 비교며 인사이트를 얻고자 한다. 같은 지진대에 속해 있지만 뉴질랜드의 경우 강력한 지진충격에도 피해는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는 건축당시 설계도대로 깐깐하게 감리하는 선진국과 각종 이권, 뇌물이 판치는 후진국의 시스템에서 오는 차이라는 설명이다. 강력한 내진설계로 버텨주어야 할 병원의 90% 이상이 붕괴된 아이티의 상황이 이해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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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일 밤 서울 강남구 대치역 인근 도로가 물에 잠기면서 침수된 차량을 버리고 운전자들이 대피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지난 8일부터 17일간 전국적으로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특히 수도권에 집중된 폭우는 자연재해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만을 드러낸게 아니다. 우리가 재해 앞에서 얼마나 교만하고 게으르며 비인간적인지를 보여주었다. 주거공간으로서 반지하(半地下)의 비인간성은 그동안 누누이 지적됐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은 적나라한 실상을 지구촌에 알렸다. 삶의 안식처가 무덤이 되는 상황은 바라보는 이들을 아노미로 몰아넣었다. 승용차가 둥둥 떠다니던 서울 강남은 지난 2010년과 2011년 거의 유사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 당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호들갑과 대책을 보면 현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시 자체가 수장됐던 미국 뉴올리언스 지방도 늘 낮은 지역의 배수와 제방의 보강이 전문가와 언론에 의해 강조됐지만 예산상의 문제로 뒷전이었다. 국가 전체가 재난을 맞아 1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폐허 상태인 아이티도 지진에 대한 여러 차례 경보가 있었지만 무시됐다. 결국 사회 구조적 모순과 극단적 빈부 차이의 극복이 재난에 대한 근원적 치유책이라는 결론에 귀착한다. 한시적이거나 사회적 모순의 방치 또 제한적 구휼은 근원적 치유책이 되지 못한다.
다행인 점은 윤석렬 대통령의 발언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15일 국가위기관리센터를 찾아 관련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재난은 늘 서민과 사회적 약자에게 더 큰 피해와 고통으로 다가온다”며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통해 똑같은 피해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가 실천되려면 사회 시스템의 완비가 시급하다. 그것도 재난방지 시스템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삶의 형태를 바꾸는, 씨실과 날실을 엮는 전방위적 시스템 보강이 시급하다. 햇볕이 있을 때 반지하에 차오른 물의 공포를 기억하자. 그리고 재난은 불평등하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하다는 점을 잊지 말자. /미디어펜 = 김진호 부사장
[미디어펜=김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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