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형문자의 비밀 밝혀내 ‘이집트’ 부각…인류사 기여하고도 매도당해
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 복거일 소설가

'로제타 비석(Rosetta Stone' 발견 200주년을 맞아, 지금 유럽에선 갖가지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로제타 비석에 새겨진 상형문자들을 해독((解讀)함으로써, 현대 사람들은 상형문자로 씌어진 자료들을 읽을 수 있게 됐고, 덕분에 오랫동안 잊혔던 고대 이집트 문명이 비로소 현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풍성한 행사들로 그 일을 기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행사들은 로제타 비석이 보관된 영국과 그것을 해독한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 Francois Champollion, 1790~1832)의 조국인 프랑스에서 가장 활발하다. 반면에, 보물을 빼앗긴 셈인 이집트는 시무룩한 모습이다.

로제타 비석은 1799년 8월 나일강 삼각주의 로제타(아랍어로는 라쉬드) 근교에서 영국과 인도 사이의 연락을 끊으려고 파견된 프랑스 군대에 의해 점령됐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이 거느린 영국 함대에 의해 괴멸되어서, 프랑스 군대는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프랑스 군대를 지휘했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은 마침내 조그만 배 두 척으로 이집트를 탈출했고, 뒤에 남겨진 프랑스 군대는 두 해 뒤 영국 군대에 항복했다. 그래서 로제타 비석도 영국 군대에 넘겨졌고 지금까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왔다.

로제타 비석은 검정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불규칙한 형태의 비석으로 길이가 114cm이고 폭이 71cm이다. 그것은 고대에 부서져서, 새겨진 글의 상당 부분이 없어졌다. 거기서 사용된 언어들은 이집트어와 그리스어이고 사용된 문자들은 상형문자(hieroglyphics), 민용문자(民用文字, demotic) 그리고 그리스 문자였다.

하나의 글이 이렇게 두 언어들과 세 문자들로 씌어졌고,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자는 잘 알려졌으므로, 상형문자와 민용문자를 해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여겨질 만했다. 실제로 그리스어 대본은 곧 해독되었고, 그 글이 이집트 국와 프톨레마이오스 5세(재위 기원전 203~181)에 대한 송덕문(頌德文)이며 기원전 196년에 지어졌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상형문자는 뜻밖으로 어려워서, 여러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해독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이는 영국의 의사이자 학자인 토머스 영(Thomas Young, 1773~1829)이었다. 그는 국왕 이름들이 ‘카르투쉬(Cartouche)'라고 불리는 타원으로 둘러싸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나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같은 굮왕 이름들은 외국 이름들이었으므로(당시 이집트를 다스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 사람들이 세운 왕조였음), 음가(音價)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표기됐으리라고는 그는 옳게 추정했다. 아울러 그는 상형문자들은 새들이나 짐승들이 바라보는 방향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영의 성취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형문자의 해독에서 결정적 업적을 남긴 것은 샹폴리옹이었다. 그는 언어학에서 일찍부터 재능을 드러냈다. 특히, 그는 콥트어(Coptics)가 고대 이집트어라는 주장을 폈는데, 그 주장은 옳았음이 밝혀졌다. 182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로제타 비석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서, 그는 민용문자가 승용문자(僧用文字, hieratic)로부터 전했고 승용문자는 상형문자로 발전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민용문자로 씌어진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을 확인하자, 그것을 승용문자와 상형문자로 재구성했다.

그는 뒤에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그리스어와 상형문자로 씌어진 글에서 자신이 재구성한 것과 거의 같은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을 찾아냈다. 이어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가 p,t,o,l 및 e의 다섯 글자들을 공유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는 이 글자들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들만이 아니라 나머지 글자들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들을 모두 확인했다.

1882년 8월 그는 로제타 비석보다 오래된 글들의 사본을 얻었는데, 그 속엔 람세스(Ramses)와 투트모세(Thutmose)를 둘러싼 카르투쉬들이 있었다. 로제타 비석에서 읽어낸 문자들과 콥트어 지식을 활용해서, 그는 그 두 이름을 풀어냈다. 상형문자로 씌어진 이집트어를 해독하는 열쇠가 마침내 마련된 것이었다.

상형문자가 그렇게 해독되자, 예상과는 달리, 상형문자는 주로 뜻이 아니라 음을 읽힌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로제타 비석도 먼저 그리스어로 씌어진 다음 상형문자와 민용문자로 번역됐다는 것이 드러났다.

샹폴리옹의 멋지고 뛰어난 성취는 큰 저항을 만났다. 그리고 샹폴리옹 자신은 거친 인신공격까지 받았다. 그런 비난은 주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적 전통을 이어받은 학자들이 퍼부었으니, 그들은 샹폴리옹의 발견에 의해 고대의 ‘야만적’ 국가인 이집트가 갑자기 역사에서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샹폴리옹의 성취에 대한 그런 부정적 반응은 고대 문명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최근에 얻어진 것임을 일깨워준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오랫동안 잊혔고 인류가 다시 그것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두 세기가 채 안 된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함께 중동의 주요 세력들 가운데 하나였던 히타이트는 이집트 문명보다 훨씬 늦게 19세기 말엽에야 비로소 재발견됐다. 마야 문명은, 근년에 마야 상형문자가 해독되면서, 이제 비로소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사하라 사막에선 이집트 문명의 원류로 여겨지는 아무 오래된 문명의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고대 문명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빠르게 늘어나고 있으며 보다 정확해지고 있다. 그것은 크게 고무적이니, 과거에 대한 지식은 사람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서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