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문상진 기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6주기 추모식은 추도가 아닌 분열과 갈등, 증오와 분노의 굿판으로 뒤틀리고 얼룩졌다.
고인을 기리고 고인의 뜻을 되새겨야 할 추모식 현장에서 조문객들을 향해 시위현장에서나 있을 법한 험한 말과 물세례가 일어났다.
지난 23일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 노무현대통령의 추모식장은 상주로서의 예의도 조문객을 맞이하는 배려도 없는 그야말로 ‘상(喪)도의’마저 사라진 최악의 장면을 연출했다.
추모식 참석했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노 전대통령의 아들인 건호(42)씨에게 면전에서 비난을 맞으며 일부 참석자들로부터 욕설과 물세례를 당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비노 계열인 박지원ㆍ김한길ㆍ천정배 의원에게도 욕설과 함께 물세례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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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인 노건호 씨가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 서거 6주기 추도식에서 유족 인사 발언을 하고 있다. 그는 추도식에 참석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향해 "권력으로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는 반성도 안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사진=연합뉴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건호씨는 김무성 대표를 향해 “권력으로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선거에서 이기려 국가 기밀문서를 뜯어 읊어대고 종북몰이 해대다 불쑥 나타나시니 진정 대인배의 풍모”라며 비판했다.
추모객들 사이에서는 건호 씨가 한 문장 한 문장 읽기를 마칠 때마다 환호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종이를 꼭 쥔 건호 씨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혹시 내년 총선에선 노무현 타령, 종북 타령 안 할까 기대하지만 그저 헛꿈이 아닌가 싶다”며 비난의 강도를 높였다. 김무성 대표는 할 말을 잊은 듯 쓴웃음을 짓다가 눈을 감았다.
이날 추모객들은 “김무성은 나가라”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는 고함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의 묘역에 헌화하는 김무성 대표에게 물병을 던졌다. 김 대표는 묵념을 마치고 권양숙 여사와 간단한 목례만 한 뒤 자리를 떴다.
한편 새누리당 측은 김 대표의 추도식 참석과 관련, "경남도당을 통해 그쪽(봉하마을)에 참석한다고 알렸다. 불쑥 찾아간 게 아니다"고 했다. 김 대표가 추도식 때 앉았던 좌석에도 김 대표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도 곤욕을 치렀다. 김 전 대표가 참배하고 나오자 이를 본 일부 참석자들이 “너만 살겠다는 거냐” “쓰레기” 등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김 전 대표도 일부 참석자가 뿌린 물에 몸이 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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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23일 오후 경남 김해 봉하 마을에서 열린 고 노무현 대통령 6주기 추모행사에서 헌화 분향을 마치고 추도식장을 빠져 나오던 중 물 세례를 맞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김 의원은 24일 페이스북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누구보다 더 많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욕하고 삿대질해대서야 되겠는가”라고 비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박지원 의원에게 “뒤에서 욕 좀 그만하라”는 비난을, 탈당한 무소속 천정배 의원에게는 “배신자”라는 고함과 물세례를 보냈다.
고인을 기리며 화합과 통합, 치유의 자리가 돼야할 추모식이 결국 갈등과 분열, 분노와 증오로 얼룩지면서 친노와 비노계의 앙금은 더욱 쌓이게 됐고 여야 관계도 함께 험난해질 전망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도 노건호씨의 발언을 놓고 엇갈리고 있다. 이석현 국회부의장은 트위터를 통해 “콜라처럼 톡 쏘고 동치미처럼 씨~원한 일침”이라고 평하는가 하면 친노 한 중진의원은 “건호씨나 지지자들의 울분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원수라도 조문 온 사람들에게는 욕을 하지 않는 법”이라고 일침했다. 친노의 한 재선 의원도 “예상치 못한 격한 발언에 나도 많이 당황했다”며 “대립과 분열의 정치를 보여주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듯 노 전 대통령 아들 노건호씨의 추도사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표는 23일 추도식이 끝난 후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한 것도 통탄스러운데 다시 노무현 이름을 앞에 두고 분열하고 갈등하는 모습들이 부끄럽다"며 "분열과 갈등의 언어가 사라지도록 제가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고 말했다.그러나 문 대표는 김 대표와 일부 새정치연합 비노 의원이 물세례 등 봉변을 당한 것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었다.
문 대표는 다만 "앞으로 당 대표를 하며 당내에서 친노·비노 등 계파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했다. 이에 대해 당 안팎에서는 "문 대표 본인이 친노 패권주의의 핵심에 있으면서 마치 남 일 얘기하듯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재선 의원은 "추도식에서 누구(문 대표)는 박수 갈채를 받고, 누구(김한길 의원 등)는 욕지거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우리 당에 친노·비노가 없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비난했다.
결국 노건호 씨의 추도문과 욕설과 물세례로 이어진 추모식이 새정치민주연합의 친노ㆍ비노의 갈등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된 것이다. 비노 측에서는 "이게 다 문재인 대표, 이해찬 의원과의 교감 속에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한 참석자는 “5·18 때 호남이 아니면 모두 비토를 당했듯이 이번엔 친노계가 아니면 모두가 비난의 표적이 됐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신'의 적통을 이어 받았다고 외치는 문재인 대표를 비롯한 친노들이 바라는 '통합'의 민낯을 보는 듯해 몹시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