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문상진 기자]임인년이 가고 계묘년이 밝았다. 호랑이처럼 사나운 기운이 온통 휘몰아친 힘겨운 한 해였다. 2023년 토끼해가 밝았지만 드리운 그림자는 걷히지 않았다. 대내외적으로 유례없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다산과 풍요, 장수를 상징하는 토끼해가 왔지만 희망과 미래를 얘기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무겁다.
유난히 힘든 한 해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의 고통은 가중됐다. 천정부지 금리에 영끌족과 빚투족은 벼락거지로 내몰리게 됐다. 이태원에선 158명이 희생되는 10·29참사가 국민들의 분통을 자아내며 가슴을 메이게 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우리 사회는 대선후유증과 철지난 이념이 빚어낸 갈등으로 얼룩졌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의 극한 대립이 미래의 불확실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금리· 고물가·고환율이라는 파고에 맞닥뜨렸다. 내수 침체에 경제 버팀목인 수출까지 급격한 둔화의 늪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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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인년이 가고 계묘년이 밝았다. 호랑이처럼 사나운 기운이 온통 휘몰아친 힘겨운 한 해였다. 2023년 토끼해가 밝았지만 드리운 그림자는 걷히지 않았다.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2차 대전 이후 전염병과 전쟁,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지구촌을 뒤흔든 적은 없었다. 콜린스 영어사전은 2022년 올해의 단어로 '퍼머크라이시스(perma-crisis)'를 꼽았다. '영구적(permanent)'이라는 말과 '위기(crisis)'를 합친 단어로 불안과 불안정이 장기화된다는 뜻이다. 안보와 경제 위기가 동시에 맞물리면서 '영구적 위기'는 더 이상 변수가 아닌 상수로 작용하게 됐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최근 "미·중 갈등이 격화돼 세계 경제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며 "우리는 더 가난하고 덜 안전한 세계로 몽유병 환자처럼 걸어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신냉전 분위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IMF는 선진국들의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1.1%로 전망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와 코로나19 시기를 빼면 최근 40년 사이 가장 낮다. 온통 잿빛 전망에서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기획재정부는 내년 경제 성장률을 1.6%, 한국은행은 1.7%로 예고했다. 2%에 못 미치는 경제성장률은 1980년(오일쇼크), 1998년(외환 위기), 2009년(글로벌 금융 위기), 2020년(코로나 사태)뿐이었다.
안팎에서 위기 경보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지만 정쟁에 몰두한 정치권은 요지부동이었다. 승자의 관용도 패자의 승복도 보이지 않았다. 극한 대결과 혼란만 부추겼다. 마주 달리는 소수 여당과 거대 야당의 정쟁 속에 민생은 팽개쳐 졌다. 국민 삼중고(고물가·고금리·고환율)는 제쳐 놓고 '윤석열 예산, 이재명 예산' 싸움으로 누더기가 된 예산안을 졸속으로 늑장 처리했다.
소통은 무시로, 협치는 불화로 일관했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는 거대 야당에 속절없이 발목이 잡혔다. 야당은 '대선 불복'이란 말이 나올 만큼 거칠었으면 이런 야당을 여당은 무시로 대응했다. 국민 158명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10·29참사에 정무적이든 법적이든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국회는 낯 뜨거운 '충성 경쟁'과 '사법 리스크'를 막기 위한 방탄기지로 전락했다. 교수들은 올해의 한자성어로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과이불개(過而不改)'를 뽑았다.
경제는 안팎으로 가시밭길이다. 코로나19의 터널을 빠져나오는가 싶더니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3고'가 한국은 물론 세계 경제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북한의 도발 수위는 점점 높아져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가중되고 있다. 역대급 위기감이 현실화 하고 있다.
수출에 경고등이 켜졌다. 올해 무역수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4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그 규모는 역대 최대인 50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종전 최대치인 1996년 206억2400만 달러의 두 배가 훌쩍 넘는다. 최고 효자 품목이었던 반도체의 부진이 직격탄이 됐다.
고용은 빙하기를 예고했다. 한국개발연구원 (KDI)는 내년 취업자 수 증가폭은 8만4000명으로 올해 79만명에 비해 10분의 1 토막이 난다고 경고했다. 성장 저하, 수출 감소로 인해 이례적인 '고용 있는 침체'의 시대도 막을 내릴 전망이다.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더라도 '불황형 흑자'가 우려된다. 결국 고용시장은 장기간 해빙기를 맞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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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인년이 가고 계묘년이 밝았다. 온통 불확실성 투성이다. 정부는 규제·노동 개혁을 통해 기업할 수 있는 자유를, 야당은 기업이 투자·고용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입법에 힘을 보태야 한다.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다시 일어서야 한다. 신발끈을 다시 묶고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한다. 월드컵대표팀은 9%의 확률을 뛰어넘어 16강이라는 기적을 이뤄냈다. 16강 진출을 확정한 뒤 화제가 됐던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이었다는 한마디는 우리의 가슴속 깊이 메아리쳤다.
경북 봉화의 아연 광산 지하 190m 막장에 갇혔던 광부 2명은 221시간 동안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끝에 살아서 돌아왔다. 허준이 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 겸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상했다. 이들의 이끌어낸 기적은 '꺾이지 않은 마음'에 깃든 희망이었다.
고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도전정신으로 기적을 이뤘다.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반도체 신화를 일궜다. 기적은 '꺾이지 않는 마음'과 도전으로 관통된 '기업가 정신'과 맥이 닿아 있다.
기업인들은 어느 때보다 힘든 한 해를 보냈지만 불확실성은 깊어만 가고 있다. 새해에는 더 혹독한 경영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언제 끝날지, 금리는 어느 선에서 멈출지, 망가진 글로벌 공급망은 언제쯤 정상화될지 온통 불확실성 투성이다. 그러나 멈출 수 없는 생존게임이기에 재계는 위기 극복의 의지를 함께 하자고 호소한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SK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이환위리(以患爲利·고난을 극복해 오히려 기회로 삼는다)'를 강조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GS건설 회장)은 "환부작신(換腐作新·썩은 것을 도려내어 새 것으로 바꾼다)의 자세로 전 방위적 구조개혁을 추진해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중소기업인들도 신년 사자성어로 '금석위개(金石爲開·정성이 쇠와 금을 뚫는다)'를 꼽으며 위기 돌파의 굳은 의지를 다졌다.
이제는 정부와 정치권이 답해야 할 때다. 경직된 노동 시장, 낡은 교육 시스템, 파산이 예정된 연금 제도, 저출산 초고령화사회에 대한 준비와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국가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개혁은, 필요가 아니라 생존전략이어야 한다. 영구적 위기의 시대, 복합적 위기가 몰려오는 퍼펙트스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존을 걸어야 한다.
우리 기업들은 위기 후에 더 강한 기업으로 일어섰다. 기업이 잘 되면 국부가 늘고 복지는 따라 온다. 정부는 규제·노동 개혁을 통해 기업할 수 있는 자유를 돌려주겠다던 약속을 지켜야 한다. 야당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버리고 기업들이 투자·고용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입법에 힘을 보태야 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임을 직시해야 한다. 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미디어펜=문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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