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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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
방민준의 골프탐험(60)- 기분 좋은 멀리건, 당신이 골프의 품격을 알아?
골프의 질을 논할 때 다양한 기준이 동원될 수 있다.
기량 매너 복장, 룰을 적용하는 엄격성의 정도, 라운드의 긴장도를 높이는 방법 등 그 기준을 따지면 꽤 많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적절한 조합을 이루면 이상적이겠지만 라운드에 동참하는 동반자가 네 명이나 되니 적절한 조합은 희망사항이거나 꿈일 뿐이다.
대부분의 라운드는 동반자들의 성향에 따라 그 품격의 수준이 결정된다. 동반자 중에서도 구력이 오래 됐거나 핸디캡이 낮은 사람, 또는 목소리가 커서 분위기를 휘잡는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싱글 핸디캐퍼들이 모인 팀이라면 룰을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스코어, 여기에 따른 엄격한 셈에 집착한 나머지 냉랭한 라운드가 되기 일쑤다.
라운드의 주도자가 골프코스의 자연을 완상하고 한담의 교환을 즐기는 분위기라면 룰이나 스코어는 뒤로 밀리고 멀리건 오케이가 남발되고 적당한 룰 위반도 애교로 받아들여진다. 그늘집마다 한잔씩 걸치면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지만 정작 골프 자체에 대한 재미는 실종될 가능성이 높다.
철저하게 룰의 준수를 강조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크면 살기가 돌면서 서로 감시하는 분위기에 휩싸여 동반자 모두가 동반자로부터 감시받는 분위기 속에 라운드하게 된다.
셈에 철저한 사람이 끼어 있으면 누군가 주머니가 다 털리거나 전반 9홀이 끝난 뒤 클럽하우스의 ATM기기로 달려가는 살벌한 분위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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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라운드는 동반자들의 성향에 따라 그 품격의 수준이 결정된다. 동반자 중에서도 구력이 오래 됐거나 핸디캡이 낮은 사람, 또는 목소리가 커서 분위기를 휘잡는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삽화=방민준 |
기량을 벗어나 라운드 과정을 즐기는 자세와 태도에 따라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 될 수 있다.
매너는 좋은데 골프 자체에 대한 이해도나 숙련도가 낮으면 골프를 하러 온 것인지 덕담이나 나누러 온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수 있다.
물론 기량도 좋고 성향이 서로 다른 동반자를 아우를 수 있는 도량 넓은 고수가 끼어 있으면 비교적 조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수준 있는 라운드를 즐길 수 있다.
기량이나 매너, 룰, 긴장도 등 모든 면에서 수준 이상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내게 초라함을 자각케 하는 동반자를 만났다.
우리 팀은 분위기 좋고, 매너 있고 기량도 일정 수준이상 되는 동반자들이라 라운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어느 홀에선가 한 동반자가 드라이브샷을 날리는 순간 누군가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휴대폰의 주인공은 동반자 중 구력이 가장 짧은 젊은 친구였다. 드라이브샷을 날린 동반자의 볼은 OB지역으로 날아갔다.
그는 아무 불평 없이 티 박스를 내려와 드라이버를 캐디백에 꽂았다. OB를 냈는데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담담하게 인정한 탓인지 얼굴색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티샷한 동반자가 티잉 그라운드에서 내려오려는 순간, 한 친구가 “잠깐!”하고 외쳤다.
“○○씨가 티샷을 하려는 순간 우리 아우님의 휴대폰이 울리는 바람에 OB를 내고 말았습니다. 동반자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씨에게 멀리건을 드리는 게 어떨지요?”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 흔쾌히 멀리건 받겠습니다.”
OB를 날린 동반자의 두 번째 티샷은 보란 듯이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 페어웨이 한 가운데로 날아갔다.
이후의 분위기는 두말할 설명이 없다.
그렇게 정중하게, 멀리건을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적선이나 선심의 감정을 느끼지 않게, 당당하게 멀리건을 주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멀리건을 주고받는 데도 품격이 있구나!’
멀리건을 주면서 보인 동반자의 품위 있는 태도는 라운드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어놓았음은 물론이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며 예의를 지키고 화기애애하게, 미소 속에 라운드를 즐길 수 있었다.
골프에도 품격이 있음을 절감했다. /방민준 골프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