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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소담 칼럼니스트‧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
이성에서 온 여자 정소담
천박한 그 단어, 나는 ‘존나’ 쓰기 싫었다
“소담씨, 안녕하새요. 00이한테 소게받은 000입니다.^^”
문자를 보자마자 주선자에게 전활 걸었다. 그 남자와 만나지 않겠노라고. 이유가 뭐냐고 묻기에 대답했다. ‘안녕하세요’의 ‘세’를 ‘새됐다’ 할 때 ‘새’로 써서 보냈더라고. 겨우 그런 걸로 만나보기도 전에 거절이냐는 면박이 곧장 돌아온다. 겨우 그런 거? 언어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약속한 ‘코드’다. ET와 소통할 때야 손가락 하나와 따스한 마음만 있으면 될는지 모르지만 같은 땅에 살면서 다른 기호를 쓰는 이와 대체 어떤 우정을 나눌 수 있을까.
링컨은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나는 성인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쓰는 언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틀린 맞춤법들을 모아놓은 게시물이 인터넷 상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일해라 절해라’ 한다는 둥 ‘죄인은 오랄을 받으라’는 둥 차마 웃지 못할 사례들이 많았다. 그런데 무책임한 언어생활이 갖는 문제는 단지 기본 맞춤법을 상습적으로 틀리는 ‘맞춤범’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학창시절 나 자신과 했던 굳은 약속이 하나 있다. ‘존나'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욕지거리 자체를 하지 말자는 것이었지만, 쌍시옷이 들어가는 육두문자는 쓰고 싶은 충동도 그다지 없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존나’ 없이는 문장 구성이 어려운 또래 친구들과의 학창시절 그 복판을 지나며 ‘존나’를 쓰지 않기로 한 것은 나 자신과의 전쟁 그 자체였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욕을 하고 싶은 충동이 아니다. 나혼자 ‘존나’를 쓰지 않는다는 소외감, 날 괴롭힌 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뭐든지 존나 그렇다고 말해야 진실돼 보였다. ‘정말’ 멋있다고 하면 거짓말 같고 ‘무척’ 짜증난다고 하면 왠지 찌질해 보이던 때, ‘존나’라는 그 한 마디를 내뱉을 수 없던 나는 정말이지 (존나) 외로웠다.
지나고 나니 저속한 두 글자를 뱉기 위해 입을 한 번 오므렸다 벌렸다하지 않았던 과거가 퍽 대견하기까지 하지만, 어른들의 세상으로 나왔음에도 여전히 비슷한 조류 속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는 조금 착잡한 맘이 되곤 한다. 비속어에 대한 게 아니고 남들이 쓰면 그저 따라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듯 십대들 같은 세태에 대한 얘기다.
천송이가 어마무시하다면 나도 따라 어마무시하고 누가 완전 멋지다면 그냥 완전 멋진 거다. '어마무시’도 ‘완전히-’ 뒤에 따라붙는 형용사도 모두 정체불명의 어법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아니면 일단은 ‘트렌드’를 따라가고 보는 게 요즘의 ‘트렌드’인 것일까.
SNS를 하다보면 초등학생 시절 그 어느 지점쯤에 들어와 있는 듯 착각이 들 때가 있다. '꿀잼’이라고 안하면 나의 흥미를 말 못하고 ‘노잼’이라고 안하면 나의 무심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 그렇다. ‘레알’ 그렇다고 해야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어줄 듯이 언제나 ‘레알’ 절박한 이들도 보인다. 짱짱맨이고 개이득이고 케미가 갑이고 어린 아이들이 그러면 그래 너 사춘기구나 귀엽게라도 봐주겠지만 다 큰 성인이 그러고 있으면 어딘가 얼치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유행어도 비속어도 무조건 쓰지 말자는 게 아니다. 유행어는 트렌드의 날카로운 반영인 경우가 많아 흥미롭고, 비속어는 정말이지 그 말이 아니고서는 내 울분을 도저히 표현 못하는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나 성인이라면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언어생활에 임했으면 좋겠다.
말과 글에는 그 사람만의 향이 있다고들 한다. 사용하는 언어가 그대로 그 사람의 빛깔이랄지 매력이 된다는 얘기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 내 손끝에서 빚어지는 문장은 부디 내 스스로 돌보고 가꾸자. 향기 없는 꽃이 될지언정 악취를 풍겨서야 안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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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감성에서 온 남자 이원우
사면·복권이 불가능한 맞춤범들에게 보내는 고언
이번 주제 정말 마음에 든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심정으로 몇 자를 적어보고자 한다. 이 방면으로는 나도 할 말이 무지하게 많다. 글을 쓰는 일 만큼이나 많이 하는 업무가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웹출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애잔한 풍경은 상습적으로 맞춤법을 틀리는 맞춤범 전과 10범인 주제에 세상을 내려다 보는 톤으로 글을 써왔을 때다. 바로 얼마 전에도 아주 자신만만하게 이 세상에 독설을 날리는 글을 읽었다(정확히 말하면 읽다 만 거지만).
현재 대한민국이 봉착한 위기에 대해 진단을 해 보려는 글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결론만 말하면 그 글은 내 마음에 아무런 감동도 남기지 못했다. 첫 문단 하나에서만 3개 정도의 오타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거야 수정하면 그만이지만 주술관계가 꼬여있는 비문(非文)도 여러 건이었다. 이것들을 푸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굳이 흉내를 내보자면 이런 식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위기의 상당수는 국민들의 미개함과 낮은 지력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이론을 일갈하지 않을 수 없다.”
얼굴에 코딱지가 붙은 사람이 청결의 소중함을 강변하는 것과도 비슷한 수준의 우스꽝스러움 아닌가. 돈 받고 쓰는 글인데 그 정도 수질관리도 안 했다는 게 놀라웠지만, 더 큰 반전은 이런 현상이 가히 ‘일반적’이라 할 정도로 잦다는 점이다. 이렇게 제 눈의 들보를 못 보는 안타까운 필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뇌까린다.
‘너 같은 맞춤범에겐 사면·복권조차 사치라고 일갈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뭐 대단한 문호는 아니지만 어디 가서 글쓰기로 밑천을 드러내지 않는 노하우 정도는 말할 수 있다. 첫째, 짧게 쓰면 된다. 문장을 줄이면 비문이 발생할 확률도 현저하게 낮아진다. 사람들이 당신의 무식함을 눈치 챌 가능성도 그만큼 떨어진다.
두 번째는 더 간단하다. 잘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자. 책꽂이 한 구석에서 하루하루 먼지를 쌓아가고 있는 프라임 새국어사전까지 갈 필요도 없다. 전 국민의 놀이터 네이버에 검색해 보면 되는데 왜 그 정도 노력도 안 하는 걸까. 그리고 MS워드건 한글이건 어법상 어색한 부분엔 빨간 줄이 그어지는 기능이 있는데 그 정도 점검도 안 하고 글을 발표하는 비양심은 되지 말자. 그 기능 넣느라 밤잠을 못 이뤘을 빌 게이츠/한글과컴퓨터 입장도 좀 고려해 주시길 바란다.
셋째, 자신이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좋다. 머릿속으로만 읽을 때에는 알지 못했던 오류들이 낭독하는 과정에서 발견되곤 한다. 특히 비문을 없앨 때 이 방법은 상당히 유용하다.
‘블랙스완’을 쓴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어떤 사람이 글쓰기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실패한 작가”라고 말했다. 맞춤범들에게 글쓰기에 관한 세 가지 제안을 했으니 나도 이젠 실패한 작가가 되고 만 셈이지만, 그래도 꼭 말하고 싶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아이고 시원해라. /정소담 칼럼니스트‧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