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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미 교육학 박사/용화여고 교사 |
우리나라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변변한 자원도, 자본도 없이, 높은 수준의 고등교육을 달성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국가발전을 이루었다. 어느 나라보다 뜨거웠던 교육열 덕분에 자녀의 학력 상향 이동이 61%에 달했다. 이는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교육 서비스가 공공재라는 오해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등록금은 물론이고 교실 당 학생 수와 대학입시 정책 모두가 교육부라는 관료조직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구조로 전락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들은 사회로 공급되고, 고등학교 교육은 획일화에 찌든 상황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덩치를 키워온 공룡이 바로 교육방송 EBS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수능시험에 전전긍긍하며 3년을 보낸다. 수능 중심의 교육은 학생 스스로 해답을 생각하고 구조화해나갈 수 있는 능력 키우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지적된다. 실제 학생들은 문제풀이 위주의 기술적인 능력, 실수를 줄이기 위한 반복 학습에 얽매인다. 5지선다형으로 주어진 문항 속에 답이 하나 있으리라는 막연한 강박에 갇혀 있다.
EBS 수능 교재에 나오는 사회 문제 하나를 풀어보자.
(가)기부와 (나)사회봉사에 대한 이해력을 테스트하는 문항으로 문제집 답안지에는 ④번이 답이라고 주장한다. 기부나 사회봉사 모두 ‘단체’를 통해서 할 수 있기 때문에 틀린 설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②번도 답이 될 수 있다. 기부를 통해서 ‘자활’을 도울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자활(自活)은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다. 오히려 스스로 일어서는 의지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
인터넷 동영상 칠판강의를 통해 강사들이 획일적으로 제공하는 정보를 객관식 문제에 종속시킬 수 있는 학생만이 확실하게 ④번을 답으로 택할 수 있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무상 금전 제공이 그들의 ‘자활’을 도우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은 채 말이다.
이처럼 편향·왜곡된 문제가 지적되어온 『한국사』, 『일반사회』, 『사회문화』, 『문학』, 『윤리』 등의 교과서가 개념을 가르친다면 ‘EBS-70% 연계한 수능’ 문제는 이를 객관화시켜 암기‧주입시키는 구조다.
교육 상품은 정부가 아니더라도 시장이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
교육부는 2014년 EBS를 통한 고교 사교육 경감액이 1조 원이 넘었으며 이는 고교 사교육비 전체 규모 5조 원의 20%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과연 EBS는 공영방송 EBS의 역할을 다 하고 있을까?
EBS의 운영 구조를 보면 수신료(3%)와 방송발전기금이라는 이름 아래 집행되는 정부지원금과 수능 및 영어채널 운영을 통해 거둬지는 특별교부금이 있다. 이는 한 해 예산 30%를 차지한다. 나머지 70%는 광고 및 협찬금과 교육시장에서 유통되는 EBS 수능방송콘텐츠와 교재콘텐츠 수익으로 운영된다. 결국 EBS는 사실상 민간의 자본으로 움직이는 방송사라 볼 수 있다.
학교 위에 올라선 EBS : 교재는 ‘성경’, 강사는 ‘메시아’
학생들은 수능에서 한 문제만 틀려도 바로 2등급으로 떨어지고 두 문제를 틀리면 3등급이 된다. 한 과목만 등급이 떨어져도 그동안의 목표와 꿈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EBS 방송을 스스로 주입하고 또 주입한다. 교과서보다 EBS 교재가 우선이 됐다. EBS 수능 교재가 ‘성경’이라면 인기강사는 일종의 ‘메시아’인 셈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기 강사는 이런 과정에서 탄생한다. 학생 스스로 느끼고 즐기며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공부는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시험만 끝나면 변별력 논란이 일고 학생과 학부모의 불만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컨텐츠에 대한 별다른 모니터링도 없어 PD가 단독으로 정하면 그대로 방영이 되는 구조, <지식채널e>나 <다큐프라임> 등 교육기획 다큐멘터리에선 좌편향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 모든 문제의 발생 원인은 무엇일까? 교육은 공공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수요자들이 요구하는 교육 상품들은 정부가 아니더라도 시장이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 번창하는 ‘사교육’ 산업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교육이 상품이라면 학생과 학부모들은 소비자들이다. 사교육을 억제하는 데에만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서로 맞아 떨어져야 할 교육의 수요와 공급이 불일치하게 된다. 사실상 민간의 자본으로 움직이는 EBS가 공교육 위에 올라타 있는 기형적인 모양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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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서울 강남구 도곡동 EBS 본사에서 열린 '지상파 다채널 방송 EBS2 개국식'에서 신용섭 EBS 사장(오른쪽 다섯번째),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왼쪽 네번째) 등 참석자들이 송출버튼을 누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왜곡·편향은 구조의 문제… 공교육이 오히려 사교육을 해친다.
교과서 편찬 기준이 되는 교육과정이 아무리 중립적으로 기술되어 있어도 집필자가 저술 과정에서 편향적 내용을 부각시킨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생활 방식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권리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는 교육부의 지침(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 2007–79호), 이 한 문장만으로도 세상 모두가 약자가 되어 버리는 현행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교과서 내용을 EBS는 방송을 통해 확대 재생산한다. 교육부라는 거대한 관료조직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획일적 교육정책 아래에선 EBS강사가 EBS수능교재 집필자가 되기도 하고 교과서 집필자, 수능 문제 출제자가 되기도 한다. 공영방송이니 어련하게 잘하겠지 하는 믿음에 모니터링도 잘 되지 않아 사회주의적 인식에 바탕을 둔 교과서와 컨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편향의 문제는 결국 구조의 문제다. 정부 주도의 입시 정책이 대학이 가져야 할 학생 선발권을 EBS라는 한 방송사가 가지게 되는 기형을 낳았다. 이처럼 공교육이 사교육을 해치는 경우는 있어도 사교육이 공교육을 해치는 경우는 없다.
‘성장판’ 닫는 정부주도 획일화… 교육은 공공재가 아니다.
지금까지 평준화, 기회균등, 삼불정책, 수능, 무상급식, 학생인권조례 같은 정책들은 학생들을 도구화, 정치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획일화 교육은 학생들에게 이유 없는 괴로움만 안겨주었다.
하버드 대학의 입학지원 설명서에는 “우리는 숫자놀음은 안 한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미국의 대부분 대학들이 학구능력, 과외활동실적, 스포츠 실력, 성격의 네 가지 특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학생들을 선발한다. ‘EBS-수능 70% 연계’ 정책 같은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다.
사회평론가 복거일 선생님의 지적대로 입시지옥은 이제 배급제도가 불러온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많은 부작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가장 먼저 현행 ‘EBS-70% 수능 연계’ 정책은 폐지되어야 한다. 70%라는 숫자만 없애더라도 꽉 막힌 숨통이 조금은 트이리라.
‘스스로 배우게’ 하지 않고 ‘(뭔가 신성한 것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교육 공공재 논리다. 어려웠던 시절 구로공단 여공들이 다녔던 야학도 사교육이었고, 대학 입시에서 실패한 재수생들을 비롯한 성인들이 받고 있는 여타의 교육 역시 모두가 ‘사교육’이다. 이를 규제하겠다는 것은 개인의 성장판을 닫겠다는 뜻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 문제는 학교 교육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학생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좋아하는 과목과 좋아하는 선생님을 고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결과에 따른 책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경쟁이라는 발견적 절차를 통해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생 개개인의 무한한 가능성은 이러한 환경 하에서만 이끌어 낼 수 있다. 교육은 결코 획일화된 공공재가 아니다. ‘스스로 배우게’ 하는 것이다. 교육 과정은 물론 진학과 입시 과정에서 정부가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김소미 교육학 박사,용화여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