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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한윤형 기자에 대한 일이라 더 관심이 갔다. 그는 나와 2013년 연말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에 대해 짧은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엄청난 생산성으로 명석한 커리어를 이어가는 그와의 견해 차이는 너무 컸기에 오히려 흥미로웠다. 두 83년생이 마시고 있는 공기는 그렇게 달랐다.
모두가 그랬듯 한윤형 기자가 데이트폭력 같은 이슈에 거명될 줄은 몰랐다. 더 의외였던 사실은 한윤형이 그저 ‘뇌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이후로도 줄줄이 피해자들의 폭로가 이어지는 중이다. 리스트가 길어지면서 이 문제를 진영 전체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도 생겨났다.
사람들은 말한다. 가해자가 진보 쪽 사람들이라 더 실망스럽다고. 기이한 일이다. 폭력은 좌우를 막론하고 똑같이 나쁜 일인데 왜 더 실망스러울까.
같은 잘못을 했어도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그 사람조차도 상황에 따라 불평등한 판단을 한다. 성직자나 법조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평소보다 더 커다란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식이다.
여성의 권리에 대해 소리 높여 발언하던 사람이 애인을 때렸다는 사실은 평소에도 여성을 무시할 것 같던 사람이 그러는 것보다 낙차(落差)가 훨씬 크기에 배신감도 비례해서 증가한다. 오늘은 문득 이 ‘낙차’에 대한 얘길 해보고 싶어졌다.
“여자애들이 혁명보다 혁명가를 좋아해서 운동했다더니 남자애들은 정의보다 정의를 집행하는 힘에 도취됐던 거야?” (은희경 ‘태연한 인생’)
386세대가 ‘혁명’하던 시절 남긴 충격적인 에피소드들은 무수히 많다. 시대가 어떻고 독재가 어떻고 정의가 어떻고 떠들던 자들의 뒤틀린 성욕, 은밀한 폭력, 역겨운 표리부동. 역사의 주체를 자처한 그들이 범인(凡人)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기행들을 저지른 건 그저 우연이었을까. 스스로 짊어진 삶의 무게가 지나치게 컸던 반작용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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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시간 고통 받아온 피해자들의 폭로가 그저 가해자들에 대한 비난과 퇴출 정도로 갈무리된다면 뭔가 부족하다. 그것은 강력하기만 할뿐 효율적이지 못한 대안이다. /사진=TV조선 캡쳐 |
이들이 과분한 짐을 짊어지게 되는 데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좌파들은 우파에 비해 공동체를 중시한다. 그래서 줄곧 연대(連帶)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복수의 개인들이 힘을 합친다는 의미를 가진 이 단어의 핵심은 사실 ‘공동 책임’에 있다.
공동의 이름은 혼자 감당하기 무거운 것들을 짊어질 용기를 내도록 도와준다. 여기서부턴 나눗셈이다. 분모는 사람 숫자, 분자는 그들이 감내하기로 한 과업이다. 분자의 무게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직장, 지역공동체, 국가, 전 인류, 세계, 지구, 우주….
반면 분모의 무게는 산술급수적으로만 올라간다. 사람 하나 데려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인재는 언제나 기근이다. 무거운 책임을 함께 지자고 시작한 일인데 결과를 놓고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과분한 짐을 지운 셈이 돼버렸다. 이 난국을 극복하려면 각각의 멤버들이 ‘일당백’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수는 적지만 우린 특별한 사람들이니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이상은의 노래 제목처럼 ‘사람은 다 사람’일 뿐인데, 서로가 서로를 대단하게 취급하는 사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기대치도 턱없이 올라가 버린다. 그러다 이번 같은 일이 생기면 한순간에 거품이 빠지면서 감정도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나는 이번 사태의 당사자들 다수가 우울증과 불면증, 자괴감에 고통 받아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에 대해,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들의 심리를 이해한다 해서 가해자들이 저지른 폭력까지 정당화되는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진보진영 사람들이 인간을 지나치게 고매한 존재로 오인하는 한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계속 일어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른바 ‘보수’ 진영의 사정은 조금 다르게 돌아간다. (극소수의 ‘자유교 신자’들을 제외하면) 우파들도 공동체를 중시하지만 역시 더 우선시하는 건 개인이다. 우주의 평화를 말하기 이전에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부터 확보하자는 게 우파적 사고방식이다.
어떤 땐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하자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하지도 말자는 마인드. 비슷한 사건이 우파진영에서 일어났다면 ‘폭로’라는 방식이 과연 적절했느냐는 것도 쟁점이 됐을 것이다. 법으로 처리하면 되는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을까? 이렇게 좌우 진영은 서로 다른 특성과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일련의 데이트폭력 사태에 대해, 진보진영 내부에서는 가해자들을 영구적으로 퇴출시켜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안다. 가해자들이 집필한 책을 처분하자는 게 트위터에선 이미 정론이다. 이런 반응 또한 인간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저변에 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마음이라면 일찌감치 접는 편이 좋지 않을까.
오랜 시간 고통 받아온 피해자들의 폭로가 그저 가해자들에 대한 비난과 퇴출 정도로 갈무리된다면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강력하기만 할뿐 효율적이지 못한 대안이다. 가해자들을 제거하면 세상이 그만큼 깨끗해질 것 같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분모가 줄어든 만큼 남겨진 사람들은 더 버거운 무게감을 감내해야만 한다.
진보라고 늘 진보할 수만은 없다. 인간은 때때로 퇴보하며, 동시에 거기에서 뭔가를 배워나가는 존재다. 당장 감옥에 처넣어야 할 수준이 아니라면 고쳐서[補修] 쓰는 것도 방법이라는 보수(保守)적 마인드를 문득 얘기해 보고 싶었다. 인간을 중시한다는 진보진영의 사후처리가 지나치게 비인간적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