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70)-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 문명의 쇠락을 부르다
투키디데스(기원전 460?~400?)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그리스 세계가 힘을 합쳐 페르시아를 물리친 이후 내부의 균열이 생겼다. 3차례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전한 그리스 세계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같은 민족의 도시 국가 간에 패권 경쟁으로 분열되고 서로를 파멸과 쇠락의 길로 몰아넣었다. ​골리앗에 맞선 다윗과 같던 그리스 세계가 전력의 절대적 열세를 뒤엎고 페르시아에 굴종하지 않고 자유를 지켜낸 위대한 승리의 대가치곤 너무 가혹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은 대(對) 페르시아 전쟁 승리의 주역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패권 다툼의 과정에서 발발했다. ​

출발은 선의에서 시작되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세력을 지중해에서 완전하게 축출하기 위해 아테네에 동조하는 도시국가들을 묶어 델로스 동맹을 결성한다. 페르시아 전쟁으로 참담한 굴종을 경험했던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희생적으로 앞장 선 그리스 세계 수호 전쟁의 대열에 동참하지 못한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때 마침 아테네가 페르시아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동맹 결성을 주도하고 나서자 공동 전선을 취하기 위해 델로스 동맹에 참여하게 된다. ​

   
▲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 이후 아테네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박경귀
동맹 국가들은 전쟁 수행을 위해 공동의 기금을 축적하고, 함선을 보강하도록 지원하는 등 에게 해와 소아시아 지역에서의 페르시아 세력의 완전한 축출을 계속 주도해 나가던 아테네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하지만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길어지자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다. 특히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아테네가 동맹을 해체하지 않자 불만이 고조된다. ​

더구나 처음에 자유 수호의 선의로 시작된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가 동맹국들에게 지나친 공물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다른 국가들에게 짐이 되었다. 결국 아테네가 처음의 선의를 잊고 동맹국에게 교만하게 구는 제국주의적 행태를 보이면서 그리스 세계의 분열을 자초했다. ​

아테네의 독주를 우려하던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대한 도시 국가들의 민심 이반을 보면서, 스파르타 주도로 이미 느슨하게 결성되어있던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이로 인해 두 강대국의 패권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 세계가 양분된다. 이런 상황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

많은 역사가들은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27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가장 부질없고 참혹했던 소모전이었다고 비판한다. 이 전쟁이 그리스 문명의 쇠락을 불러왔다는 데 대부분이 동의하기 때문이다. 특히 만개했던 그리스 문명의 힘을 전쟁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소진시켜 결국 마케도니아에게 패권을 내주고, 곧이어 등장한 로마에 무릎을 꿇게 되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그리스 국가들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투쟁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양분한 그리스 도시국가 간의 비참하고 부끄러운 내전의 전개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쟁터는 스파르타가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아테네의 아티카 지방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 식민지인 시켈리아(현재의 시칠리아) 지방과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도시까지 확대된다.

아테네는 시켈리아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시라쿠사 원정에 나섰다. 또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했다. 물론 여기에는 막후에서 이 두 국가의 패권경쟁을 부추기며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를 이간시킨 페르시아의 교묘한 농간도 작용했다.

아무튼 아테네가 시라쿠사에게 참담하게 패배하고, 아티카의 지상전에서도 스파르타에 패배함으로써 종전된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면서 끝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승자인 스파르타나 패자인 아테네뿐만 아니라 전쟁에 참여한 모든 도시국가들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주었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전쟁 말기인 기원전 411년까지 기술되고 갑자기 중단되었다. 이후의 전쟁 상황을 이어서 쓴 사람은 크세노폰이다. 그는 투키디데스가 완성하지 못한 전쟁의 결말을 기술했다. 그는 <헬레니카(Hellenika)>를 저술했다. 이 책은 기원전 411년부터 362년까지 49년간의 그리스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사료다. ​

   
▲ 투키디데스 흉상, 아테네 국립 전쟁박물관 ⓒ박경귀
아무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각 나라 사이에는 동맹과 배신이 거듭되었다. 국익을 위해 언제든지 동맹의 주축국인 스파르타나 아테네와 연합하거나 배신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불신과 교활한 계략이 판을 쳤다. 이로 인해 동존상잔의 전쟁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었다. 투키디데스는 이런 사례를 풍부하게 보여준다. ​​

이 전쟁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양분한 당시의 정치체제 간의 대결이기도 했다. 스파르타는 동맹국과 아테네의 동맹 도시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약속하여 과두정을 세우려 시도했다. 반면 아테네는 스파르타 지배 하의 도시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며 민주정을 도입하도록 추동했다. 겉으로는 똑같이 해방과 자유를 표방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 도시국가들은 스파르타와 아테네 어느 쪽이든 패권 국가의 영향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내건 자유와 해방은 선전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전쟁 과정에서 각 나라들이 전개한 군사전략과 평화와 지원 획득을 위해 치열하게 벌어진 외교전, 그리고 아테네를 휩쓴 역병의 참혹함과 전쟁터에서 죽어간 수많은 병사와 시민들의 비참한 정경도 그린다. "현역으로 복무 중이던 중무장 보병 4천4백 명과 기병 3백 명 이상이 죽었고, 일반 민중은 얼마나 죽었는지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역병의 피해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게 해 준다. 2차례 3년 간 지속된 역병은 아테네 군 전력을 치명적인 수준으로 약화시켰고, 패전의 결정적 요인이 된다. ​

또 한시적인 평화협정이 맺어졌다가 파기되는 과정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이 되고, 동맹국이 다시 적으로 돌아서는 많은 사례도 기술하고 있다. ​적국이나 동맹국을 설득하기 위해서, 또는 자국의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행해진 다양한 연설도 읽어볼 만한 대목이다. 그 가운데 특히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의 전몰 용사 추도 연설이 뛰어나다.

"시민 개개인은 번영하지만 국가 전체가 넘어질 때보다는 국가 전체가 똑바로 서는 편이 개인에게도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한 개인이 아무리 잘나간다 해도 국가가 망하면 그도 총체적인 파국에 휩쓸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안전하다면 개인은 불행을 당해도 회복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평화와 전쟁 가운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다른 방면에서 잘나갈 경우 전쟁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일 것입니다. 그러나 굴복하고 곧장 남에게 예속되든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며 버텨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때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는 위험을 피하는 편이 더 비난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페리클레스는 탁월한 연설과 리더십으로 아테네의 수호의 필요성을 설득시키고 용기를 북돋웠다. "페리클레스는 명망과 판단력을 겸비한 실력자이자 청렴결백으로 유명했기에 대중을 마음대로 주물렀으며, 대중이 그를 인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들을 인도했다."

   
▲ ​전몰자 추도연설을 하는 페리클레스, Philipp von Foltz(1805–1877) 1877년 작
또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오만한 아테네인들의 협박에 의연히 맞서 보편적 선(善)과 자유의 소중함을 주장하며 중립국으로 인정해 달라고 간청했던 멜로스인들의 연설 대목도 음미해 볼만하다.

멜로스는 아티카 반도에서 남동쪽으로 점점이 흩어진 키클라데스 제도(諸島) 가운데 한 섬이다. 아테네는 에게 해의 모든 섬들을 완전하게 통제하고 싶었다. ​아테네 사절단은 멜로스 인들에게 자신들 편에 서라며 위압적으로 연설한다.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텐데요." ​

멜로스인은 이에 쉽게 굴하지 않고 이렇게 응답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보편적인 선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위기에 처한 사람은 누구나 공정한 처우를 받아야 하며, 다소 타당성이 결여된 소명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여러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되듯 우리가 여러분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항변했다. 항복과 굴종을 요구하는 아테네인과 이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멜로스인의 설전은 무위로 끝났다.

아테네가 멜로스를 포위하고 몇 달 동안 공격하자 내부에 배신자가 생겨 멜로스는 무조건 항복하고 만다. 아테네는 멜로스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았다.

또 93년 동안 아테네의 동맹국이던 플라타이아는 스파르타에 끝까지 항전하다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스파르타 군은 살아남은 플라타이아 전사와 시민들을 한명씩 불러내 스파르타와 동맹국들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느냐 묻고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하는 자는 예외 없이 죽였다. 200명 이상의 플라타이아인과 아테네인 25명을 그런 방식으로 학살했다.

멜로스와 플라타이아 학살 사건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과정에서 아테네나 스파르타 어느 한쪽에 줄서기를 강요당했던 그리스의 약소국가들이 어떠한 참담한 운명에 내몰렸었던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리스인의 삶을 파멸시키는 이런 비극적인 대량 학살은 여기저기서 수시로 벌어졌다. ​

​전쟁은 해상전과 지상전의 위력 대결의 양상도 보였다. 전쟁 초기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주도 아래 우세한 해상 전력을 활용하는 전략이 주효했다. 전쟁 말기에 갈수록 스파르타의 최강의 중장보병이 지상 전투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아테네 중심의 해군과 스파르타 중심의 중장보병의 대결이었던 셈이다.

아테네 함대가 시라쿠사 함대에 대파 당하고, 숱한 병사가 전투 과정에서 죽는다. 포로가 된 7천여 명도 채석장에서 가혹한 처우로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다 죽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도 모두 노예로 팔렸다.

아테네의 시라쿠사 참패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체를 통틀어, 아니 투키디데스의 언급대로 "헬라스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이긴 자들에게는 가장 빛나는 승리였지만, 패한 자들에게는 비할 데 없는 재앙이었다." 시라쿠사 패전의 충격은 아테네인에게 공황을 불러왔다.

   
▲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 채석장이다. 아테네 포로들이 이곳에서 노역을 하다 죽어간 곳이다. ⓒ박경귀
아테네는 지상전에서 밀리다 보니 아테네와 피레우스 항을 잇는 성벽에 의존한 수성 작전을 펼 수밖에 없었다. 농촌 지역의 농민들을 대거 아테네 도시를 피난시키고 아티카 전역을 포기하자 스파르타 군의 약탈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도시로 피난온 민중의 생활환경과 보건 위생이 열악해 지면서 역병이 돌고, 수많은 시민이 죽게 되면서 전쟁의 의욕마저 꺾인다.

하지만 아테네의 대함대가 시라쿠사에 몰살당하고, 더 이상 함대를 건조하고 선원을 승선시킬 자원이 부족해지자 지상 전력이 막강했던 스파르타에 굴복하여 그들의 속국이 되는 굴욕적인 결과로 끝난다. 해군력에만 의존하던 안이한 전략이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 ​

시켈리아 참패는 해군력에 대한 아테네의 과신에서 비롯되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인들이 이런 잘못된 원정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현명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페리클레스처럼 민중들이 과신할 때 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과감히 지적하고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판단력과 용기를 갖춘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아쉬워한다.

   
▲ 페리클레스 흉상, 아테네 국립전쟁박물관 ⓒ박경귀
예나 지금이나 민중을 선동하거나 민중에 끌려 다니며 이들의 무절제한 요구에 영합하려는 지도자가 많을 경우 나라의 발전은 퇴보하기 마련이다. 우리 역시 요즘이야말로 국민의 잘잘못을 지적하고 설득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소신과 식견을 갖춘 지도자들이 절실한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아무튼 페리클레스가 죽은 후 아테네의 정치지도자들은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을 뿐 국가의 존립과 융성에 대해 성찰하고 헌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지휘하던 페리클레스가 역병에 결려 사망하게 되는 것은 아테네의 결정적 패인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걸출한 정치지도자를 잃은 이후 아테네는 시민들의 여론을 결집하고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역량과 의지를 가진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전쟁은 조국을 위해 용맹하게 싸운 영웅을 만들어내고 한편으론 야비한 배신자를 낳기도 했다. 아테네의 알키비아데스는 시라쿠사 정벌을 주도하여 패전을 불러왔고, 결국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에 의탁하여 아테네와의 전쟁에서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테네인들의 엄청난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

훗날 소크라테스가 고소를 당해 사형을 언도받고 죽게 된 많은 요인 중의 하나도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저지른 비행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를 배신하고 비열한 행동을 했다. 스파르타의 후원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정권인 30인의 참주정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크리티아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을 그렇게 교육한 것도 아니었고, 당연히 그들의 배후세력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소크라테스에게 전이된 측면을 부인하기 어렵다. ​

한편 그리스 세계의 내전을 잘 이용하여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고 자국의 실리를 챙긴 페르시아의 교활한 외교전 또한 그들에겐 페르시아 전쟁 패배의 또 다른 설욕전이었을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스파르타가 페르시아로부터 독립했던 지중해 연안의 소아시아 지방의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페르시아에 넘겨준 것은 그리스 세계로서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는 후일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벌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

미완으로 끝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 전쟁 이후 절정의 문명을 구가하다가 몰락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전쟁의 전말과 승패를 사례를 실증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전이후 아테네는 페리클레스라는 걸출한 지도자의 리드에 따라 최고의 번영과 민주주의를 누렸다. 문화 예술도 화려하게 꽃피웠다. ​페르시아 전쟁이후 50년은 아테네의 황금시대였다. 하지만 동맹국의 뒷받침아래 이루어낸 아테네의 절정기는 아테네가 오만한 제국주의로 흐르면서부터 암운을 드리웠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몰고 왔고, 그리스 세계의 분열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를 구가한 후에 맞은 그리스 세계의 참담한 비극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다. 국가의 쇠락의 싹은 언제나 달콤한 번영 밑에서 자란다. 대중과 정치가들의 끝없는 탐욕과 오만은 이런 독초를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정치가의 포퓰리즘과 민중들의 절제되지 않은 욕망이 어떤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는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생생한 교훈을 준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1), 8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