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성장이 빚은 비극 우리는 얼마만큼 극복했을까
   
▲ 이원우 기자

2015년 6월 29일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 피해액 2700억 원이라는 ‘숫자’들은 너무 커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외부충격 없이 주저앉은 건물이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붕괴할 수 있느냐는 탄식을 남긴 사고 당시의 사진들이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붕괴는 건설단계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가 안다. 설계 당시 계획한 건물은 지하 4층-지상 4층짜리 종합상가였지만 삼풍건설산업 이준 회장은 무리하게 ‘백화점’으로의 용도 변경을 추진했다. 용도변경시 받아야 하는 전문가의 검토도 생략됐다. 완공 후 준공검사마저 무시한 채 1989년 12월 개점한 삼풍백화점은 5년이 지난 1994년 11월 위법건축물 판정을 받기도 했다.

매출액 기준 대한민국 1위를 달리던 이 ‘강남 백화점’의 처참한 붕괴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에게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특히 무리한 개조로 2014년 침몰한 세월호의 비극은 삼풍백화점 참사와 여러 각도에서 닮아 있었다. 세월호 역시 규제의 사각지대를 이리저리 피해 안전을 무시한 ‘괴물’로 진화, 결국 2014년 4월 16일 침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삼풍백화점은 육지의 세월호였다. 세월호는 바다의 삼풍백화점이었다. 

   
▲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 피해액 2700억 원이라는 ‘숫자’들은 너무 커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외부충격 없이 주저앉은 건물이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붕괴할 수 있느냐는 탄식을 남긴 사고 당시의 사진들이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20년의 시차를 두고도 놀랍도록 닮아있는 두 사건이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사건을 바라보는 여론의 향방이다. 세월호 사건이 대통령 책임론으로 비화된 것과는 달리 1995년 삼풍백화점 사고 때 김영삼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대통령 책임론’이라는 발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의 대형악재를 연이어 겪으면서도 ‘구폐(舊弊)를 척결하는 문민정부 수장’으로서 국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분노가 있었다면 삼풍그룹 이준 회장에 대한 ‘합당한 분노’였다.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괴물을 만들어놓고도 이준 회장은 오히려 카메라 앞에서 “무너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도 피해가 가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라고 당당하게 발언해 공분을 샀다(1995년 7월 4일 MBC 뉴스데스크 화면).

그런 이준 회장조차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받아 징역 7년 6개월을 받은 게 전부였다. 이한상 삼풍백화점 대표이사 사장도 징역 7년을 선고 받았고, 뇌물을 받고 건물의 설계변경을 승인해준 서초구청장들(이충우 황철민)은 징역 10개월과 2백~3백만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2015년의 감수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다.

당시 여론은 오히려 사망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과 생존자들의 기적 같은 스토리에 집중됐다. 사고 이후 피해자 최명석 씨가 11일, 유지환 씨가 13일, 박승현 씨가 17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돼 큰 화제가 됐다. 이 중에서 유지환, 박승현 씨는 1995년 8월 11일 MBC ‘주병진 나이트 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때 진행자 주병진은 생존자들에게 사고를 소재로 한 농담을 던졌다가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역시 2015년과는 여러모로 차이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1995년 무너진 삼풍백화점은 대한민국의 빛나는 발전을 가능케 했던 압축성장 시대가 더 이상 같은 패턴으로 지속될 수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속도에 몰입하느라 놓쳤던 부분을 이제 외면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20년 전에 던져진 질문에 대한민국은 얼마나 충실하게 응답하고 있을까. 어떤 것들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은 아닌지를 묻고 있는, 2015년 6월 29일은 그런 날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