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 새로 쓴 ‘오발탄’의 거장…영화로 ‘질문’ 던지다
   
▲ 이원우 기자

2015년 7월 2일은 영화감독 故 유현목의 탄생 90주년이 되는 날이다.

최근 한국영화의 양적‧질적 침체가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작품은 많은데 볼 게 없다’는 게 위기의 핵심이다. 이 가운데 생존해 있었다면 구순(九旬)이 되었을 유현목의 삶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로는 어떤 게 있을까. 그의 삶이야말로 ‘침체를 딛고 어둠에서 피어난 영광’ 그 자체였다.

1925년 7월 2일 황해도 사리원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유현목의 성격은 내향적이고 때로는 우울했다. 체력이 약한 편이었고 두 살 때에는 큰 화상을 입기도 했다. 소년 시절의 별명은 ‘엉터리.’ 친구도 없이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소년의 이목을 끈 것은 오로지 예술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나갔던 교회 연극에서 연극의 매력에 눈뜬 유현목은 성인이 되기까지 발명가, 바이올리니스트, 소설가, 건축가 등의 꿈을 키웠다. 하나같이 뭔가를 만드는 직업에 매료됐던 그가 1947년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을 무렵 키웠던 꿈은 (드디어) 시나리오 작가였다.

하지만 그늘은 이어졌다. 유현목이 대학을 졸업하던 1950년 전쟁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유현목은 아버지와 네 명의 형, 그리고 동생을 잃는다. 당연히 전쟁은 그의 내면에 큰 상처를 남겼다. 유현목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오발탄’(1961)을 포함해 1960년대에만 26편의 영화를 연출한 그의 포커스는 전후(戰後)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인간 내면에 대한 무거운 성찰에 집중돼 있었다.

   
▲ 유현목 감독 영화 '오발탄' (1961)

그의 경력에서 또 다른 특별한 점은 ‘김약국의 딸들’(1963) ‘잉여인간’(1964) ‘카인의 후예’(1968) ‘불꽃’(1975) ‘사람의 아들’(1981) 등 한국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매우 많다는 데 있다. 이로 인해 ‘문예영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문학이 당대의 거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던 시절 유현목의 영화는 작품의 가치를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2009년 6월 28일 타계한 유현목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비판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90년에 나온 다큐멘터리 영화 ‘조국의 등불’을 감독한 경력이다. 박정희 정권의 출현과 업적을 매우 긍정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이 영화의 제작자는 놀랍게도 박근혜 대통령(당시 육영재단 이사장‧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 회장)이었다.

‘조국의 등불’ 하나로 유현목의 인생 자체를 ‘보수’나 ‘우파’ 같은 정치적 단어에 묶어둘 수는 없을 것 같다.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던 1960-1970년대의 유현목은 오히려 검열과 삭제의 피해자로서 고초를 겪은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내면세계로 침잠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길 좋아했던 이 장인(匠人)의 작품세계는 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관통하고 있었고, 전쟁도 이념도 종교도 하나의 재료이자 고민의 소재일 뿐 그는 치우치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평생의 텍스트로 삼아 진지한 고민을 이어갔던 유현목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한국 영화사에 자양분 역할을 했다. 그 시절에 비해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지금 ‘풍요 속의 질적 빈곤’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 영화에 필요한 것도 유현목이 평생 놓치지 않았던 ‘어두운 질문들’일지 모른다.

화려한 캐스팅과 현란한 액션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2015년 7월 2일은 그런 날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