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30일, 정치개혁을 통한 신뢰회복을 기치로 19대 국회가 개원한지 만 3년이 넘었다. 임기가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돌아본 19대 국회에 대한 평은 좋지 않다. ‘경제민주화’라는 미명하에 시장경제에 역행하는 규제입법양산, 세월호 참사 이후 보여준 입법제로 정국, 무엇보다 소위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한 폐해는 입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
심지어 ‘국회선진화법’은 여야 ‘합의제’라는 관행을 고착화시켜, 최근에는 공무원연금개혁법안 처리와는 무관한 사안까지 연계시켜 ‘국회법 개정안’ 위헌논란을 일으켰고 박근혜 대통령은 거부권까지 행사하였다. 국회법 개정안 위헌 논란과 이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19대 국회는 ‘국회선진화법’의 폐해로 입법부의 권한을 원활히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다.
문제는 합의제라는 ‘국회선진화법’의 폐해 때문에 ‘국회선진화법’ 자체도 쉽게 개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바른사회시민회의(이하 바른사회)는 19대 국회를 결산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그 첫 번째 순서로 19대 국회를 마비시킨 ‘국회선진화법’ 폐해를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19대 국회 혁신 시리즈 토론회 1차] <국회를 마비시키는 ‘국회선진화법’, 어떻게 해야 하나>를 주제로 바른사회는 7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토론회를 열었으며, 토론회는 송정숙 전 보건사회부 장관의 사회로 진행됐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및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가 발제자로 나섰으며, 패널로는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와 전진영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이 참석하여 열띈 토론을 벌였다. 아래 글은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
Ⅰ. 대한민국 국회의 일그러진 자화상
대한민국 국회가 위기다. 87년 민주화 이후 국회는 ‘행정부 견제’와 같은 고유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제하에 있는 한국 국회의 입법 과정은 ‘행정부 대 입법부’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수행되기보다는 오히려 ‘정부․여당 대 야당’이라는 내각제 구도 속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 의원은 국민보다는 정부와 일체감을 가지면서 무조건 정부를 옹호하고, 야당 의원은 의정활동의 목표를 정부․여당을 무조건 반대하는 데만 맞춰져 있다. 결과적으로, 국회의원들이 입법부 구성원으로 정부를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정파적인 이해를 대변함으로써 정치 갈등과 대립은 고착화되고, 여야 의원 간의 몸싸움과 의장 및 상임위원장석 점거 사태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국회 내 물리적 충돌이 심화되었다.
제17대 국회(2004-2008년)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안, 헌법재판소 소장 임명동의안, BBK 특검법과 관련하여, 제18대 국회(2008-2012년)에선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미디어법, 4대강 사업예산안 등으로 인해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한미 FTA 비준안 처리 상정 과정에서 외교통상위원회 회의장 문고리가 야당의원이 내리친 해머로 부서졌다. 통합진보당 김선동 의원은 2011년 11월 22일 한미FTA 비준동의안 처리에 반대하며 국회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뜨렸다. 이로 인해 김 의원은 기소되어 1심과 2심에서 모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4대강 예산이 포함된 2011년 12월 국회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벌어진 의원 간의 몸싸움 장면은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의 사고․사건 사진에 선정되기도 했다.
|
|
|
▲ 누더기법안 ․ 끼워팔기 ․ 불임국회 ․ 소수의 독재 정당화 ․ 대의민주주의 파국…대한민국 19대 국회는 ‘위기의 국회’ 그 자체다.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건설적 대안을 논의할 시점이다. |
한국 국회는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장소로 전락했다. 대화와 타협은 사라지고 농성과 점거가 판을 쳤다. 결과적으로 민의의 정당이 되어야 할 국회가 국민의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한길리서치가 2013년 12월에 실시한 「현 국회 제도와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식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8명(81.0%)은 국회 활동에 대해 “잘못했다”고 평가했다. 국회 활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국민들은 그 이유로 “당리당략”(35.5%)을 1순위로 꼽았다. 국회 입법 활동 평가에 대해서도 “만족한다”는 14.3%인 반면 “만족하지 않는다”는 무려 83.7%나 됐다.
한편, 한국갤럽이 지난 2015년 5월(19일-21일)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88%가 국회가 역할을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고 '잘하고 있다'는 응답은 5%에 불과했다. 2013년 5월부터 8월까지 매월 조사에서는 부정적 평가 비율이 65~80%였고 2014년 11월과 2015년 5월 조사에서는 90%에 육박했다. 이런 저사 결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국회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 국회를 막기 위해 2012년 5월 제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여야 합의로 개정된 ‘국회선진화법’이 시행 4년째를 맞았다. 국회선진화법과 관련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국회는 선진화법으로 정말 선진화가 되었는가?
국회 선진화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법이 도입된 이후 입법 효율성 측면에서 연착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18대와 19대 국회 전반기에 각각 발의된 법안이 상임위원회에 상정되기까지 걸린 평균 기간이 선진화법 도입 후인 19대에서 20일 더 빨라졌고, 본회의에서 가결된 법안 수도 같은 기간 19대에서 69건이 더 많았다는 것을 제시한다. 구체적으로 국회에서 처리된 안건(법안과 일반의안)을 보면 16대 1556건, 17대 3384건, 18대 5241건, 19대 5489건이었다. 그런데, 19대 국회의 최근 1년, 즉 선진화법 시행 3년 차를 18대 같은 기간과 비교해보면 안건 처리율은 43.1%에서 43.3%로 오히려 증가했다는 자료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입법 효율성이 이렇게 높아졌는데 왜 국민들의 국회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더 악화되고 있는가. 국회선진화법이 제대로 작동된다면 국회 교착상태가 해소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국회선진화법을 통계의 관점이 아니라 원칙의 관점에서 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
|
▲ 국회선진화법의 치명적인 문제는 한번 시행되면 고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국 선거에서 어느 정당도 단독이든 연대든 3/5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회선진화법은 반(反)민주적이다. 소수 야당에게 끌려가는 국회는 대의민주주의 원리를 훼손하고 있다. |
한길리서치가 2013년 12월에 실시한 국민의식 여론조사'에 따르면, 입법 과정에서의 국회 선진화에 대해 “더 문제가 많다”가 35.1%로 “선진화됐다(6.6%)”보다 6배 정도 많았다. 국회선진화법 이후 국회 입법과정에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소수당의 발목잡기(29.1%)”와 “법안처리 지연(26.2%)”이 과반수(55.3%)를 넘었다. 이 수치는 “여전히 다수당의 횡포(40.5%)”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국민의 눈에도 국회선진화법은 결코 국회를 선진화시키지 못하는 잘못된 법이라는 인식이 잘 드러난 것이다. 물론 다른 조사 결과도 있다.
한국갤럽 조사(2015년 5월 19일-21일)에서는 “현행 국회선진화법에 따르면 전체 국회의원의 60% 이상이 동의, 즉 여야 합의가 있어야만 쟁점 법안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국민은 '다수당의 일방적 법안 처리를 막을 수 있어 찬성' 41%, '여야 합의가 안 되면 법안 처리가 어렵기 때문에 반대' 42%로 찬반이 팽팽하게 맞섰다. 16%는 판단을 유보했다. 국회선진화법이 국회의 역할 수행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는지 물은 결과 '좋은 영향' 32%, '좋지 않은 영향' 32%로 응답됐다. 그런데 36%는 의견을 유보했다. 그만큼 이법이 무슨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대의 민주주의 과정에서 어떤 효과를 가져 올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회선진화법에 내재된 치명적인 문제점은 무엇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
Ⅱ. 국회선진화법의 치명적 한계
1. 소수의 독재를 정당화시킬 위험성이 크다
국회선진화법의 핵심은 파행적인 국회운영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다수당은 직권상정을, 소수당은 물리력 행사를 포기하는 대신 다수당에는 신속처리 제도를, 소수당에는 필리버스터(Filibuster,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허용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신속처리대상 안건 지정 의결 역시 의원 또는 위원의 5분의 3 이상의 찬성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수당의 협조 혹은 최소한 암묵적 동의나 방관이 없이는 법안 통과를 추진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국회는 1987년 민주화 이후 13대 국회부터 원내 교섭단체 대표 간 합의에 의한 국회운영으로 다수의 의견을 중시하면서도 다수당과 소수당 간의 합의를 중시하는 관행이 존재했다. 그런데 국회선진화법은 ‘초다수제 원칙(super-majoritarian rule)’이 적용됨으로써 이런 관행을 나쁜 방향으로 몰고 갔다. 다시 말해 핵심 쟁점에 대한 합의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2. 대의민주주의 정신과 부합되지 않는다
선거에 의해 원내 과반의 다수당이 된 정당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았다고 생각하는 입법을 수행하고자 할 때, 소수파가 법안 상정을 물리적으로 막는 경우 어떤 방식으로도 이를 극복하기 어렵게 될 수 있다. 조정관은 만일 이런 일이 발생되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다수파 우위의 결정 원인이 보조적 원리인 소수파 존중의 원칙에 의하여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고, 국회 운영은 더 심각한 파행으로 빠져 들어갈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즉 국민이 부여한 다수파의 정치적 의지가 소수파에 의하여 막무가내로 막히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
3. 국회의 반응성(responsiveness)과 책임성이 약화되어 불임국회가 우려된다
국회선진화법은 역설적으로 국회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빛을 발한다. 이 법으로 인해 여야 원내 지도부는 “합의할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시도하지 말자”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될 수 있다. 이것은 무책임한 정치의 전형이다. 이런 무책임은 옳은 시기(right time)에 옳은 법안(right legislation)을 만드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법을 만드는 국회가 법을 만들지 못하는 불임국회가 될 수 있다. 이럴 경우 국회의 반응성이 무너지면서 정치가 실패하고 국민 불신은 가중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 국회무용론이 대두될 지도 모른다.
4. 패스트 트랙(fast track)이 아닌 슬로우 트랙(slow track)이 고착화 된다
의제의 성격에 따라서 신속한 입법이 필수적인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신속한 입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국회선진화법에 따르면 상임위 회부 단계에서 ‘신속처리대상안건’으로 지정되면 ‘최대 360일 후에 자동적으로 본회의에 상정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패스트 트랙이 아니라 슬로우 트랙이며 궁극적으로 식물국회의 토대가 된다.
5. 입법 과정의 장기화로 인해 엄청난 사회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
국회선진화법으로 국회에서 몸싸움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잃은 것도 많다. 입법 과정의 장기화로 인해 엄청난 사회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윤상호는 “국회선진화법은 효율적 혹은 최적의 의사결정이 무엇이고 절차적 요건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 없이 통과되어 사회 비용을 급상승시키는 정치실패의 구체적인 사례이다”라고 지적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일자리 법안들과 경제살리기 법안들이 3년째 발이 묶여 있다. 관광진흥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많은' 법안을 길게는 3년이 다 되도록 상임위에서 제대로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며 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야당은 정부가 제시한 경제활성화 법안은 총 30개인데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은 9개이고, 이 중 야당이 스스로 반대한다고 밝힌 법안은 5개로 17%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문제는 단순한 법안 개수가 아니라 파급 효과가 큰 법안들이 선진화법으로 말미암아 야당에 의해 발목이 잡히고 있다는 것이다.
6. 누더기 법안이 양산되고 ‘법안 끼워 팔기’의 나쁜 관행이 만들어 진다
소수당의 협조 혹은 최소한 암묵적 동의나 방관이 없이는 법안 통과를 추진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수당은 소수당의 눈치를 살피면서 법안 내용에 대한 중간적 타협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또는 다른 사안들을 동원하여 소수당과 복잡한 거래나 조정을 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원래 법안의 취지는 퇴색되고 누더기로 전락할 수 있다. 한편, 국회 선진화법 아래에서 야당이 반대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여당은 자신이 요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야당이 요구하는 다른 법안을 연계해서라도 법안을 처리하게 된다. 가령, 새누리당이 공무원연금법 개정안 처리에 사활을 걸자 새정치연합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 국회의 정부 시행령 수정요구 권한을 강화하는 국회법 개정안까지 연계했다.
|
|
|
▲ 한국 국회는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장소로 전락했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미명 하에 야합과 포퓰리즘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민의의 정당이 되어야 할 국회가 국민의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
Ⅲ.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건설적 대안
국회선진화법의 시행으로 소수당의 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소수당의 권한이 크게 신장되었다. 다수 의원들은 국회선진화법만 있으면 국회가 보다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국회 파행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나타난 착각이고 환상이다. 가령, 국회의 파행적 운영은 의장의 직권상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회 내 정당 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입법교착 상태 때문에 발생한다. 국회가 진정 선진화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국회선진화법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과제들을 조속히 실천해야 한다.
1. 의원들의 자율성과 책임성 강화
파행적 국회운영의 근본 이유는 오랫동안의 비민주적인 정당운영에서 비롯된 집권당 및 반대당 소속 의원들의 자율성 부족이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 강한 정당기율로 인한 원내 정당의 응집성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다. 여야 정당은 쟁점 법안이 생길 때마다 ‘통과’ 혹은 ‘저지’를 당론으로 채택해 정면충돌한다. 다수당의 날치기나 소수당의 떼쓰기도, 또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폭력사태도 모두 이 연장선에서 발생한다. 지난 2002년 3월에 신설된 국회법 제114조의 2(자유 투표)는 “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소속정당의 의사에 기속되지 아니하고 양심에 따라 투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국회는 자유 투표를 법으로 규정해놓고도 실제 의정활동에서는 강제적 당론이라는 이름 아래 국회의원들 스스로 거수기 투표를 강요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결국 폭력사태는 국회가 법을 만들어놓고도 어긴 결과물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국회폭력이 생기는 것은 의원들이 당 지도부가 틀어쥐고 있는 공천권 때문에 자율성이 없기 때문이다. 공천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 또는 당 지도부에게 찍힐까봐 자유 투표보다 당론 투표를 하고 충성경쟁이라도 하듯 몸싸움도 불사하는 것이다.
정치권은 선거철만 되면 고장 난 녹음기 테이프 돌아가듯 정치 개혁을 외친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상향식 공천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2월 3일 비리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도입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국회의원특권 방지법’ 제정을 제안했다. 5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는 상시국회·상시국감·상시예결위 추진, 재·보궐선거 시에 원인제공 정당의 공천 금지, 부정부패로 의원직을 상실한 비례대표 의원직 승계 금지 등의 정치제도 개선안도 내놓았다.
정당이 혁신에 앞장서겠다고 하는 데 반대할 국민은 없다. 그러나 이런 개혁을 실천할 의지가 정말 있는지 의문이 든다. 대한민국 선거는 ‘정치 개혁 약속 파기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여야 정당은 선거 때만 되면 앞뒤 따져 보지 않고 표를 얻기 위해 정치 개혁 공약들을 급조해 쏟아낸다. 가령,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여야 모두 기초선거 공천 폐지, 국회의원 면책특권과 불체포 특권폐지, 의원 세비 30% 삭감, 여야 동시 국민참여 경선제 도입과 같은 쇄신안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자 대부분 흐지부지해졌다.
선거 때는 상향식 공천제도 도입을 외치다가 선거가 임박하면 시간이 없다고 유야무야로 끝난다. 중앙당 산하에 공천심사위원회를 꾸려놓고 며칠 만에 뚝딱 해치우는 공천 관행을 깨지 않는 한 공천권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권은 상향식 공천 개혁, 정당정치의 민주화, 분권화 및 원내정당화와, 정당의 구속력 약화를 통해 의원들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강화해야 국회 운영이 보다 생산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2. 대화와 타협을 어렵게 만드는 국회법 개정
폴스비(Polsby, 1968)는 의회가 제도화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분명한 경계의 설정(the establishment of boundaries)이다. 의원들이 계속성을 갖고 전문성을 획득하게 되고 전문성을 가질수록 의회지도자로 등장하게 되는 것을 평가해서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내적 복합성의 증대(the growth of internal complexity)이다. 보편적이고 명시적인 기준에 따라 조직의 각 기관이 운영되고 특정 목적에 따라 기관이 분리되어 전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또한 위원회의 자율성이나 의원에 대한 지원의 확대라는 지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보편적이고 자동적인 결정(the universalistic and automated decision making)이다. 의회가 임의적 판단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국회에서는 모든 의사일정이 원내 교섭단체간의 합의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어 있다. 개원을 포함한 모든 국회 의사일정은 여야 합의가 있어야 한다. 국회법에는 9월 1일 정기회를 개최하도록 되어있지만 민감한 정치 현안 문제로 여야 개원 협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국회는 장기 공전으로 갈 수 있다. 한국정치학회가 국회 스태프 및 의원 보좌진을 대상으로 2009년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3/4이상이 “대통령과 정당 지도부의 과도한 국회 지배” 및 “교섭단체(즉 정당) 중심의 국회운영”이 우리나라 국회의 낮은 생산성의 이유라고 응답했다. 법사위원회 위원장은 야당 몫으로 되어 있어 여당이 추구하는 쟁점법안은 법사위의 벽을 넘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회를 정상화시키고 선진화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여야 합의를 위해 도입했지만 오히려 여야 간 힘겨루기를 강화하고 타협을 어렵게 만드는 국회법들을 조속히 개정해야 한다. 가령, 국회 자동 개회, 원내 다수당에게 모든 상임위원장 배분, 국회의장의 권한 강화 등의 개혁이 필요하다. 특히, 의장이 여야 원내교섭 단체들의 의사일정 합의에 따라 의정을 이끄는 수동적이고 의전 지향적인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회의 수장으로서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도록 국회법을 개정해야 한다. 의장의 임기를 의원 임기와 동일한 4년으로 연장하고, 여야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법안에 대해서는 국회 파행을 막기 위해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무기명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의원 간 교차투표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입법 교착상태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생산적 불문율(informal rule) 형성
모든 사회와 조직에는 행동 규범이 있는데, 성문화된 법만이 아니라 불문율이 영향을 준다. 의회 불문율이란 의회 과정에서 의원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성문화되어 있지 않은 행동규범이다. 이와 같은 불문율은 의회 과정을 질서 있게 조직해 주는 중요한 요인이다. 특히, 의회 정치의 제도화는 의회기능이 활성화, 다변화, 효율화되는 과정인데 이를 위해서는 생산적인 불문율의 발달이 필수적이다.
성숙한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미국 정당과 의회에서는 초선의원의 수습기간에 대한 불문율(apprenticeship), 선임자 특권에 관한 불문율(seniority rule), 상호호혜에 관한 불문율(reciprocity rule), 의원 상호 예의에 관한 불문율(the rule of personal courtesy), 의원 긍지에 관한 불문율(institutional patriotism), 의정업무에 관한 불문율(the rule of legislative work) 등의 다양한 수평적 불문율을 갖고 있다. 특히, 미국 의원들은 대통령제하에서 의회의 본질적인 기능은 여야 구별 없이 행정부를 견제하여 궁극적으로 국정 운영의 안정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반면, 한국 의원들에게는 이러한 상호 호혜적․수평적 관계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고 국회와 정당은 지시․복종의 수직적인 불문율만을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상호 존중보다는 상호 비난의 불문율이 형성되어 있다. 한국 국회가 선진화되기 위해서는 성문화된 법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 상생과 상호 예의와 같은 생산적 불문율을 만들어 가야 한다. 특히,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해서 의원들의 자유 투표관행을 정착시켜야 한다.
국회의 기능과 위상, 그리고 정당정치에 대한 의원들 인식의 대전환이 없으면 결코 국회는 선진화될 수 없다. 프랑스 사상가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대한 것은 잘못한 것을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뮬러(Mueller) 교수는 의사 결정의 반복 가능성을 타파시키는 다수결의 이점 때문에 대다수 국가의 국회는 다수결을 집단 결정 규칙으로 채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초다수결주의에 입각한 국회선진화법은 이와 같은 민주주의 수정메카니즘의 작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 완전한 법은 없다.
그런데, 국회선진화법의 치명적인 문제는 한번 시행되면 고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국 선거에서 어느 정당도 단독이든 연대든 3/5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회선진화법은 반(反)민주적이다. 일부에서는 “국회선진화법은 여야가 충분한 논의와 법률적 검토를 거쳐 합의한 사항으로 위헌 논란이나 폐지 주장은 우스꽝스러운 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김세연 새누리당 의원은 국회선진화법을 지지하면서 개선책으로 “현행 330일인 ‘신속 처리 절차’ 소요 기간을 3분의 1 수준으로 대폭 단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는 쟁점 법안을 신속 처리 대상으로 지정하는 포지티브 방식이지만, 비쟁점 법안은 모두 신속 처리토록 하는 네거티브 방식을 도입하고, 법사위의 체계자구심사 권한을 국회 법제실로 당장 넘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개선책으로는 국회선진화법에 내재된 치명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국회선진화법이 국회의 효율을 크게 저해하고 심지어 국회 마비법으로 전락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헌법 소원을 통해 조속히 위헌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