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란 통념 뒤집고 기업가정신 부각 김용삼 신간 주목

   
▲ 조우석 문화평론가
상식이지만 일제시대 한국인이 만든 회사 중 으뜸은 인촌 김성수와 김연수 형제가 세운 경성방직이었다. 1930년대에 베이징에 사무실을 두고 만주 대륙을 호령했으니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이었다. 그래서 경방은 일제시대의 삼성전자다.

실제 당시 사람들은 “제조업은 경방, 유통업은 화신”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쓰곤 했다. 필자가 이런 정보에 나름 익숙해진 건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가 쓴 <제국의 후예>(2008년 푸른역사), 그와 쌍벽을 이루는 주익종 박사의 <대군의 척후(斥候)>(2008년 푸른역사) 덕분이다. 로마가 그랬듯이 한국경제 역시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명저술이다.

1960~70년대 한강의 기적 역시 나 홀로 우뚝 솟은 것만은 아니고, 20세기 초와의 연속성 속에서 출현했는데, 그걸 또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훌륭한 산업사 관련 책을 소개하게 돼 기쁘다. 김용삼의 신간 <한강의 기적과 기업가 정신>(프리이코노미스쿨 펴냄)이 문제작이다. 저자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뚝심이 어렵지 않게 읽혀진다.

아모레퍼시픽, 신도리코, 오뚜기식품, 에이스침대의 공통점은?

“얼마 전 여의도 전경련회관을 크게 올렸을 때 관계자들에게 산업사박물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가 강조했습니다. 그게 한강의 기적을 만든 나라의 임무 아닙니까? 반기업 심리도 그래야 줄어들겠고. 그런데 쉬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예요.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았거나 자료도 없으니 뭐 내 일이 아니라는 식인데, 그럼 저라도 책을 쓰자는 생각을 그때 굳혔죠. 책으로 구현한 한국근대산업사...”

그 결과물이 <한강의 기적과 기업가 정신>이다. 그는 <월간조선> 편집장 출신. 기자생활 때 황장엽 망명 특종 보도로 유명한데, 1950년대 정치경제사에 두루 밝다. 얼마 전 <이승만의 네이션빌딩>으로 성가를 올렸다.

이 책에 따르면 근대적 기업의 전신(前身)은 구한말 직후 등장했던 개성상인과 서울상인이다. 이들은 개항과 함께 조선에 진출했던 일본과 청국 상인에 대응해 국내 상권을 지켜낸 귀한 존재였다.

놀라운 건 상도(商道)의 상징인 개성상인의 후예에서 우리와 친숙한 기업이 많이 배출됐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아모레퍼시픽, 신도리코, 삼립식품, 오뚜기식품, 에이스침대, 한국야쿠르트…. 이들은 경영다각화 대신 전문분야 한 우물을 파는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중 눈에 띄는 아모레퍼시픽의 모태는 1945년 세워진 태평양화학공업사이지만, 1932년 개성에서 서성환 회장(2003년 작고)의 모친(윤독정 여사)가 동백기름을 만들어 판 것이 출발점이 맞다. 흥미롭지 않은가? 지금 아모레퍼식픽은 중국 여성들을 사로잡았다는데, 그게 우연만은 아니다. 청국 상인과 일본 상인들에 대항해 국내 상권을 지켰던 애국의 DNA는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다.

서울상인? 한강의 배를 이용해 국가 조세곡물과 양반들의 소작료를 운반해주며 부를 축척했던 그들 중 구한말과 일제시대 서울을 대표하는 3대 상인이 출현했다. 그 하나가 박승직이다. 배오개(종로 4~5가 일대)에서 포목상으로 출발해 객주를 거쳤던 그는 ‘박가분(朴家粉)’이란 제품으로 화장품업계를 석권했다.

박가분은 1916년에 상표등록을 했던 한국 최초의 화장품이다. 박씨네 집안에서 만든 동동구리무(영양크림)란 뜻의 박가분은 지금의 두산그룹을 일구는 모태가 됐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 귀속재산 불하를 받는 과정에서 소화기린맥주를 넘겨받았고, 그게 OB맥주의 탄생과 두산그룹으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건 부지기수인데, 경방이 1930년대 만주공장 여공을 위한 산업체병설학교를 세웠다는 점이다. 그게 1970년대 박정희가 세웠던 산업체병설학교의 원조쯤이 안될까? 경방은 공장 내 의료시설까지 갖춰 복지에도 앞장섰다.

   
 
경제민주화에 신음하는 한국경제를 위한 최선의 처방

더 놀라운 건 이런 게 1970년대 국내에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될 때 기업들이 앞장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김용완 경방 회장은 “우린 1930년대 벌써 의보를 실시해왔다. 기회에 확대하자”는 제안을 했고, 그게 의보 도입의 기폭제가 됐다. 이런 디테일한 정보도 흥미롭지만,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이란 드라마에서 진짜 주인공은 기업가들이라는 주장 대목이다. 즉 정부가 주도하는 계획에 재계 사람들은 조연으로 참여했다는 통념을 정면에서 뒤집는다.

“한국의 산업화는 정부와 기업가들의 연합 및 합작방식으로 진행됐다”(232쪽)는 언명은 그래서 흥미롭다. 구체적으로 외자도입형 공업화 전략은 삼성그룹 이병철이 제시했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보세가공무역은 천우사를 창립했던 수출왕 전택보의 아이디어였다. 뿐인가? 훗날 중화학공업 전략 역시 박정희만의 꿈은 아니라는 게 이 책의 지적이다.

전택보가 수출왕이라면, 1952년 강원탄광을 만든 정인욱은 석탄왕이었는데, 그의 태백산 종합개발이 중화학공업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이들 창업세대의 공통적 특징이 있다. 일제시대 버젓한 근대기업으로 경방과 화신 밖에 없고, 여전한 사농공상의 유교질서에 갇혀 살던 이 나라에서 강렬한 기업가정신을 보여줬다는 점을 우선 꼽아야 한다.

그거야말로 한국인의 위대한 정신혁명 실험이기도 했는데, 바탕에는 기업보다 국가를 우선한다는 사업보국의 기풍이 있다. 현대 정주영이 중공업 사업장에 붙여놓은 구호가 그걸 압축해 보여준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일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

그런 인식은 기업 이름에도 배어있다. 트럭 한 대로 출발해 한진을 일군 조중훈이 회사이름을 그렇게 정했던 건‘한민족의 전진’을 함축했기 때문이다. 김철호가 설립한 기아(起亞)는 ‘기계공업을 발전시켜 아시아에서 세계로 진출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마무리다. <한강의 기적과 기업가 정신>은 가슴 뛰는 책이다. 평이한 서술에 담긴 깊이 있는 내용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더욱이 강렬했던 창업세대의 사업보국을 강조하는 건 한국경제 회생을 위한 최선의 처방일 수 있다. 요즘 이 나라의 기업가정신은 경제민주화란 용어 아래 손발이 묶인 실정이 아니던가?

쉽게 말해 이토록 균형 잡힌 시각의 책이 독서시장에서 한 100만 권 정도는 팔리는 게 정상적인 사회이고, 그런 분위기가 형성돼야 병든 한국경제가 일어서는 동력을 얻을 것이라고 필자는 감히 장담한다. 이 유익한 책에 대한 추가 논의는 다음 기회에 다시 할 생각인데, 기회에 이 책의 에필로그를 독자들과 함께 음미해보았으면 한다.

“창업세대들은 일제식민지, 해방, 건국, 전쟁, 군사쿠데타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을 먹여 살리고 납세를 통해 국가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2~3세 혹은 4세들이 사령탑에 앉은 오늘날 기업들은 기회와 위기의 파고를 동시에 접하고 있다. 이들이 창업세대의 사업보국 정신을 되새겨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선봉이 되길 기대한다.” /조우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