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의 국면에서 공영방송 KBS가 '반대한민국'적인 성격의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올해 초 다큐멘터리 '뿌리 깊은 미래'에서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편향 논란은 최근 '이승만 대통령 일본 망명설'에서 더욱 심해졌다.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KBS라는 그릇을 통해 전달되면서 국민들의 혼란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KBS 수신료 논란도 탄력을 받고 있다. 준조세의 성격으로 징수되고 있는 수신료에 대한 성격과 징수방식에 대한 논란이다.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은 자유경제원에 기고한 칼럼에서 "수신료는 공영방송 서비스에 대한 ‘지불’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KBS가 성격에 맞는 합당한 서비스를 제공하면 그에 대한 대가로서 수신료가 지불돼야 한다는 의미다. 한 편집위원은 더 이상 KBS가 조잡한 이념에 경도된 방송을 제작해선 안 되며 "글로벌 세계의 인류가 공감하고 호응하는 방송을 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래는 한정석 편집위원의 칼럼 전문이다. [편집자주]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무엇이 공영방송이냐는 문제는 언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쾌하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크게는 공영방송의 재원이 공공적일 때 공영방송이라고 보는 입장과, 방송의 컨텐츠가 공익지향성을 가질 때 공영방송이라는 입장이 있다.

많은 나라들이 공영방송 또는 국영방송체제를 운영한다.그 이유는 방송이 보편적 서비스로서 모든 국민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과거 전파자원의 희소성으로 인해 방송의 공익적 사용에 방점이 찍힌 까닭이다.

하지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방송 캐리어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다매체, 다채널의 시대에 공영방송의 당위론은 그 소구력을 크게 잃었다. 다만 방송을 보편적 서비스로 본다는 입장에서 공영방송의 존재론은 유지되고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 흔히 '1공영 다민영’의 방송시장 질서가 옹호된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도 사실 그 정당성의 소구는 빈약하다. 무엇이 공영방송이기에 1공영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왜 2공영, 3공영은 아니라는 것인가.

우리는 KBS를 공영방송이라 칭하지만, EBS는 공영방송이라기보다는 교육방송이라는 타이틀로 부른다. 수신료의 일부는 EBS에도 사용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수신료의 정체에 대해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우리 법상 수신료는 TV수상기에 대한 특별 부담금으로 책정되어 있다. 즉 모든 국민과 법인은 TV수상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수신료를 내야한다.

이는 수신료가 TV수상기에 대한 '특별 소비세’나 '보유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영방송의 수신료가 TV수상기 보유세라는 입법취지는 한마디로 코미디와 같다. TV수상기로 TV보다 주로 VOD 영화나 게임을 즐기는 이들은 황당하기 때문이다. 이 법의 논리를 학교급식에 적용한다면 흥미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모든 학교급식은 유상급식을 의무로 하되, 의무 급식료의 정당성은 학생에게 '숟가락이 보유되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게 된다.

영국도 이러한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그 해법은 '인두세’에 속한다는 해석이었다. 하지만 최근 모바일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로 TV를 보는 이들에게 수신료를 걷을 수 없다는 유권해석이 나오면서 BBC의 수신료의 법리적 정당성도 흔들리게 됐다. 이러한 문제로 공영방송의 수신료는 공영방송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다시말해 시청자는 공영방송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영방송 시청을 포기하는 대신 수신료를 내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적 방법론으로 어려웠지만, 앞으로 지상파 디지털이 자리를 잡게되면 시청자 댁내 셋탑박스를 통해 KBS수신거부자는 설정을 할 수가 있다. 그러면 그 시청자에게는 수신료를 걷지 않는 옵션이 주어지게 된다.

사실 KBS는 유선방송과 위성방송 IT채널등을 통해 컨텐츠 사용료를 받아가고 있다.KBS드라마는 재방송으로 유선채널에서 유료로 서비스된다. 또 광고수입도 있다.

이렇듯 KBS는 자신의 재원조달의 루트를 방송시장에 의지하는 것이 정상이다. 왜 KBS는 자회사들을 상장시키지 않는가? 왜 KBS는 회사채를 발행해서 자기책임의 원리로 재정을 운영할 생각은 않고 국민부담에 의존하려 하는가. 한국방송공사법이 그렇다고 하면 한국방송공사법을 개정해서라도 KBS의 재원조달에 자기책임 비율을 높여야 한다.

더구나 지금처럼 한국전력공사에 위탁해 수신료를 걷고 체납하면 전기료를 끊는 행위는 KBS의 권리남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전력공사는 그러한 부당한 업무계약을 존속하면 안된다. 모든 공사는 자기경영책임의 원리로 운영되어야 하며, KBS 역시 공사로서 그러한 의무가 요구되는 것이다.

다시 의제의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공영방송은 그 컨텐츠에서 '보편적 서비스’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보편적 서비스란 시청자들의 시청에 기술적, 환경적, 법적 차별이 없는 상태와 함께 시청자 일반이 지지하는 도덕적, 정치적 입장과 충돌하지 않고 중립적 상태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

다만 사실에 근거해서 진실을 알리려는 저널리즘적 태도는 언론의 자유와 편성권의 독립차원에서 지지된다. 다시 말해 방송 제작자가 진실을 보도한 결과, 그것이 국민들의 도덕적, 정치적 가치와 충돌한다고 해서 그러한 공영방송이 비난받거나 제제를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KBS는 종종 이러한 원칙에서 일탈한다. 여기에는 KBS내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 이념노조와 KBS내 각종 직능협회의 특정 이념편향적인 정치적 활동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공영방송이라는 이름은 특정 정치적 이념을 표방하라는 것이 아님에도, 이념형 노조와 정파적 협회들의 KBS에 대한 사유화 현상은 심각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KBS에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는 요구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 KBS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9>는 지난 6월 24일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이라는 제목의 리포트를 보도해 편향논란을 자초했다. 이승만 정부가 6.25전쟁 당시 일본 정부에 6만 명의 망명 의사를 타진하여 일본이 한국인 피난캠프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사진=KBS 뉴스화면 캡쳐

최근 영국 BBC가 지난 총선에서 노동당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가 캐머린 정부로부터 1조원의 복지예산 삭감과 BBC의 인사, 예산 거버넌스를 자율에서 오프콤이라는, 우리의 방송위원회로 이관시키는 결정이 이뤄진 것은 한마디로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이 훼손되면 정치적 불이익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렇게 주장하면 혹자는 KBS가 보수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라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있다.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논자는 그러한 점도 단호히 배격한다. KBS는 정치적, 이념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이념적 중립이라는 것은 KBS가 사람이 만드는 방송을 송출하는 회사가 아니라, 기계가 방송하는 회사라는 전제를 하는 것과 같다. 정치적 중립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무엇이 정치적이고, 무엇이 비정치적이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을 비정치적이라고 정하는 그 자체가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공영방송은 그 자체로 고도의 정치적 존재가 된다. 고도의 정치적 존재가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점이 공영방송이 가진 정치적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보수주의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가 지적한 것처럼 '문제가 어떤 해결책보다 선명해 보이는 문제’를 노정한다. 이런 경우 우리에게는 '결단(resolution)’이 요구된다. 문제의 의제를 아예 기각해 버리는 방법이다. 즉 공영방송 체제를 포기하는 것이다. 갈등은 다름 아닌 '공영방송’이라는 존재로부터 발생하기에 공영방송의 존재를 해체하는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자유주의는 그러한 스트라우스의 '결단’을 지지한다. 모든 방송사업자는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철학적, 이념적 가치에 입각해 방송서비스를 하면 된다. 많은 방송사들이 저 마다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장하는 시스템은 오히려 그러한 경쟁들로 하여금 공영방송 시장의 양태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언론은 진실보도 경쟁을 하려는 '자유의 과학’(Liberal Science)이자 자유의 인문학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종편의 현실에서 보는 바처럼 '저수준 황색경쟁’을 목도한다.그것은 종편사들이 영세하기 때문이다. 방송시장규제가 방송시장의 확장성을 막고 있기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시장이 커져야 재화와 서비스의 퀄리티도 향상된다. 한국 방송시장은 투자와 영업에 상당한 규제를 받는다. 외국인 투자제한과 방송사 주주에도 제한이 엄격하다. 이러한 규제의 빗장을 풀어야 글로벌 한류 컨텐츠들도 등장한다. 그러한 양질의 방송들이 진정한 공영방송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는 아시아 시장을 목표로 하는 방송제작과 유통의 시스템도 능력도 인력도 없다.가을동화, 대장금, 겨울연가와 같은 드라마들이 중국과 일본을 강타해 판매자들이 엄청난 부를 벌어들였을 때 한국 방송사들이 얻은 소득은 미미한 것이었다. 방송이 산업으로 크지 못한 결과였다.

이제는 조잡한 이념에 경도된 방송을 제작할 때가 아니다. 글로벌 세계의 인류가 공감하고 호응하는 방송을 제작하고 그러한 것을 국내 시청자들이 함께 즐기는 것이 공영방송이 아니라면 무엇이 공영방송일까.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