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는 보수' 외치더니 "원본 내놔라"…생각없는 '안철수의 생각'
   
▲ 이원우 기자

안철수 의원이 정계진출 선언을 한지도 어언 3년 세월이 흘렀다. 2012년 7월 ‘안철수의 생각’이 출간된 게 신호탄이었다. 그해 가을 서울시장 출마를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하면서 안철수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은 극에 달했지만, 봄날은 영원하지 않았다.

안철수 의원의 새 정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하면서 끝나버리고 말았다(2014년 3월). 민주당과 결합을 해버림과 동시에 ‘기존에 없던 정치를 하겠다’던 그의 출사표에는 이미 아무런 울림도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국민들도 점점 안철수라는 이름을 평범한 정치인의 하나로 인식하게 됐다. 그렇게 한동안 세간에 오르내리지 않던 그의 이름이 국정원 사찰 논란으로 다시 회자되고 있다.

된서리 맞은 국정원은 오히려 ‘피해자’일 수도

‘국정원이 해킹프로그램을 이용해 불법 도·감청을 했느냐’가 관건인 이번 논란은 꽤 복잡한 층위로 구성돼 있다. 국정원에 대한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여론도 국정원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 보인다. 사안이 복잡할 경우 여론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안철수 의원은 전에 없이 공세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안 의원은 지난 21일 국정원이 구매한 해킹 프로그램 RCS(리모트컨트롤시스템)의 모든 로그파일을 포함한 7개 분야 30개 자료를 국정원과 SK텔레콤에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출력된 유인물이나 구두 보고가 아닌 ‘원본파일’ 제출을 강조했다. 여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이번 논란은 음지(陰地)의 국정원과 양지(陽地)의 국민이 충돌하는 구도로 읽힌다. 하지만 애초에 이 논란이 불거지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이번 사건은 ‘피해자’ 없이 의혹만으로 잔뜩 부풀려진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논란의 시발점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은 국정원 내부직원의 제보나 야당의 폭로로 시작된 게 아니다. ‘우연’에 의해 시작됐다고 보는 편이 온당한 사건이다.

   
▲ 안 의원은 지난 21일 국정원이 구매한 해킹 프로그램 RCS(리모트컨트롤시스템)의 모든 로그파일을 포함한 7개 분야 30개 자료를 국정원과 SK텔레콤에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사진=홍정수 기자

정체불명의 해커들이 이탈리아의 ‘해킹팀’이라는 회사를 해킹해 400기가바이트 분량의 자료를 습득했고, 이 자료를 폭로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업로드 했다. 해킹팀이라는 회사의 주요업무가 각국 정보기관을 상대로 해킹 프로그램을 판매한 것인 만큼 폭로된 자료에는 35개국 97개 국가기관 구매자가 포함돼 있었다. 바로 이 목록에 대한민국 국정원(위장명칭 5163부대)이 포함돼 있었던 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논란의 시작점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국정원이 불법 도감청을 해가며 국민들을 사찰했을 것이라는 건 현 단계에서 ‘대단히 강력한 추측’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측은 불법행위를 기정사실화해서 공세를 펴고 있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없다.

둘째, 이번 사건에는 명시적인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초에 ‘해킹 해프닝’으로 시작된 논란이기에 더욱 그렇다. 굳이 피해자를 명시한다면 오히려 국정원이다. 조용히 업무를 수행하다 느닷없이 된서리를 맞은 격이다.

해킹사의 판매 목록에 존재했던 그 어떤 나라의 정보기관도 우리와 같은 사달을 겪지는 않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논란은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국정원 흔들기’로 보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 동의해줄 수 있는 국민들은 몇이나 될까.

‘안보는 보수’라던 안철수, 정보기관 상대로 ‘전쟁’ 치르나

2012년 여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 ‘안철수의 생각’을 통해 안 의원은 ‘전쟁’과 ‘정치’를 구분한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전쟁은 적을 믿으면 안 되는 것이고, 정치는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상대방의 궁극적인 목적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적을 믿으면서 싸우는 것, 기본적인 믿음은 가지면서 대결하는 것이 정치라는 얘깁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안철수 의원은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인 국정원을 향해 아무런 믿음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불법 사찰을 사실로 간주하고서 안보와 직결된 자료들의 원본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의 생각’의 논법에 따르면 이는 국정원을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 모든 나라를 막론하고 정보기관의 활동에는 명시적으로 밝히기 힘든 부분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합의, 그리고 정보기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현직 국회의원이 해킹당한 자료를 기반으로 ‘유죄추정’을 한 뒤 안보와 직결되는 자료들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요구하는 건 분명히 도를 넘어선 행동이다. /연합뉴스TV 캡쳐

모든 나라를 막론하고 정보기관의 활동에는 명시적으로 밝히기 힘든 부분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합의, 그리고 정보기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정보기관 또한 그 믿음에 합당한 유능함을 보여줘야 함은 물론이다. 국정원의 경우 스스로의 과오와 무능으로 국민들의 점수를 잃은 부분이 적지 않다. 이번 논란이 지나치게 커진 부분에 대해서는 국정원 스스로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

허나 현직 국회의원이 해킹당한 자료를 기반으로 ‘유죄추정’을 한 뒤 안보와 직결되는 자료들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요구하는 건 분명히 도를 넘어선 행동이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정보기관을 상대로 불신 일변도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엔 분명 나라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없는 국민들도 있다. ‘안티-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존재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며 실제로 우린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다만 그것이 ‘새 정치의 아이콘’이었던 안철수에게 기대되는 모습은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다.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던 안 의원의 슬로건도 흐릿해진 그의 존재감과 함께 무색해져 버린 걸까.

사안에 대한 견해차는 있다 해도 안철수라는 남자의 순수함만큼은 돋보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국민들이 안철수에게서 보았던 새로움의 본질이었다. 하지만 지금, 좋은 정치를 하고 싶다던 안철수 의원의 진심도 ‘현실’과 ‘상황’이라는 이름의 트렌드와 함께 무색해져 버리고 있다. 특별했던 정치인이 평범한 정치인으로 변모해 가는 슬픈 포퓰리즘의 한 자락을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