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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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
방민준의 골프탐험(67)- 어떤 골퍼의 폴 뉴먼 흉내 내기
구력 20년의 60대 친구 골퍼가 털어놓은 얘기다.
지금은 가끔 70대도 치고 안정된 80대 초반을 유지하는 그는 구력이 10년 쯤 되었을 무렵 한 선배를 어떻게 하면 한번이라도 이길 수 있을까가 최대의 관심사였던 적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오랫동안 함께 라운드해온 이 선배와 붙어서 이겨본 기억이 없었다. 1년 정도 먼저 골프를 시작했지만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매번 패배의 쓴맛을 보니 어떻게 선배를 이길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하다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영화 ‘스팅’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는 무릎을 쳤다.
“그래 바로 이거야. 술에 취한 척, 게임을 포기한 것처럼 하고 붙어 보는 거야.”
이미 고인이 된 폴 뉴먼은 스팅에서 노름꾼 헨리 곤돌프로 분해 명연기를 펼쳤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유쾌한 도적이면서 노름의 명수인 쟈니 후커로 분해 두목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폴 뉴먼과 손잡고 상대편 두목인 포커 경마광 도일 로네간(로버트 쇼 분)과 포커게임을 벌인다.
평소 술을 즐기는 폴 뉴먼은 로네간과 운명의 포커게임을 하기 전에 술에 취한 척 하기 위해 상의에 위스키를 뿌리고 입안을 위스키로 가글한 뒤 술병을 든 채 포커 판에 나타난다. 상대는 진동하는 위스키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며 대결에 임하는데 술주정뱅이와의 대결이라 어딘가 주의가 산만하고 긴장이 풀린 듯하다. 폴 뉴먼은 게임을 하면서도 수시로 위스키 병을 입에 갖다 대고 마시는 시늉을 한다. 폴 뉴먼은 훌륭한 술주정뱅이 연기로 로버트 쇼의 주의를 흩으려 놓는 데 성공해 통쾌하게 포커게임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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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취한 폴 뉴먼의 흉내내기에 나섰던 지인의 경험담이 골프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했다. 그 지인은 “골프는 결코 쇼로 되는 게 아니더군. 골프는 항상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디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더군요”라고 말했다. /삽화=방민준 |
우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 장면의 폴 뉴먼 연기를 흉내 내기로 맘먹은 것이다.
라운드 당일 그는 옷가방에 위스키를 담은 작은 병을 넣고 골프장으로 향했다. 골프장에 도착한 그는 골프복으로 갈아입은 뒤 위스키 병을 들고 화장실 안에서 골프 상의 여기저기에 위스키를 뿌렸다. 독한 양주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입안에도 위스키를 털어 넣어 가글을 한 뒤 뱉어내고는 동반자들이 기다리는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밤새 술을 마시느라 지친 듯한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그를 일별한 그날의 동반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아침부터 안색이 별로네?”
“어디서 혼자 연습하다 온 것 아니야?”
“어이쿠, 이거 웬 위스키 냄새야? 아직 술이 덜 깬 것 같은데?”
“밤새 술을 마셨으니 그럴 수밖에.”
기대하던 동반자들의 반응에 속으로 쾌재를 울린 그는 일부러 술 냄새가 진동하도록 부산한 동작을 취했다.
옆에 있던 한 친구는 술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다하다 안 되니까 취타작전으로 나오는구먼.”
“오늘은 만인의 도시락이 되어드리리다. 술 취한 놈 주머니 홀랑 털어가시오.”
세 명의 동반자들은 그의 항복 선언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나 그 역시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칼날을 세워놓고 있었다.
“좀 비열하지만 오늘 한번 비수를 맞아보시길”
술에서 덜 깨어난 듯 휘청거리며 첫 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선 그는 손으로 이마를 한번 짚고는 “이거 오늘 제대로 라운드나 마칠 줄 모르겠네.”라며 한 마디 토해내고는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용케 첫 티샷은 제대로 날아갔다. 나머지 세 명도 무난한 티샷을 날렸다.
다른 두 명은 맞수로 견딜 만하기에 선배와의 대결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계속 술에서 헤어나지 못한 듯 몽롱하고도 휘청거리는 연기를 하며 전반을 잘 버텨냈다. 그러나 후반 들어서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스키 냄새도 어느 정도 날아간 것 같은데 이젠 자신이 진짜 술에 취한 듯했다.
술 취한 척 연기를 하며 플레이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연기에 전념돼 진짜 술 취한 사람의 전형적 징후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집중이 안 되고 몸의 중심도 무너져 정확한 스트로크가 되지 않았다. 겉으로는 연기 하면서 속으로 이러면 안 되지 다짐하며 독한 마음을 먹었지만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지 않았다. 찾아오는 기회를 번번이 놓치자 이제는 좋은 기회를 놓친 안타까움과 초조감이 온 몸을 굳게 했다. 18홀을 끝낼 때 그의 몸에는 풍기던 위스키 냄새가 거의 가셨지만 그는 그로기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친구는 다음 말로 실패한 폴 뉴먼 흉내 내기의 교훈을 전해주었다.
“골프는 결코 쇼로 되는 게 아니더군. 골프는 항상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디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더군요.”
그의 이 한마디는 오래오래 귓가에 맴돌았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