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기업가연구회에서는 롯데그룹의 창시자 신격호 회장의 성공요인 보고서를 발표했다.
신격호 회장을 연구한 중앙대 경제학부 김승욱 교수는 “그동안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비교적 관심이 적었던 기업가정신과 각 기업가들이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한 부분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며 “이 글을 통해 롯데그룹의 창시자 신격호 회장의 성공요인을 애국심과 기업가정신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제일교포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롯데그룹은 일본인의 것일까. 한국인의 것일까. 한일 간에 부정적인 민족감정이 있다 보니 롯데그룹은 양국에서 모두 환영받지 못할 수 있다.
김승욱 교수는 이에 대해 “롯데가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규모를 이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신격호 회장이 한국에 진출하고, 이렇게 한국경제가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오히려 위험을 감수하면서 한국에 투자를 확대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중앙대 김승욱 교수의 신격호 성공요인 보고서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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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기업가정신과 롯데그룹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한국 기적의 원동력은 불굴의 기업가 정신이며, 기업가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한 나라는 단연 한국이라고 했다. 일부에서는 한국의 경제성 장이 정부가 주도적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공산주의 계획경제를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정부가 경제성장을 주도한 나라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그런데 한국은 경제개발계획도 실시했고, 경제 목표도 제시했고, 금융도 정부가 주도했다. 이렇게 정부가 주도한 부분이 매우 큰 것이 사실인데, 어떻게 성공을 했는가? 그것은 정부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시장의 방법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시장의 방법이란 경쟁의 원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란 결국 경쟁을 시켜서 승자에게 과실을 보장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기업들을 해외 기업과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는 수출전선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독점을 못하게 하고, 과점 체제 하에서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도록 했다. 수출 목표달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기업의 성과를 측정해서 이에 따라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낮은 이자율의 수출금융의 혜택을 주었다. 이를 얻기 위해서 기업들은 치열한 경쟁을 했으며 오늘의 한국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성장은 정부가 주도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쟁의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관민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업가 정신이 충일한 기업들이 다수 존재해서 한국의 기적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관심이 비교적 적었던 기업가정신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각 기업가들이 기여한 부분을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롯데그룹의 창시자 신격호 회장의 성공요인을 애국심과 기업가정신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롯데그룹의 특징
롯데하면 무엇이 생각날까? 아이들은 기네스북에도 오른 세계 최대의 실내 놀이 공간 롯데월드를 떠올릴 것이다. 최근의 서울 사람들은 뉴스에서 자주 등장한 잠실 롯데월드타워가 떠오른다. 야구팬들은 롯데 자이언츠를 기억할 것이고, 영화를 자주 보는 이들은 롯데 시네마, 주부들은 롯데 마트와 롯데백화점, 관광객들은 롯데호텔과 롯데면세점을 떠올릴 것이다. 전후 베이비붐세대는 롯데껌과 종합선물세트가 떠오른다. 기업인들 사이에는 재무구조가 건실한 회사, 그리고 좀 인색한 회사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롯데그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제일교포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롯데그룹이 일본인의 것인가, 한국인의 것인가? 한일간에 부정적인 민족감정이 있다 보니 롯데그룹은 양국에서 모두 환영받지 못할 수 있다. 일본의 경쟁자들은 롯데가 한국 기업이고, 조선인이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으로 다 빼돌린다고 비난한다. 반기업정서와 반재벌 정서가 심한 한국에서는 반일정서까지 가세해서, 롯데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신격호(시게미쓰 다케오しげみつ たけお 重光武雄) 총괄회장은 한국 주민등록번호도 없다. 일제 치하에서 19세가 되던 1941년에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주민 등록번호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부인도 일본사람이고, 아들들도 한국말을 잘 못한다. 일본롯데를 맡은 장남 신동주(시게미츠 히로유키)부회장은 일본에서만 자라서 한국어를 못한다. 한국롯데 회장을 맡고 있는 차남 신동빈(시게미츠 아키오)회장은,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한국어가 매우 서툴렀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롯데그룹을 일본인이 지배하는 재벌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한국은 외국인투자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국내에 들어온 다국적기업은 착취의 첨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때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신식민지론에 의하면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들을 다국적 기업과 무역을 통해서 착취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화는 새로 운 식민지 경영방식이라고 한다. 이런 잘못된 인식이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재일교포가 세운 재벌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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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9월 27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제22회 관광진흥촉진대회에 참석, 롯데호텔의 신격호 회장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성품 때문인가?
일반적으로 자수성가해서 대기업을 이룩한 기업인들의 성공요인을 언급할 때 부지런함, 성실함, 신뢰 성, 끈기, 도전정신, 열정 등의 성품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러한 성품 덕분에 역경을 극복하고, 위험을 잘 관리해서 성공을 이룩했다고 한다. 신격호 회장의 성공요인에 대해서도 그런 설명이 많다.
롯데그룹 홈페이지에도 신격호 회장의 성공원인을 “남다른 부지런함으로 청년 신격호는 '조선인' 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성실과 신용으로 극복하고...숱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뛰어난 안목, 신용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도전하여 오늘날의 롯데 신화를 창조해 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라는 덕목은 정주영 등 고학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품이다.
청년 신격호가 사업의 기초를 쌓게 된 동기도 바로 이러한 부지런함과 성실함에서 시작된다. 신격호는 문학도의 꿈을 키워,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작가가 되지 못하면 신문기자라도 되려고 했다. 그러나 문학을 전공해서는 먹고 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와세다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 이학부) 화학과에 진학해서, 1946년 졸업했다. 단돈 83엔으로 유학의 길에 오른 청년 신격호는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고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새벽의 같은 시각에 우유를 놓아주었다.
전당포를 운영하던 하나미스(花光)라는 노인의 밑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평소에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보 던 하나미스는 화학을 전공한 신격호에게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사업을 해보라고 6만 엔의 거금을 투자했다. 당시 직장인 평균 월급이 80~100엔이었으니, 이 금액은 20년치의 연봉에 해당된다. 2014년 기준 우리나라 직장인 평균연봉이 3천만 원이므로 이는 약 6억 원 상당의 거금이었다. 이렇게 그의 행운은 성실함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그의 성격이 매우 꼼꼼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롯데그룹의 성공 비결을 그의 성실함과 꼼꼼한 성격에서 찾는다. 1983년 10월, 월간 ‘직장인’과 인터뷰에서 기자가 껌 한 통의 소비자 가격을 알고 있는 회장에 대해 놀라자 “큰일을 하려면 작은 일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껌은 23개 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 1만5천 종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그 1만5천 가지 제품의 특성과 생산자, 그리고 소비자 가격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완벽주의와 품질로 나타난다. 코카콜라는 콜라 한 품종으로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면, 롯데는 껌으로 재벌을 일구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공과를 졸업한 신격호 회장이 처음에 시작한 사업인 비누를 만들고 있던 어느 날, 한 친구가 공장에 놀러와 미군에게 얻은 추잉껌을 주었다. 어릴 때부터 단맛을 모르고 자랐던 신격호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껌을 만들어 팔기로 했다.
당시에는 원료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의 바람막이 유리를 녹여 얻은 초산비닐수지와 송진 등을 섞어 녹여서 약간의 향료를 넣고 섞은 다음에 나무판에 흘려서 칼로 자르면 간단하게 껌을 만들 수 있었다. 적은 자본으로 만들 수 있고, 초산비닐수지는 통제품이 아니어서 원료를 구하기도 쉬웠다. 그런데 완벽주의자였던 신격호는 화공과를 졸업해서 스스로 껌을 제조할 수 있었지만, 약제사까지 고용을 해서 껌을 만들었다. 나중에 1개에 2엔에 팔리는 풍선껌이 인기를 모았다.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자 과자점 주인들이 줄을 서서 살 정도였다. 일손이 부족해서 잠잘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인근 주부들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하고, 그들에게 명주 옷감까지 선물을 하자 정성스럽게 포장을 했다. 고학생들에게는 상여금이란 명목으로 학비까지 주자 손쉽게 양질의 노동력이 확보했다. 없어서 못 팔던 시대에 그리고 군부대에 납품하는 껌이었고, 포장에 관심도 없었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신격호는 완벽주의 성격 때문 인지, 포장지인 껌종이에 정성을 들였다.
껌의 포장 하나에도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였기 때문에 품질면에서 인정을 받았다. 게다가 유해 식품 첨가물을 단속하기 위한 식품위생법이 제정되면서 더욱 신격호의 껌은 더욱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그러한 완벽주의 때문에 정부 규제가 강화되어 많은 기업이 철퇴를 맞을 때 오히려 신격호는 판로를 넓힐 수 있었다.
초콜릿사업에 뛰어들 때도 최고의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후에 호텔롯데를 짓기 위해서 그는 전 세계의 유명호텔을 다 답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카펫의 색깔까지도 손수 지정했다. 이렇게 용의주도하고 섬세하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안목도 일류라고 할 정도로 뛰어나다.
품질을 중시여기는 것은 그가 46세의 나이인 1967년에 처음 한국에 진출해서 롯데제과(주)를 설립할 때 낸 신문광고의 기업이념에도 잘 나타난다. 그는 당시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기업이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소생은 오랫동안 일본에서 롯데의 상표로서 제과·부동산 및 상사회사를 경영해왔습니다. 새롭게 한국 롯데의 사장직을 맡게 되었사오나 조국을 장시간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툰 점도 허다할 줄 생각하지만, 소생은 성심성의, 가진 역량을 경주하겠습니다. 소생의 기업이념은 품질본위·박리다매·노사협조로써 기업을 통하여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품질본위를 가장 앞에 두었다.
오늘날에도 신격호 회장은 품질제일주의를 엄격히 고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제품 하나 하나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정열을 기울이는 그의 기업관 때문이다. 신격호는 “기업은 예술이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기업경영의 완벽성을 추구한다. 하나의 제품이 제대로 평가 받아 압도적으로 시장을 지배할 만큼 성장하지 않으면 결코 다른 것을 넘보지 않는 완벽경영의 기업가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롯데의 사훈이 된 ‘정직, 봉사, 정렬’이라는 사훈이 이곳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신격호 회장의 좌우명은 '겉치레를 삼가고 실질을 추구한다'는 뜻의 '거화취실(去華就實)'이다. 매달 비행기를 탈 때도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의 성품대로 롯데그룹은 인색한 기업으로 소문이 났지만, 그 덕분에 부채비율이 가장 낮고, 가장 재무구조가 좋은 기업이다.
아이디어 때문인가?
성공요인을 설명할 때 두 번째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아이디어인데, 신격호 회장의 성공요인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에 관한 것이다. 먼저 롯데의 성공에는 회사명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주식회사 설립을 앞두고 신격호는 회사의 이름을 롯데라고 지었다. 소비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름을 갖고 싶어 했는데, 괴테가 25세에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등장하는 베르테르가 사랑했던 여인 샤롯데를 생각하면서 롯데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미모와 재덕을 갖춘 롯데라면 모든 소비자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다. 신 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을 떠올랐을 때 충격과 희열을 느껴다.”고 하면서,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의 수확이자 걸작의 아이디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라며 흡족해했다. 이렇게 회사의 이름을 롯데라고 지은 것은 그가 문학도를 꿈꾸었던 젊은 시절 의 꿈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기업이든 초기에는 창업자의 아이디어가 큰 역할을 한다. 이렇게 마침내 롯데라는 이름이 만들어 지고, 1948년 6월 28일, 오늘날 롯데그룹의 모체가 되는 ‘주식회사 롯데’가 창립되었다. 이때 인기를 끌었던 제품은 대나무 파이프 달린 풍선껌이다. 껌을 다 씹은 후에 대나무 파이프에 껌을 붙여서 불면 비 누방울처럼 부풀려졌다. 이 아이디어는 장남감이 귀했던 시절에 대히트를 쳤다.
이것보다 더 그의 아이디어가 빛을 발한 곳은 광고 분야이다. 하리스와의 껌 전쟁에서 그의 아이디어가 더욱 큰 역할을 했다. 창업 5년 만에 풍선껌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나서, 롯데는 판껌 시장에 진출했다. 신격호는 세계 1위의 껌 메이커인 리글리(Wrigley Chewing gum)를 따라잡을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일본 판껌의 시장점유율 1위는 하리스였다. 이로부터 롯데와 하리스는 치열한 전쟁에 돌입했다.
컬러TV 방송이 시작된 1957년 5월에 가요프로그램의 광고를 모두 사서 그 프로그램의 이름을 롯데가요앨범이라고 했다. 모든 매체를 총동원하여 “롯데 껌은 입 속의 연인”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그리고 자위대에 납품도 했다. 그러자 하리스는 “한국인에게 추잉껌 업계를 넘겨준다.” “돈 벌어 모두 한국에 보낸 답니다.” 이런 악성 소문을 퍼트릴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했다. 이때 롯데는 ‘1000만 엔 현상’을 걸었다. 롯데 껌 포장지 안에 추첨권이 있는데, 당첨자에게 1000만 엔을 주고, 부상으로 당첨자가 지정하는 학교에 100만 엔을 추가로 기부한다는 경품을 걸었다.
사회적 반응은 대단했다. 1960년도 당시 일본 경제기 획청이 발표한 월 평균수입은 2만5천 엔에 불과했으므로, 이 경품금액은 33년 연봉에 해당된다. 이는 오늘날 10억 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일본의 온 메스콤은 그 1천만 엔이 누구에게 갈 것인가 하는 것이 관심거리였다. 하리스의 고발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도 받았으나 법적으로 처벌할 근거가 없어서 경고로 끝났다. 결국 상금걸기는 1962년부터 금지되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개입은 더욱 매스컴을 자극했다.
이로 인해 그 광고효과는 10억 엔을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즉 100배의 이익을 본 것이다. 이후에 롯데는 천연치클의 좋은 껌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결국 하리스는 얼마 후 가네보에 합병되고 말았다. 이로써 롯데는 껌 업계의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껌 업계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된 롯데는 이제 초콜릿과 캔디 등의 시장으로 진출하여 마침내 제 1의 종합과자 메이커로 도약하게 된다. 이때도 역시 품질과 아이디어가 롯데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1961년에 ‘과자의 중공업’ 초콜릿 시장에 진출했다. ‘서구를 본받아 서구를 따라잡자.’라는 구호 아래 소비문화가 확산되던 시대에 초콜릿 생산의 적기였다. 껌만으로 사업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초콜릿 시장으로 진출했다.
당시 초콜릿 업계의 최고는 메이지와 모리나가였다. 초콜릿은 ‘맛의 예술품’이었다. 이를 이기기 위해서는 과감한 기술투자가 관건이었다. 유럽으로 비밀리에 기술자를 보내어 최고의 시설과 기술자를 도입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초콜릿의 본류인 판(mould) 초콜릿으로 승부를 걸었다. 다른 후발주자들은 피복초콜릿이나 충전초콜릿 시장을 들어갔지만, 일류주의를 주장하는 신격호는 당당하게 판초콜릿으로 승부를 걸었다. 수십 명의 기술자를 면담하여 스위스인 무슈 브락크를 선발했다. 그에게 원가에 구애받지 말고 스위스보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하여 롯데가나초콜릿이 탄생했다.
이후 롯데는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시장에 진출하여 1960년대 말에 일본 과자업계의 명문이었던 메이지와 모리나가를 추월하여 일본 제1의 종합과자 메이커가 되었다. 이후에 롯데는 1959년에 롯데상사, 1961년에 롯데부동산, 1967년에 롯데아도, 1968년에 롯데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상업 과 유통업으로 진출하여 일본의 10대 재벌이 됐다.
애국심과 기업가정신
분명히 기업가의 성품과 아이디어는 기업가정신의 중요한 내용이다. 롯데의 경우 초기의 성공은 이러한 요인들도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롯데의 성공비결은 이러한 요인들 외에 다른 요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해외 교포가 국내에 투자를 했다는 측면이다. 롯데가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으면 오늘날의 규모를 이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은 ‘한국 롯데’가 ‘일본 롯데’보다 규모가 더 크다. 한국 롯데의 계열사는 2014년 4월 현재 75개사인데 비해서 일본롯데의 계열사는 17개로 한국 롯데가 계열사의 숫자로는 4배가 많다. 매출액 기준으로 보면 격차가 더 크다. 일본롯데그룹의 매출은 약 4조 원인 반면에 한국롯데는 약 55조 원으로 공시되 어 있어 한국롯데가 일본롯데에 비해서 14배 정도 된다. 그러나 실제 한국롯데의 매출은 83조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하면 20배가 넘는 셈이다.
롯데그룹의 지배구조에 대해서 소문만 무성할 뿐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2013년 11월에 금감원의 요청에 따라 롯데그룹의 지주회사인 롯데홀딩스의 자산규모가 드러남으로 비교적 정확한 실체가 드러났다. 롯데홀딩스는 한국 및 한국 관활 해외법인을 제외하고, 일본 내 38개의 계열사와 해외 16개의 계열사 총 54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자산규모는 개별기준 자산이 3조 3325억 원, 부채 7525억 원, 자본 2조6875억 원에 부채비율 27%였다. 연결기준 부채는 38조 4850억 원이다.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롯데에 비해서 한국롯데가 매출규모, 계열사 수, 고용인력 등 모든 면에서 월등히 규모가 크다. 뿐만 아니라 롯데그룹의 식품, 유통, 관광·서비스, 석유화학·건설·제조, 금융 등 5개 분야 사업 중에, 한국롯데의 경우 식품에서 유통, 관광, 엔터테인먼트 등으로 사업을 확장한 반 면에 일본롯데는 식품에만 집중했다. 롯데그룹은 2014년 4월 현재 자산총액기준으로 삼성, 현대차, SK, LG에 이어 국내 재계 5위를 기록하고 있다. 종업원 기준으로 비교해보면 한국 롯데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국내에 17만 명, 해외에서 6만 명이 근무한다. 반면에 일본 롯데의 종업원은 2013년 기준으로 약 4500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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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
기업브랜드 가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 17위다. 주력사업 분야는 식품, 백화점, 호텔 등 의식주 관련 사업과 호남석유화학 등이다. 석유화학, 식품, 관광 등의 분야에서 중국, 베트남, 러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등에 진출하여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국 롯데그룹은 ‘2018년 아시아 TOP 10 글로 벌 그룹’이라는 비전을 수립해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신격호 회장은 일본에서 돈을 벌어서 모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투자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모국 투자를 통해 얻게 된 수익을 해외로 과실송금을 하지 않고 재투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1979년과 1980년에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인해서 한국경제가 최악의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도 신격호 회장은 한국에 대한 투자를 계속했다. 특히 1997년 말, 일본자본이 한국을 다 떠나게 되고, 결국 달러 부족으로 인해서 외환위기를 맞이하여, IMF 관리를 받게 되자, 신격호 회장은 재계인사로서는 처음으로 2천만 달러의 개인재산을 출자하고, 5억 달러의 외자를 도입했다.이런 면에서 애국자 신격호라는 호칭이 붙었다.
신격호 회장이 한국에 진출하고, 이렇게 한국경제가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오히려 위험을 감수하면서 한국에 투자를 확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업인으로써 한국에서 발전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애국심 때문일까? 해외에서 성공한 한국인들은 많지만 한국에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한 사람 은 별로 없다. 한국의 발전 가능성을 예상하고 투자를 했다면 이것은 기업가정신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애국심이나 의무감에서 투자를 했다고 하면 그것도 기업가정신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한국의 창업 1세대들의 기업보국 이념
바람직한 기업가 정신이란 기업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현철 교수는 한국 기업가의 특징을 일본과 비교한 『한국의 황제 경영vs 일본의 주군 경영』에서 일본 경영자는 ‘존재하지만 군림하지는 않는 반면에, 한국은 오너가 전권을 가지고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꼽았다. 사실 일본과 한국의 기업 구조는 차이가 없다.
일본의 그룹 경영 시스템이 한국의 재벌과 비슷한데, 오히려 일본 게이레츠들의 계열사 수는 우리보다 더 많다. 일본의 웬만한 대기업들은 100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비해서, 한국의 대기업들은 많아야 60~70개에 불과하다. 계열사 간 출자도 일본이 더 심하다. 일본에서는 순환출자는 물론 한국 기업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상호출자도 일본에선 예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일본은 한국과 비슷한 기업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오너가 전권을 가지고 경영권을 행사하는 독특한 기업 문화가 형성되었다. 한국의 기업가들은 소유권과 경영권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경쟁의식도 강하고 카리 스마도 강하다.
그런데 한국 기업가들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애국심과 공인의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즉 사업을 통해서 국가에 보답한다는 사업보국 정신이 강하다. 한국의 기업가들에게 이러한 특징이 발생하게 된 이유는 식민지 경험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자 최초의 제약회사인 동화약 방의 사시는 ‘우리 민족의 건강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것이며 회사 이름 ‘동화(同和)’는 ‘민족이 합심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기업가들은 독립운동에 지원을 했지만, 그것이 어렵게 되자, 기업을 일으켜서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겠다는 사업보국의 신념을 가지고 기업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를 설립한 오치은, 경성방직의 김연수,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강원산업의 박흥식 등이 그러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호암전집』에 의하면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 가 어떻게 되느냐, 또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느냐 하는 것 등이다.”라고 했다.
경제학에서 기업의 목표는 이윤극대화라고 하지만, 사실 한국의 기업가들은 그것보다는 이윤보다 사업 확장을 추구해서 대기업을 이루었다. 그리고 국가가 필요한 사업이 어떤 것인지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공인의식이다. 현대 정주영 회장의 호를 딴 아산정책연구원 입구에는 이런 현판이 걸려있다. “우리 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정주영 회장의 말이 새겨져있다.
이렇게 한국의 초기 기업가들은 공인의식이 강했으며, 기업보국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의 민족자본가들은 친일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재일교포 신격호 회장이 한국에 투자를 한 이유도 사업보국의 동기도 역시 올바른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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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가운데)이 2011년 5월 1일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고향 마을잔치 행사장에 참석,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신격호의 보은 의식
한 번의 행운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운이 오지만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잡지 못한다. 청년 신격호가 하나미스옹의 도움으로 처음에 세운 공장은 채 가동도 해보기 전에 미군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하나미스옹의 도움으로 다시 하치오지 부근에 공장을 세웠으나 1년 반쯤 후에 미 군의 공습으로 다시 완전히 불타버렸다. 하나미스옹은 운명이라며 시골로 돌아가겠다고 하며 신격호에게 살 길을 찾으라고 했다. 그러고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자, 그의 친구들은 신격호에게 귀국을 권유했으나, 신격호는 일본에 남기로 결정하고, 친구들은 귀국선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만약에 신격호가 친구들처럼 행동했으면 그의 행운은 여기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격호는 하나미스옹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결심을 한다. 왜 신격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아서 기업을 시작했을까?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돌아갈 고향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 이고, 둘째는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만약 신격호가 귀국해서 살아갈 희망이 있었다면, 일본에 남았을 가능성이 적다. 신격호의 한국 집안 사정은 어떠했을까? 신격호는 일제 치하인 1921년 경에 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흥부전의 장남처럼 지독하게 가난한 아버지 신진수의 5남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신진수는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데다가 돈에 대한 욕심도 없어서 매우 가난했다.
반면에 그의 형인 신진걸은 고학으로 신학문을 배워서 면장까지 지냈고, 퇴직 후 부동산 매매를 통해서 고향인 둔기마을에서 제일 큰 부자였고, 자식이라고는 아들(신병호-후에 롯데칠성고문) 하나 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는 흥부놀부 이야기와 비슷하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동생 흥부는 가난한데 아들이 9명이나 되었고, 반면에 놀부는 부자인데 자식이라고는 딸 하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차이점은 이 형 신진걸은 놀부와 달리 동생을 끔찍하게 위해 주었다. “제수씨, 애들은 얼마든지 낳으시오. 공부는 내가 시키겠소.”라고 하면서 조카들을 친아들처럼 돌봐 주었다. 신격호가 농업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도 큰아버지 덕분이었다. 실제로 울산농업보습학교 학적부에 보증인은 아버지가 아니라, 큰 아버지 신진걸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일하게 의지가 되었던 큰아버지 신진걸이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당시 고향 둔기마을에서는 극심한 가뭄과 이듬해의 홍수로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을 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몇 년 사이에 돌림병으로 신격호의 조모와 조 모, 큰어머니, 사촌형수가 모두 돌아가셨다. 큰집의 어른 5명이 줄초상나자 더 이상 고향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배움의 열망을 안고 신격호는 20살의 나이가 되는 1942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듬해에 관부 연락선을 타고 단돈 83엔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렇게 가장 믿었던 큰아버지와 집안의 어른들이 다 죽었고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에 일본에 남아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일본에 남게 된 동기는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원래 문학도의 길을 가려했던 그가 기업인의 길을 들어서게 된 것은 기업인이 꿈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미스옹 때문이었고, 그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일본에 남기로 결심했다. 1946년 5월에 도쿄 스기나미구(區)의 낡은 창고에 ‘히카리(光)특수화학 연구소’라는 간판을 달았다. 바로 이곳이 오늘날 롯데 그룹의 모체가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커팅오일을 응용해 만든 비누와 포마드 크림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후에 생필품 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대이므로, 비누와 크림은 불티나게 팔렸다. 마침내 1년 반 만이라는 짧은 기간에 신격호는 하나미스옹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고 그뿐만 아니라 집도 한 채 사 주었다. 오늘날 신격호 회장의 기업가정신에는 “빚과 은혜는 갚고야 마는 정직함과 성실함”이 깔려있다. 신회장은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나의 철학이고, 실패했더라도 빚을 돌려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투자하고 있다.”
신격호의 보은의식은 또한 그의 고향사랑에도 나타난다. 1969년에 울산공단에 공업용수를 대기 위해 댐이 건설되어 그의 고향 둔기리 일부가 수몰됐다. 고향사람들이 각지로 흩어진 것을 안타까워해서 신격호는 1971년에 ‘둔기회’를 만들어 매년 5월 첫째 주말에 마을잔치를 열고 있으며 현재 1700여 세대로 늘어났다. 꼭 이 모임에 참석하여 참석자들에게 4~5만원 상당의 선물을 준다. 그 이후에 2014년까지 44년을 한결같이 둔기회 모임을 후원하고 있다. 정주영 회장은 소를 끌고 북한으로 가서 고향사랑을 보여 주었다. 정주영 회장은 온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소문을 내면서 두 번 큰 행사로 자선사업을 했지만, 신격호 회장은 소문나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고향을 위하는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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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과 신동빈 회장의 집무실을 비롯한 그룹 '컨트롤 타워' 조직이 모두 내년말께 완공되는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 자리잡는다. 신격호, 신동빈 회장의 집무실은 106~114층의 개인 사무실 구역 가운데 최고층인 114층에 들어설 가능성이 가장 큰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3월 24일 열린 롯데월드타워 100층 돌파 기념식에 참석한 신동빈 회장. /사진=연합뉴스 |
롯데의 한국 진출
신격회 회장이 한국에 투자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동기도 이러한 보은의식이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보국이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격호 회장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투자한 것은 1973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관광진흥정책 때문이다. 해외자본 유치를 위해 박정희 정부는 신격호회장에게 반도호텔, 아서원, 국립도서관 땅을 매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이 땅들은 국내에는 살 수 있는 기업이 없어서 계속 유찰되고 있었다. 롯데는 이를 사들여 1979년에 호텔롯데를 오픈했고, 1980년에는 롯데쇼핑을 설립해서 롯데그룹은 유통서비스 산업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신격호가 한국에 투자한 것이 이때가 최초는 아니다. 해방 직후에 빚을 갚기 위해서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서 사업에 전념하다가, 고향의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한 1947년에 금덩어리 두 개를 보냈다. 그리고 6.25 전쟁 직후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한 후에 바로 밑의 동생 신철호를 일본으로 불러서 사업을 가 르쳤다. 그리고 신철호는 1959년에 귀국해 자본금 50만원으로 용산에 ‘주식회사 롯데’를 세워 껌을 생산했다. 그 밑에 동생 신춘호도 참여했다. 아직 본격적인 투자가 아니어서 신격호는 한국 롯데의 경영을 전적으로 동생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신격호는 한일정상회담 이후 약 5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투자했다. 그러나 사업에서 번 돈 중에 일본으로 과실송금은 단 한 푼도 하지 않고, 모두 한국에 재투자했다. 신격호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신뢰감에서 한국에 대한 투자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외화가 아쉬웠던 박정희 정부로서는 재일동포의 투자를 크게 환영했다. 그래서 한일경제협력과 관련해서 신격호는 큰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1979년 부마사태, 10.26 박정희 피살사태, 그리고 이어진 대규모 학생 시위 등으로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때도 신격호는 한국에 투자를 늘려갔다. 1978년에 양산에 비스킷 공장을 준공하고, 1979년에 아이스크림 공산을 완성했고, 호텔롯데를 준공하고, 1980년에 롯데쇼핑(백화점)을 개장했다. 그리고 1980년에 롯데냉동(주)을 설립하고, 한국후지필름(주)을 인수하고, 1982년에 (주)롯데자이언츠와 광고대행업체인 (주)대흥기획과 롯데물산을 출범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3년에 24개 계열사에 2만 명의 종업원을 둔 한국의 10대 재벌그룹에 진입했다. 그리고 그해 수익성 순위에서는 재계 4위를 기록했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에 엔화의 가치가 2배로 올라서 1988년에 신격호는 개인 재산 60~80억 달러로 『포브스』 선정 세계 4위의 부자에 올랐다. 당시 신격호는 “600만평의 사나이”라고 불렸다. 그 이유는 세계에서 가장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일본 동경 일대와 명동, 부산 등 요지에만 600만평의 땅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껌과 과자를 팔 아서 번 돈으로 남들은 부동산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던 시절에 도쿄 변두리의 땅, 황무지, 저습지를 꾸 준히 매입했다. 1960년대에 일본이 고도성장하면서 동경이 변두리로 뻗어나가 그의 땅이 신시가지가 되었다. 한국롯데도 서울의 3대 요지인 소공동, 잠실, 영등포에 호텔, 테마파크, 백화점을 지었고, 부산에도 제1의 상권인 서면에 롯데월드를 지었다. 제주도에도 중문단지에 롯데호텔을 지었다. 핵심요지에 시 설들이 들어섰기 때문에 부동산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
그의 부는 금융특혜로 빌린 돈으로 부동산에 투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업을 할 목적으로 토지를 구매했다. 소공동, 잠실, 부산 서면 등은 경매를 해도 살 사람이 없어서 정부나 시에서 롯데에게 매입해 달라고 요청을 해서 구입했다. 그는 한 평의 땅도 사업외 목적으로 판 적이 없다고 한다. 그 후 5위, 9위, 11위, 12위로 떨어졌고, 2006년에 신격호 회장 일가의 재산은 약 45억달러로 세계 136위로 떨어졌다. 그 이유는 일본의 땅값이 떨어지고 엔화의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이지 사업이 축소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신격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경영을 해야 했으므로, 일찍부터 전문경영인 시대를 열었다. 그는 홀수 달에는 신격호, 짝수 달에는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가 된다. 그 이유는 홀수 달에는 한국에서, 짝수 달에는 일본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현해탄 경영, 대한해협 경영, 또는 셔틀경영이라고 다양하 게 부른다. 언제쯤 시작됐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모국 투자가 시작된 1960년대 말부터라고 짐작한다. 월말이 되면 수행원도 없이 혼자 공항에 나가 훌쩍 비행기를 탄다. 그는 2012년까지 일본 롯데 회장을 지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한국 롯데그룹 총괄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롯데 그룹의 한국 사회에 대한 기여
한국 롯데도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껌과 제과로 시작했다. 1974년 12월 칠 성사이다와 1978년 삼강하드아이스크림을 인수하여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으로 개편했다. 1978년에는 한일향료(지금의 롯데식품)와 1978년 롯데햄우유를 설립했고, 1979년에는 국내최초의 패스트푸드업체인 롯데리아를 설립했다.
그런데 일본롯데는 지금도 여전히 매출의 71%를 식품관련 부문에서 발생시키고 있지만, 한국롯데의 경우 가장 많은 매출이 일어나는 분야가 유통부문이다. 롯데쇼핑은 우리나라 유통산업 선진화의 주역이 다. 롯데는 소매점과 메이커를 직접 연결하는 직판제 정착에 주력하며 1970년대에 들어 롯데는 유래 없이 성장했다. 사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백화점은 임대매장 위주였고, 재래시장이 주를 이루는 전근대적인 수준이었다.
그런데 롯데쇼핑이 문을 열면서 쾌적하고 편리한 쇼핑환경, 풍부한 상품구색, 현대화된 유통구조 등을 갖추게 되어 쇼핑 문화를 향상시켰다. 월마트나 까르프 등 세계 선진적인 유통회사들이 한국에 진출했으나 한국의 토종유통회사들이 한국 시장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 분야의 선두주자인 롯 데쇼핑 등 롯데그룹 유통부문의 역할이 컸다. 따라서 신격호의 공헌은 먼저 유통구조의 개선에서 찾을 수 있다.
유통부문에서 가장 큰 34조 원의 매출을 올린 한국롯데는 2015년 중점 사업 중의 하나를 옴니체널 (Omni-Channel)로 세웠다. 이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상품을 보고 구매는 온라인에서 하는 식의 온·오프 라인을 넘나들며 소비하는 쇼핑패턴에 대응하여 자유롭게 구매 채널을 선택하는 소비자를 겨냥한 것이 다. 우리나라에서 온라인몰의 매출비중이 전년대비 25%상승했고, 중국의 경우 무려 43%가 성장했다. 매장에서 상품을 체험해 보고, 실제로는 오프라인으로 구매를 하는데, 그럴 경우 현장에서 바로 물건을 가져갈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옴니체널이다.
한국 롯데는 제과와 유통 분야 이외에도 여러 분야로 진출했다. 일본롯데는 17개에 불과한데 한국롯데는 75개 자회사를 가지고 있다. 과자 포장에 필요한 은박지 생산을 위해서 동방알루미늄을 인수하여 롯데알루미늄(주)을 세웠다(1970), 그리고 1973년에는 공해 방지시설업체인 롯데기공과 오디오 생산업체인 롯데파이오니아(현재의 롯데전자)를 설립했다. 1974년에는 사무기기 메이커인 롯데산업을, 그리고 11월에는 종합무역상사이니 롯데상사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1979년에는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하여 국가기간 산업에도 참여했다.
한국롯데의 운영업종별 자회사 개수가 가장 많은 부문이 또한 관광/서비스부문이다. 중국인 관광시대 가 활짝 열리면서 우리나라 관광산업이 외화가득률이 90%에 이르는 미래의 고부가가치 전략산업으로 자리 잡게 한데는 호텔롯데나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최대규모의 실내 테마파크인 롯데월드가 기여한 바가 크다. 신격호는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이 었습니다.”고 했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우리나라의 관광산업에 대한 인식전환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러한 공로가 인정돼 지난 1995년 관광의 날에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금탑산업훈장은 기업인에게 주는 국가 최고의 서훈으로 그때까지 기계전자 등 제조분야에서는 수상자가 있었으나 관광산업분야에서는 신격호 총괄회장이 처음으로 받았다. 사실 과거에 관광산업은 산업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부지확보나 투자재원 조달도 어려웠고, 투자수익률도 낮아서 민간투자가 저조했다.
롯데면세점은 우리나라를 면세점 세계 1위로 끌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롯데면세점은 국내 면세점 시장 점유율 82%로(2014년 기준)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세계에서 4위에 랭크되어 있다. 우리나라 31%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신라면세점의 경우 세계 7위이다. 일부에서는 면세점 시장이 독과점 구 조라고 비판하지만, 면세사업의 특징상 규모를 키우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서 경쟁을 할 수 없다.
인구 800만 밖에 안되는 스위스는 세계 2위 듀프리(Duffry)와 6위 뉘앙스(Nuance)를 가지고 있으며, 최근에 듀프리는 뉘앙스를 인수했다. 그리고 듀프리는 이번에 이랜드와 함께 시내면세점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렇게 치열한 면세시장 경쟁에서 한국의 기업들이 선진국 기업들과 어께를 겨룰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간 것도 롯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롯데면세점이 국내 면세사업자로 최초로 세계 최대 여행유통업체인 DFS(Duty Free Shoppes)그룹이 30년 넘게 독점 운영해온 미국 괌공항 면세 사업 운영 권을 따냈다. 그런데 자기 시장을 지키려는 DFS사로부터 1년 동안 소송에 시달려야 했다.
세계 전체의 해외여행 규모는 11억 명인데, 그 중에 한국을 찾은 관광객은 1.3%에도 미치지 못하는 1400만 명에 불과하므로, 관광산업은 잠재력이 매우 큰 산업이다. 관광산업의 국내총생산(GDP) 기여도를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5.4%에 불과해서 말레이시아(16.0%), 태국(15.7%), 홍콩(12.8%), 프랑스 (9.5%) 등에 크게 못 미친다. 전 세계 면세점 업체가 중국인 관광객을 겨냥하고 있다.
일본은 작년부터 식품, 음료, 약품, 화장품 등 소모품까지 면세품을 확대하고, 소비세도 전액 환급해 주는 등 관광객 확보와 면세점 매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은 또 면세점 규제를 풀어서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면세점을 1만개로 늘릴 계획을 세웠는데, 편의점이나 약국들이 면세점으로 변신해 이미 올해 1만개를 돌파했다. 중국 정부도 자국의 관광객이 해외에 나가서 지출을 많이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해외여행 소비를 국내로 전환하기 위해서 면세점을 대형화하고 있다. 화이난에 한국 최대 규모인 롯데면세점의 6배가 넘는 대규모 면세점을 설치해서, 세계 4위이던 중국의 자국 면세점 점유율이 2013년 2위로 올라갔다.
관광산업이 21세기 유망산업이고, 국제적인 경쟁도 치열한 이때 롯데가 그동안 한국의 관광산업과 면세점 사업에 기여한 공로는 매우 크다. 최근 롯데는 부산에 108층짜리 부산롯데타운타워를 건설 중이고, 서울 잠실에 또 지상 123층, 555m 높이로 건설되고 있는 제2롯데월드타워를 건설하고 있다. 이는 3조 5000억 원이 소요된다.
막대한 건설비와 사회적 유·무형의 비용을 감안할 때 수지타산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8년 동안 신격호 회장은 서울에 세계 최고 높이의 제2롯데월드를 짓는 것이 여생의 꿈이라고 하며 꾸준히 추진했다. 이에 대해서 바벨탑이며 노인의 야심이라는 비난도 있다. 그러나 신격호 회장은 21세기 첨단 산업 중의 하나가 관광인데, 한국에는 구경거리가 별로 없어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시설을 조국에 남기려는 뜻밖에 없다고 한다.
맺음말
이 글을 통해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살펴보았다. 그가 롯데그룹을 성공시킨 기업가 정신은 도전정신, 신뢰, 부지런함, 꼼꼼한 성품, 아이디어 등 다른 기업가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재일교포로써 조국에 투자를 했다는 측면이라고 본다. 왜 군사구데타가 일어난 가난한 조국에 투자를 했을까? 일본에서 성공한 사람이 신격호 회장만은 아니다.
빠칭고 사업으로 일본 10대 주식부호에 들어간 마루한의 한창호도 있고, 최근에는 소프트뱅크의 손정의도 있다. <포브스 아시아>에 보도된 ‘가장 성공한 재미동포 25인’에 의하면 패코철강의 백영제 대표 등 해외 자산가들 이 세계 도처에 있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신격호 회장은 조국에 지속적으로 투자를 했다.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박정희라는 지도자를 신뢰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조국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정확하게 어느 요인이 가장 큰지 알 수는 없지만, 많은 경영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나라를 잃고 외세에 의해서 근대화의 길을 걸어간 식민지 시대에 기업가들에게 기업보국의 정신이 있었다고 하고, 이것이 한국의 기업가정신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는데, 해외교포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신격호 회장이다.
이러한 측면이 그 동안 너무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밖에도 많은 기업보국의 정신을 가지고 기업을 일으킨 기업인들을 친일이나 독점재벌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했던 점을 되돌아 보고, 앞으로 보다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앙대 김승욱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