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연지 기자]아랍에미레이트(UAE)가 자국 항공사들의 한국행 운항 횟수 증대를 요구할 것으로 관측되면서 국내 항공업계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이미 중동계 항공사들의 아시아발 유럽행 수요 점유로 큰 타격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 양국 간 공급이 증대될 경우 그 피해는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11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이달 12~13일 서울에서 UAE와의 항공회담이 열린다.
현재 대한민국과 UAE 간 항공노선에 있어 국 항공사들은 약자다. 양국 항공협정상 주 15회를 운항할 수 있는데 대한민국의 경우 대한항공만 218석짜리 A330을 주 7회 운항한다. 반면 UAE의 경우 에미레이트항공이 초대형기인 517석짜리 A380을 주 7회 띄우고 있고, 에티하드항공도 327석짜리 보잉787을 주 7회 운항하고 있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 기준으로 한-UAE 간 공급은 약 41만 석 규모였다. 하지만 실제 양국간 수요는 공급의 36% 수준인 15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AE 항공사들이 공급을 공격적으로 늘렸던 것은 한국발 유럽행 환승 수요를 잠식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에미레이트항공 69%, 에티하드항공의 62%가 환승객이다.
에티하드항공까지 A380을 띄울 경우 하루 중동노선 공급석만 1000석을 훌쩍 넘는다. 이미 에티하드항공은 2019년 7월부터 2020년 3월까지 A380을 매일 운항한 적도 있다. 이렇게 될 경우 하루 공급석 기준으로 에미레이트항공과 에티하드항공의 단 하루의 운항편이 대한항공의 주 5회를 운항하는 편수와 맞먹는다.
UAE의 증편 요구를 허용하면 국적사의 중동 직항노선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시장에서는 한-UAE 간 주 7회가 추가 증편되면 연간 1300억 원 수준의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 중동항공사들의 시장교란…정부 보조금 수령 등 공정경쟁 체제 흔들
UAE 등 중동항공사들은 막대한 보조금을 바탕으로 재정 부담에 대한 걱정 없이 국제항공노선을 확장하며 단기간에 몸집을 부풀리고 있다. 이 같은 보조금 수령 및 혜택이 공정경쟁의 틀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UAE와 카타르는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지난 10여년간 에미레이트항공, 에티하드항공 등 국영 항공사에게 520억 불(한화 약 66조 원)의 비정상적 혜택을 제공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이에 더해 노동조합 결성 금지, 근로자 권리 제한 등 제도적 장치로 낮은 인건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중동에 취항하는 다른 국적 경쟁항공사들이 당연히 지출해야 하는 비용인 소득세, 유류세 납부 의무도 지지 않고 있다.
공정한 경쟁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전 세계 항공사들은 피해 노선의 공급을 줄이거나 철수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2002년 UAE와 항공자유화 항공협정을 체결했는데, 중동항공사들의 잇따른 공세를 버텨내지 못했다. 델타항공의 경우 2016년 애틀랜타~두바이 노선, 유나이티드항공 또한 같은 해 워싱턴~두바이 노선을 단항했다. 올해 3월에 들어서야 유나이티드항공이 주 7회 뉴욕(뉴어크)~두바이 노선을 띄웠지만, 이미 미주~중동 시장의 패권은 중동항공사에게 돌아간 뒤였다.
호주 콴타스 항공은 중동항공사의 저가 공세로 구주 노선의 수송객이 매년 대폭 감소해 어쩔 수 없이 2003년 로마 노선, 2004년 파리 노선, 2013년 프랑크푸르트 노선을 폐지했다. 미국 항공사들도 마찬가지다.
유럽 지역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중동항공사들의 공격적인 영업으로 인해 유럽 항공사들의 실적악화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중동노선 및 아시아행 노선의 운항을 잇따라 중단한 바 있다. 루프트한자의 경우 2015년 동남아시아 및 아프리카행 노선 20여개 운항을 중단했으며, 에어프랑스의 경우 아부다비, 도하, 제다, 첸나이, 하노이, 프놈펜 등의 운항을 잇따라 중단하는 등 심각한 타격을 받은 바 있다.
◇ 중동항공사들의 불법적 행태에 고심…세계 각국 대책 마련에 나서
UAE 항공사들은 경쟁사들의 직항 노선에는 덤핑에 가까운 가격 정책을 구사하고, 경쟁사들이 취항하지 않는 노선에는 고가 전략을 고수한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두바이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노선에는 대폭 할인된 가격의 항공권을 제시해 한국 국적 항공사들의 유럽 수요를 취하고, 국적 항공사들이 취항하지 않는 아부다비 노선 등에는 비싼 항공권을 판매하는 방식이다.
비정상적 경쟁체제가 이어지면 국내 항공사들이 노선을 축소하거나 정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UAE 항공사들의 무분별한 진입을 허용하면 장기적으로는 소비자의 선택권이 제한되고, 비싼 항공권을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세계 각국은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미국 항공사들은 2015년 2월 관련 보고서를 발간하고, 정부에 오픈스카이(Open Skies)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나 공정하고 대등한 경쟁을 보장받기 위해 현재 오픈스카이 협정에 규정된 바와 같이 중동 국가들과의 재협상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재협상 기간 동안 중동 항공사들의 미국 내 신규노선 취항을 잠정 중단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같은 결정은 미국 의회에서도 지지한 바 있다.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2015년 3월에는 독일과 프랑스 정부는 공동으로 중동항공사의 보조금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이들과의 공급력 협상을 재추진하는 한편, 보조금 금지규정을 실효성 있게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네덜란드 정부도 같은 해 5월 EU와 중동국가간 공급력 개정협상이 필요하며, 이와 같은 협상이 완료되지 않는 한 중동항공사에 암스테르담 노선 추가 운수권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는 등 중동항공사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2015년 12월 EU 집행위원회는 에미레이트항공, 에티하드항공, 카타르항공 등이 정부 보조금 수령으로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수 없어 일자리가 감소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공정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항공협정 개정 추진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국내 항공업계 관계자들도 국가기간산업인 항공산업과 일자리를 보호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항공협정이 이뤄져야 한다며 UAE 항공협정 개정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국내 항공업계 관계자는 "단기간의 경제협력이나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선진국들처럼 항공 등 국가기간산업을 보호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발전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며 "더 나아가 타국에서 중동항공사들이 항공산업을 잠식해나갔던 사례를 토대로 국내 항공산업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적극적인 대응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디어펜=김연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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