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7일 마포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예술인이 본 사익, 사익이 예술을 발전시킨다>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공익’은 좋은 것이고 ‘사익’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장경제 체제에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사익추구이며, 사익을 바로 보고 개인의 사익 추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공익적인 일이다. 예술인들은 사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사익이야말로 예술의 창작 욕구를 자극하는 신성한 힘이라고 생각하는 솔직한 예술인 6명이 뭉쳤다.

현진권 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토론회는 윤서인 작가, 조우석 문화평론가, 최공재 영화감독이 발제를 맡았고, 경희대 경제학과 안재욱 교수, 자유경제원 최승노 부원장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발제를 맡은 최공재 영화감독은 “헐리우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왜 성공했는지 알 수 있다”며 “그들은 영화를 돈 버는 사업으로 인지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했다. 만약에 그들이 공익을 생각해 미국 정부가 요구했던 영화를 만들었다면, 전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미국의 영화산업도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감독은 이어 “전 세계 역사 통틀어 공익의 이름으로 문화를 발전시킨 사례는 없다”며 “멋진 영화를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내면의 사익추구에 의한 결과다. 사익이 있어야 다양한 이익집단이 형성되고, 그로 인해 공공적 가치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래 글은 'HOLLYWOOD의 탄생과 성공, 그 이유를 아시나요?'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 최공재 영화감독

전세계 영화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Hollywood.
국내 자동차 수출의 총액보다 그들의 영화 한 편 수익이 더 많은 현실속에서 세계 영화계는 Hollywood의 막강한 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런데, 과연 Hollywood 가 처음부터 이런 막강한 문화산업의 힘을 가지고 있었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니올시다~” 이다.

Hollywood의 초반 등장은 유럽의 영화인들이나 예술가들에게 싸구려 취급을 받거나 순수한 예술에 먹칠하는 곳쯤으로 치부되었었다. 하지만,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던 Hollywood의 등장은 ‘문화산업’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며, 지금 현재 가장 막강한 힘 을 자랑하는 세계 문화산업의 권력으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미국의 영화산업은 2번의 변화를 겪게 되면서 지금의 Hollywood가 자리 잡게 된다. 변화라고는 했지만 사실적으로 말하면 2번의 충돌이었고, 그 충돌은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사익과 사익, 공익과 사익간의 충돌이었다. 그리고 그 충돌은 Hollywood라는 매우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당사자들이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그런 사익의 충돌은 매 위기가 올 때마다 미국의 영화산업을 번창시키며 Hollywood라는 막강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Hollywood가 어떤 사익의 충돌과 변화를 통해 지금에 왔는지 한번 확인해 보면, 우리는 결국 사익이 공익적 형태, 거창하게 말하면 더 나아가 인류의 문화발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답은 나와 있지 않지만, 영화의 기술적 단어는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기계의 명칭인 ‘Cinema’로 통용되었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영화를 포기하고 사진으로 돌아가 순수예술을 지향하면서 영화계에 더 이상의 존재의미를 부여 받지 못한다.
 

   
 

하지만, 사업수완이 매우 탁월했던 에디슨은 영화가 자신에게 엄청난 수익을 안겨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1908년도에 뉴욕지역에 있는 10개의 영화사들을 묶어 ‘영화특허회사(MPPC)’를 만들고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비록 영화의 첫 탄생은 뤼미에르에게 넘겼지만, 토마스 에디슨은 처음으로 그렇게 영화산업의 형식을 만들게 된 것이다. 문화와 산업을 결합시킴으로써 인간은 누구나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에디슨의 사익추구는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문화적 가치를 제공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디슨의 시장장악력이 독과점을 향해 가자, 당시 미국의 영세한 제작사들은 먹고 살아야만 했고,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마음껏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서부로의 이동을 하면서 지금의 LA에 Hollywood를 만들어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시작했다.

그 영화계 대이동의 선봉에 선 영화사가 바로 지금의 ‘20세기 폭스’다. Hollywood 최고의 메이저사인 ‘폭스’도 그렇게 초창기엔 영세 영화사였었지만, 이 무모한 도전이 지금의 ‘폭스’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Hollywood의 시작은 에디슨의 사익 추구와 미국 영화인들의 사익과의 충돌에서 시작되었고, 그 충돌은 매우 발전적인 형태로 진화, 혹은 창조되었다.

1,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Hollywood는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되는지를 알게 된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이민자들과 자국의 국민들을 위로하고, 일반인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영화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영화인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Hollywood를 저속하고 싸구려로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놓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전쟁에 지친 일반인(해외 이민자 포함해서) 모두가 적은 돈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면서 미국 극 장가는 호황을 맞게 되고, 세계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많은 관객들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극장을 많이 세우고 누구라도 쉽게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문화산업의 기틀 을 만드는 선봉장이 되었다.

이렇듯 지금까지 Hollywood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왜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철저하게 영화를 산업으로서 인지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했다. 만약 그들이 공익을 생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디슨이 공익적으로 미국 영화인들을 대했다면 지금은 유럽의 영화에 먹혔을지 모를 일이고, 미국정부가 요구했던 공익적 목적에 맞췄다면 전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미국의 영화산업도 없었을 것이다.

유럽에서나 영화를 통한 사회혁명을 주장하고 그 이상의 뭔가를 제시하지만, Hollywood는 시작부터 철저히 산업적 관점에서 영화를 시작하고 만들어 냈다. 이 ‘공익’과 ‘사익’의 충돌의 결과는 어떤가?

그렇게 공익을 외치던 영화들은 지금 다 박물관에 처박혀 있고 철 지난 영화사조 안에서 텍스트로 교육되기만 할 뿐이지만, 사익으로 시작한 Hollywood는 지금 ‘어벤져스’ 같은 영화를 만들며 세계시장을 호령하고 있다. 한국엔 매년 1천억원이 넘는 세금이 영화계에 투입된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돈이 투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CJ같은 대기업도,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도, 현장 영화인들도 모두 돈을 벌지 못하고 여전히 배고프다. 도대체 그 1천억이 넘는 세금은 어떤 공익을 위해 한국영화계에 투자되는 것일까? 공익은 어쩌면 신기루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 어디서고 공익이라는 것이 문화를 발전시킨 사례는 없다. 북한만 보더라도 그렇게 당대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해방 이후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가 세상에 내보여진 적은 없다.

공익은 없다. 사익만이 인간에겐 존재할 뿐이다. 사익이 있어야 그 안에서 다양한 이익집단이 형성되면서 공공적 가치도 실현될 수 있다. 더군다나 문화가 발전하는 이유는 절대 공익적일 수 없다. 그리고 사익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금전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멋진 영화를 만들면 그보다 더 잘 만들고, 그보다 더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감독이 되는 것도 의식적 사익의 추구일 것이다. Hollywood만 보더라도 사익의 완성 이후, 그것이 ‘아메리칸 시네마’나 뉴욕의 예술영화계라는 또 다른 예술적 근거를 제공하는 길을 열어줬다. 문화계, 최소한 영화계에서만큼은 ‘공익’은 그저 루저들의 허울좋은 변명일 뿐이다. /최공재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