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은영 기자] '사고 난 곳에 보험있다'는 말처럼 다양하게 사고가 발생하는 만큼 그에 부합하는 보험이 주변에 존재해 있다. 현재와는 다른 양상의 사고 발생이 있었을 과거에는 어떤 보험이 있었을까. 보험의 발자취를 찾아보았다.

   
▲ 보험업계 최초로 한국에서 교육보험이 창시됐다./사진=생명보험협회
불평등 조약으로 들어오게 된 근대 보험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의미의 보험이 도입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문호가 개방되고 서양 열강이 진출하면서 부터다. 영국계 보험사를 중심으로 일본계 보험사들이 부산, 인천 등지에 대리점으로 진출했다.

순수 한국계 보험사는 1921년 한상룡 등의 기업가가 설립한 '조선생명보험'이다. 이듬해 '조선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현 메리츠화재보험)가 설립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영국계가 중심이었다면 일제강점기에는 바야흐로 일본의 생보사가 독점적으로 운영됐으며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까는 미군정청의 관리 하에 보험사들이 설립됐다.  

해방 당시 일본 생보사들이 계약금 환급 없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한국에는 보험 불신 풍조가 퍼지게 됐다. 반면 상대적으로 화재보험이 보험시장의 비중 차지가 컸으며 한국전쟁 후에도 보험시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한국에서 보험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를 띠기 시작한 것은 수출을 중심으로 한 경제개발과 성장전략이 추진되던 1960년대부터다. 당시 생보사는 국민저축기관으로 지정되면서 단체보험이 늘어났고 해상보험 역시 성장을 이뤄갔다.

1970년대 보험시장은 개인보험 위주로 진행됐다. 내자동원을 위한 저축증대정책을 실시, 저축성보험에 기반 한 생명보험시장이 급격히 확대됐다. 특히 1977년 정부는 당시 ‘보험의 해’로 지정, 대대적인 보험산업 근대화 대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고도성장을 지속한 결과 기관투자가로서 자본시장의 거물로 성장했고 국민소득 증대에 따른 자동차보유의 급증으로 자동차보험 시장이 대폭 확대됐다.

1990년대 본격적인 경쟁체제에 돌입했으며 가계성 보험이 부각됐다. 경영부실로 4개의 생보사 허가가 취소되기도 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외국계의 국내 진출이 거세지면서 막대한 자본력과 마케팅을 시장에서의 생존을 이어가야 했다.

국내 첫 보험계약은 '소'
한국의 보험계약 1호는 1897년 체결된 '소 보험'으로 알려져 있다.

한구에 보험이 처음 도입될 당시는 농업사회였으며 소는 농업에 있어서 ‘소중한’ 존재였다.  소 이외에도 보험대상은 가옥, 농토 등이었으며 이 보험은 이완용의 형이자 당시 농상공대신인 이운용이 도입했다.

소 보험은 소의 크기와 관계없이 옆전 1냥으로 동일하게 일시납으로 내고 소가 죽으면 큰소는 100냥, 중간소는 70냥, 작은소는 40냥으로 차등 보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소 보험은 시행한지 100여일만에 폐지됐다. 이는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소는 시장에서 매매할 수 없도록 제도화 돼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반발이 거셌다.

원치 않은 의무적 보험, 징병 보험
1930년대 이후 징병보험이라는 상품이 있었다. 이 보험은 일제가 우리의 젊은이들을 징병해가면서 사망시 돈을 주겠다며 보험을 들었던 것이다.

징병보험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모든 국민에게 징병의무를 부과함에 따라 크게 보급된 것으로 이 보험을 운영하기 위한 ‘징병보험주식회사’가 있었다. 서울에 출장소를 두고 운영했던 징병보험은 일시납, 5년납, 7년납 등의 3종류로 구분되며 가입연령은 15세 이상이었다.

그러나 일제하의 일본계 생명보험회사들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영업비중이 크다고 해도 한국 젊은이들에게서 징수한 보험료를 일본으로 송금해 한국 내의 자금 사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한국 언론의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교육의 나라, 교육보험은 한국이 원조
1958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교육보험을 탄생시켰다. 교육보험은 교보생명 창립자 고 신용호 회장의 작품이다.

교육보험 창립 당시의 주변상황을 살펴보면 한국전쟁 후 국민들은 하루의 생계 걱정이 가득했으며 무형상품인 보험에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고, 일제강점기 시대의 보험 운영등에 따라 불신 등이 강하는 등 사회·경제여건이 교육(개인)보험을 위주로 한 생명보험회사의 창립을 추진할 시기가 아니었다.

   
▲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미군정청의 관리 하에 보험사들이 설립됐다./사진=EBS 역사채널e 캡쳐
그럼에도 1956년 9월경부터 시작된 교육보험에 대한 구상과 준비를 거쳐 1957년 5월 15일에 발기인 총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진학보험'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점차 수정보완을 거치면서 교육보험이라는 하나의 브랜드로 완전히 자리를 잡아갔다.

이 보험은 부모를 피보험자로 해서 보험에 가입하고 피보험자가 사망하면 유족인 자녀들에게 교육비와 생활비를 보장해주는 보험이다.

최초의 보험계리사는 누구
생명보험 분야에서는 업무의 성격상 보험계리인과 보험의(보험 회사의 위촉을 받아 생명 보험에 가입할 사람의 체질, 건강 상태를 진찰하는 의사)가 필수다.

당시 민영생명보험회사의 한국인 보험계리인은 (구)조선생명에 권영희가 유일했으며    보험의로는 주종훈이 (구)조선생명 초창기에 입사해 해방 이후까지 근무했다.

한국인으로 유일한 보험계리인이었던 권영희는 1910년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일본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보(현 휘문고등학교)에서 수학 선생님으로 활약했다. 1921년 조선생명의 창립 멤버로 참여, 수리담당자로 재직하던 중 일본 보험계리인회 정회원 자격을 취득했다. 한국최초의 보험계리인이기도 한 권영희는 조선생명보험의 통계과장, 감사를 역임했다.

의학박사 주종훈은 한국 최초의 보험의로서 조선생명 보험의무과장, 해방 후 동 회사의 감사를 역임하였고, 1959년 4월부터 1968년 2월까지 제일생명보험의 의무실장으로 진단업무를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