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12일 마포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예술인이 본 사익-사익이 예술을 발전시킨다>를 주제로 제2차 토론회를 개최했다.
‘공익’은 좋은 것이고 ‘사익’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장경제 체제에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사익추구이며, 사익을 바로 보고 개인의 사익 추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공익적인 일이다. 예술인들은 사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발제를 맡은 미디어워치 이문원 편집장은 “최소한 예술적 창작행위를 일정수준 이상 유지시키고 집중시키는 역할, 즉 예술적 창작행위를 전문직업적 차원으로 유도하는 역할 차원에서만큼은 분명 경제적 사익 추구가 절대적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 편집장은 이어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대중문화 장르에 ‘공익성’이란 단어를 붙인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다”며 “‘공익성 강조’의 경우는 어떻게든 특정방향, 특정집단의 이익을 담보해주는 방향으로 콘텐츠를 기획한 뒤, 그 특정집단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통해 공적개념 등으로부터 뒤틀린 사익을 충당 받는 식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날 토론회는 현진권 원장의 사회로 남정욱 교수, 이근미 작가, 이문원 편집장이 발제를 맡았고, 강원대 윤리교육과 신중섭 교수,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권혁철 소장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아래 글은 미디어춰치 이문원 편집장의 '영화 장르에서의 경제적 사익 추구, ‘당연한 것’을 왜곡시킬 때 일어나는 비극들'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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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중문화 장르에 있어 사익(私益) 추구의 문제란 딱히 더 거론할 만한 얘긴 아니다. 대중문화 자체가 자유시장경제 구조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만큼 여타 분야에서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을 갖가지 사익 개념들은 물론, 보다 근본적인 경제적 사익 추구란 지점에서 역시 달리 바라보기 어렵다.
물론 문화예술 분야 특성상 경제적 사익이 근본적 행동심리 동력이라 보긴 어려울 수도 있다. 모든 종류 예술 형태는 어찌됐건 발작적이며 돌출적인 예술적 영감을 통해 동력이 형성된다는 게 일반적 인식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 예술적 창작행위를 일정수준 이상 유지시키고 집중시키는 역할, 즉 예술적 창작행위를 전문직업적 차원으로 유도하는 역할 차원에서만큼은 분명 경제적 사익 추구가 절대적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그런 상황이기에, 이 글에선 반대로 지난 100여년에 걸쳐 대중문화 장르 대표격인 영화 장르를 둘러싼 산업구조 내에서 경제적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던 경우를 돌아보기로 하겠다. 실제로 그런 경우들이 존재하긴 했다.
그 대표격 두 사례를 통해 왜 이처럼 당연한 ‘대중문화산업 내에서의 경제적 사익 추구’ 개념이 일시적으로나마 무너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런 식 역행 발상은 쉽게 지속성을 잃거나, 본래 행동심리상 동력을 훼손시키거나, 나아가 산업구조를 왜곡시켜 시장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게 됐는지 돌아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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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미네이터 제네시스. |
경제적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던 영화들은 더욱 변태왜곡된 방식으로 사익을 얻는다
흔히 영화 장르가 지나치게 상업성 위주로만 흐르고 있다며 비판하는 목소리엔 대부분 ‘그렇지 않았던 시절’이 언급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경제적 사익 추구가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로는 대부분 1950~70년대에 걸친 프랑스 누벨바그 시절, 영국의 앵그리 영맨 시절, 미국의 아메리칸 뉴 시네마 시절 등이 언급되곤 한다.
확실히 이 시기 영화들은 지금 기준으로 볼 때 딱히 상업적으로 어필할만하다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극히 현학적인 언어로 느릿느릿하게 진행되는 철학적 영화들이 많고, 그 외 각종 사회파 영화, 내러티브를 파괴한 실험적 기법의 영화들도 많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절대 경제적 사익을 추구하지 않은 영화들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그 시절’에는 ‘그런 영화들’이 대중의 호응을 얻어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지금은 지나치게 현학적인 영화라 여겨지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1968년 북미지역 연간 통산 흥행 2위작이었고, ‘400번의 구타’ ‘내 사랑 히로시마’ ‘네 멋대로 해라’ 등 누벨바그 영화들도 모두 유럽시장 전역을 휩쓴 흥행성공작들이었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는 관객이 어마어마하게 몰려 상영관 앞에 기마경찰들이 동원해 거리를 통제해야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급격히 상승한 대중의 교육수준, 마찬가지로 상승하기 시작한 생활수준, 미디어 폭발기와 맞물린 지식인계급 담론시장 확대, 여기에 비트세대-히피세대로 대표되는 신좌파 트렌드가 가세한 청년세대 분위기 등등. 어찌됐건 결론은 같다. 당시엔 ‘그런 영화들이 상업성 높은 영화들’이었기에 쏟아져 나온 것뿐, 근본적으로 영화 장르내에서 돈이 안 벌릴 영화들에 미쳤다고 투자자들이 돈을 쏟아 붓던 시절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작 ‘경제적 사익’과 별 상관없이 만들어진 영화들은 따로 있었다. 이른바 ‘제3세계’ 영화론에 충실한 영화들, 즉 정치적 목적성을 뚜렷이 띠고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이 같은 개념은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도 솔라나스와 옥타비오 케티노가 처음 제시한 바 있는데, 할리우드 중심의 소비적이고 오락적인 영화를 제1영화, 나름대로 진지하게 현실을 고민하지만 주변만 맴돌고마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영화를 제2영화, 그리 고 이 두 영화적 흐름을 탈피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역사의 올바른 발전 방향을 추구하려는 혁명적 영화를 제3영화라 지칭했다.
이 이론은 영화가 대중을 결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서, “카메라가 영상/무기를 끊임없이 수용하는 ‘탄창’이라면, 영사기는 초당 24발의 프레임을 날려 보내는 ‘기관창’이다”란 선언으로 대변된다. 여러모로 무시무시한 개념이다. 하여간 이런 식이니 ‘제3영화’는 절대 경제적 사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선 안 됐고, 오직 혁명적 정치사회 흐름을 돕기 위해서만 기획되고 만들어지며 상영될 수 있었다.
그럼 이런 영화는 대체 어디서 돈이 나서 만들어졌던 걸까. 단순하다. 그런 정치사회적 흐름을 조장하려는 정치세력에 의해 제작비가 충당돼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정치권발(發) 영화들이었던 셈이다. 한국에서도 1980~90년대 정치권에서 자금을 흘러나와 제작되곤 했던 대학 동아리 중심 다큐멘터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결국 ‘넓은 의미’에서의 사익은 맞긴 하다. 다만 그게 경제적 사익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역시도 정치권력 획책이란 큰 화두 내에서 보면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사익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오직 더 변태적이고 더 왜곡된 형태로서 경제적 사익이 추구됐을 뿐이다.
21세기 대중문화계에 메디치 가문의 부활? 오히려 폐해만 남긴다
이제 조금 더 특이한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한 마디로, ‘메디치 가문의 부활’과도 같은 상황이다. 그런 상황이 21세기 영화 장르내에서, 그것도 영화 장르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메건 엘리슨이란 여성제작자다. 올해 29세밖에 안됐다. 그런데 이 여성제작자가 영화산업의 기본과도 같은 경제적 사익 추구 원칙을 송두리째 깨부수고 있는 중이다. 대체 29세 여성이 무슨 돈이 있어서? 사연은 단순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바로 세계적 IT기업 오라클의 총수, 래리 엘리슨이다. 전 재산이 410억 달러(약 41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래리 엘리슨은 딸인 메건 앨리슨의 25세 생일선물로 그중 20억 달러(약 2조 원)을 증여해줬다. 이 돈으로 메건 앨리슨은 평소 늘 관심 있었던 영화산업에 뛰어들어 안나푸르나 픽쳐스란 영화제작사를 세웠고, 이 회사를 통해 ‘절대 상업적이지 않은’ 영화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돈은 벌어도 그만, 잃어도 그만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행보 자체로 보면 애초 ‘잃고자 하는 의도’가 더 큰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어찌됐건 현재 비평 기준으로 볼 때 분명 위대한 예술작품으로서 칭송을 얻을 수 있을 법한 콘텐츠, 소재에서부터 감독, 작가, 주연배우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비평가를 위한 영화’를 만들되, 대중 영화로서 가능성이 크게 떨어져 그 어떤 투자자도 선뜻 돈을 내놓지 못했던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그야말로 메디치 가문의 부활 아닌가? 실제로 메건 엘리슨이 처음 안나푸르나 픽쳐스를 론칭했을 때만 해도 미국언론들은 일제히 메디치 가문이 할리우드에 새롭게 터를 잡았다고 떠들어댔고, 그녀의 포부와 방향성을 극찬해댔다. 그렇게 안나푸르나 픽쳐스는 2012년부터 현재까지 10편의 영화를 내놨고, 그중 3편이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딱 지난해 말부터 메건 엘리슨에 대한 평가는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 새롭게 등장한 영화산업지 TheWrap부터 비판을 시작했다. 이 매체는 일단, 메건 엘리슨이 소위 ‘독립영화’라 불리는 영화들 제작비를 지나치게 높여놨다는데서부터 문제를 제기했다. 메디치 가문 식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될성부른 예술가에게 충분히 시간과 자금적 여유를 주고 예술작품을 한 편 만들게 하는 게 바로 ‘경제적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 태도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문제들이 속출했다. 첫째, 웬만큼 돈을 벌어들인 영화조차 상업적 성취에 비해 제작비가 너무 높아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안나푸르나 픽쳐스에서 제작한 10편의 영화들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아메리칸 허슬’ 단 한편으로 분석된다. 그럼 나머지 9편은? 영화 자체의 손익이 문제가 아니라, 그 영화를 제작한 감독과 각본 등 스태프들의 흥행 트랙 레코드에 문제가 생긴다.
어찌됐건 흥행실패작을 만들어낸 스태프에겐 여타 제작사에서 제작기회가 확연히 줄어든다. 상업적 가능성은 둘째 치고라도, 독립영화 시장규모에 걸맞는 규모로 전체 프로덕션 통제에 실패했다는 인상이 남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유일한 살 길은 또다시 안나푸르나 픽쳐스 같은 ‘경제적 사익을 원치 않는’ 회사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 외엔 남지 않게 된다. 안나푸르나에서 선택해주지 않으면 이후 작품 활동을 하기 어려워진다. 그렇게 보다 타이트한 환경에서라면 충분히 활동할 수 있었던 인재들을 안나푸르나의 노예로 만들고, 또 작품 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
둘째, 메건 엘리슨이 이렇게 독립영화판 자체를 돈으로 키워놓다 보니 관련 업체들도 무수히 그 수와 덩치가 커져버린 상황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오라클의 딸이라 해도 재산에는 한계가 있다. 이렇게 계속 흥행실패를 당연한 줄 알고 돈을 쓰다 회사가 도산해버리면 그 후폭풍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리란 예측이다. 간신히 연명하던 독립영화판 전체가 일순간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를 눈치 챈 듯 메건 엘리슨은 이제 ‘돈줄’을 찾아 상업적 가능성 높은 영화들도 찾게 됐고, 그러다보니 올 여름 개봉 예정인 ‘터미네이터 5’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최악의 수다. 그런 종류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 구조의 블록버스터들은 성공하면 크게 하지만, 망해도 크게 망한다. 그러면 그나마 지금 같은 1년에 3~4편 제작배급 체계도 무너질지 모른다. 그럼 독립영화판 전체가 흔들린다. 가까스로 상업성과의 줄다리기를 통해 살아남은 저예산영화의 틀이 무너질 우려가 높다.
셋째, 이건 일종의 속설에 가까운 부분이지만, 본래 그런 식으로 비단융단을 깔아놓고 영화를 만들라고 하면 그 영화를 만드는 작가들은 ‘최상’의 결과를 내놓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시민 케인’의 오손 웰즈도 말한 바 있다. “한계의 부재는 예술의 적” 이라고. 결국 어느 예술작품이건 간에 직면한 현실적 한계와 싸워가며 투쟁 속에서 갖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뽑아내 만들어낸 타협의 산물이지, 돈 놓고 네 맘대로 해라 식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오히려 나태함과 아집만 늘게 돼 작품 퀄리티상으로도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이전까지의 미국 독립영화계는 확실히 달랐다. 적은 제작비로 살뜰하게 만들어냈고, 상업성이 없는 게 아니라 대형 스튜디오에선 좀처럼 나오기 힘든 보다 도전적이며 창의적인 상업정신을 발휘해 신선감을 불어넣어줬다. 배급도 천천히, 그리고 계산적으로 시도하며 전체 시장상황에 적응해내고 있었다. 로우 리스크-로우 리턴 구조를 잘 정착시키며 영화계 전체에 새바람을 불러오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오히려 저 ‘메디치 워너비’ 메건 엘리슨 덕택에 전체 시장질서와 노하우가 일순간에 무너지고, 오히려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게 됐다는 비판이다.
결국 메건 엘리슨 사태는 메디치 시절처럼 애초 대중시장 개념이 희미했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확고한 자본주의 시스템내에서 대중시장이 자유롭게 성립돼 있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메디치의 존재가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언급했듯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터미네이터 5’는 올해 여름 흥행에 실패했다. 약 1억5500만 달러를 투자해 북미지역에서 현재까지 8849만6000달러, 그 외 지역에서 2억34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런데 상영극장들과의 부율과 추가로 드는 홍보비 등을 감안했을 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통상 제작비의 4배 이상을 벌어들여야 손익을 맞추게 된다. ‘터미네이터 5’는 그 절반 정도 되는 수익만을 회수했고, 이후 DVD 등 2차시장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
그럼 이제 안나푸르나 픽쳐스는 어디서 살 길을 찾아야 할까. 그리고 안나푸르나 픽쳐스가 이끌다시피 했던 미국 저예산영화 시장은 또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공익’이란 단어가 예술계에서 가져온 비극
앞서 언급했듯, 대중문화 장르에는 엄밀히 말해 ‘공익성’이란 단어를 붙인다는 것 자체가 참 어색하다. 만약 공익을 부르짖는 이들이 존재한다면, 바로 위 두 사례를 생각해보면 그 원인과 결과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메건 엘리슨처럼 자신의 심미적 만족을 위해 시장질서 자체를 교란시켜 남들은 그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도록 만든 뒤 도망쳐버릴 수 있다.
또 다른 ‘공익성 강조’의 경우는, 어떻게든 특정 방향, 이데올로기건 무엇이건 간에 특정집단의 이익을 담보해주는 방향으로 콘텐츠를 기획한 뒤, 그 특정집단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통해 공적개념 등으로부터 뒤틀린 사익을 충당 받는 식이 된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상당히 자주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물론, 그 폐해도 충분히 봐온 상황이다. ‘공익’이란 단어가 예술계에 가져온 크나 큰 비극이다. /이문원 미디어워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