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지난 70년간 일제 강점으로부터의 해방, 1948년 건국, 1950년부터 3년간 펼쳐진 6·25 전쟁 등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판 삼아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왔다. 광복 이후 70년의 위대한 여정은 이승만 박정희 등 정치적 리더십과 위기를 슬기로 극복했던 국민 개인 각자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는 지난 70년의 저력을 바탕으로 세계 속의 선진한국, 나아가 자유통일 달성을 위해 도약해야 할 시기다. 이에 바른사회시민회의(이하 바른사회)는 광복 기념 연속토론회의 마지막 순서로, 지난 70년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위대한 발자취를 짚어보고 ‘미래 도약’ 제언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바른사회가 1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개최한 ‘광복 70주년 기념 연속토론회 <6차> 위대한 여정 70년, 새로운 도약의 70년을 위한 제언’에서, 이영조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의 사회로 박범진 前 국회의원, 안용환 명지대 한국학연구소 교수, 김호연 단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김진규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정치, 산업, 문화, 동포 각 분야의 발제를 맡았다. 아래 글은 안용환 명지대 한국학연구소 교수의 발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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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역군, 기업가 정신의 부활…대한민국의 미래
1. 들어가는 말
중동 문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해결사, 前 청와대 경제수석 오원철은 기획입안자, 정주영은 행동대장으로 분업과 협업이 아주 잘 되었다. 중동의 역사는 박정희-오원철-정주영의 라인업(Line-up)으로 출발되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2015년 5월 31일 현재 3,715억$의 외환보유액을 기준으로 세계6위 경제 강국이 됐다. 그 이유는 ①한일협정타결청구권 6억$ ②월남파병 ③파독광부 및 간호사 ④중동건설 수주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중동 건설 달러 수입이 절대 기여를 했다. 지면 관계로 본고에서는 중동건설만 다루고자 한다.
1961년 5.16혁명으로 박정희가 김일성과 조우했을 때, 남한의 GNP 82$ 북한이 195$, 1962년은 남한이 87$, 북한 211$이 1970년에 비로소 역전되어 남한이 252$ 북한이 230$을 기록하였다. 그 이후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중동 건설 때문이었다. 1973년에 중동에 진출한 최초의 업체는 삼환기업(주) 1개 업체 뿐이었으나 1979년에는 무려 60개로 늘어났고 1965~1973년 중동 수주액은 2,400만$이었으나 1974~1981년 412억$ 1980~1988년 760억$ 합계 1,172억$로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이 돈으로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 2차(1967~1971), 3차(1972~1976), 4차(1977~1981), 5차(1982~1986), 6차(1987~1991), 7차(1992~1996)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단숨에 박정희-오원철 라인에 의하여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진입한 것이 오늘의 경제중흥을 이루었고 여기에 절대적인 원인 제공이 중동건설 수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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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는 1차 꿈인 군인이 되었고 그 다음은 가난 극복이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과 동시에 세계 최대 빈국이요, 미국의 원조 등 세계 원조 제1위를 오랫동안 고수했고, 1950~60년대까지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도 한참 뒤쳐져 있었다. |
1. 박정희의 중동 신화의 원인
1) 박정희의 근대사는 가난
박정희의 초등학교 시절은 1등과 급장으로서의 성취감보다는 절대적 가난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녔다. 박정희는 자신이 겪은 가난을 매우 참담한 것으로 기억하곤 했다. 가난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공식적인 저작이나 연설문 속에서도 “가난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우리 집은 아주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축구공하나 살 수 없어서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짚을 뭉쳐 새끼로 동여맨 다음 그것을 논바닥에서 맨발로 차다보면 발끝마다 멍이 들고 피가 맺혔으니까”
그는 9년 동안 자신의 비서실장을 지내며 그와 가깝게 지냈던 김정렴에게는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국민학생 때 수업을 마치고 20리 길을 걸어 집에 오면 배가 무척 고팠어요. 어린 마음에 먹을 것을 찾아 부엌에 가서 솥뚜껑을 여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하다못해 무말랭이나 장아찌 같은 것도 없고…… 할 수 없이 간장을 손가락에 찍어먹곤 했지요 그때 뒷산에 밤나무라도 있었으면 밤을 쪄서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왜 체구가 작은 줄 알아요? 어렸을 때 제대로 못 먹어서 그래요” |
박정희의 가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른 요인도 있었겠지만 극심한 가난에 식구하나 입을 덜려고 하는 박정희 어머니(백남의)의 낙태기도 사건이다. 백남의는 최소 6~7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아이(박정희)를 지우려고 했다. 간장을 한 사발 마시기도 했고, 밀기울을 끓여서 마시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다. 섬돌이나 장작더미 같은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했으며,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자빠지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뱃속의 아이가 한동안 놀지 않았는데 이제 됐구나 싶으면 아이가 또 놀아서 버들강아지 뿌리를 달여 마시기도 했으며, 이런 저런 방법이 다 실패하자 ‘아이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돌돌 말아 아궁이에 던져버려야지’라는 결심을 한 후에야 아이 지우는 일을 포기했다.
가난은 그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모진 가난 속에서도 꿈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두 권의 책 때문이었다. 한 권은 「나폴레옹전기」요, 또 한 권은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 전기」였다. 박정희는 이 두 권의 책을 읽음으로서 장래에 무엇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군인이 되겠다’ 라는 결심이었다. 나폴레옹도 이순신도 모두 군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목표는 그 이후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과 상황 하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또한 병정놀이를 많이 하는 박정희를 보고 그의 어머니는 “저 아이는 군이 되겠구나” 라고 말하기도 했다. 5.16 군사혁명도 우연이 아니고 꿈의 실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박정희의 현대사는 중동 진출
박정희는 1차 꿈인 군인이 되었고 그 다음은 가난 극복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세계 최대 빈국이요, 미국의 원조가 세계 원조 제1위를 오랫동안 고수했고, 1950~60년대까지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도 한참 뒤쳐져 있었던 대한민국이 어떤 이유로 세계 경제 강국 6위가 되었을까. 그 해답은 중동건설 진출이었다. 중동 건설 진출이 없었으면 도저히 불가능했다. 중동 건설 진출 직전의 나라살림은 어떠했나.
(1) 부도국가 직전 상황
1973년에 우리나라가 지불한 원유값은 3억516만$였는데, 74년에는 11억78만$를 지불해야 했으니 원유값 인상분만 해도 8억264만$나 됐다. 그런데 원유값만 오른 것은 아니었다. 1973년의 경상수지 적자는 3억 880만$였는데 1974년에는 20억2,270만$로 늘었다. 자본거래 통계를 보면, 1973년에는 2억 9,000만$를 빌리면 되었는데 1974년에는 19억 9,840만$를 빌려와야 했다. 경제총사령관인 김정렴 비서실장은 출근하자마자 부도 직전에 몰린 회사 사장처럼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야 했다. “오늘 결제준비는 돼 있나”, “어제 홍콩에서 돈을 꿔 오겠다는 건은 해결됐어”, “걸프에게 주는 원유 대금은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해”등이었다.
(2)박정회와 정주영 대화록
1975년 여름 어느 날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대통령 :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십시오. 만약 정회장도 안 된다고 하면 나도 포기하지요.
정주영 : 무슨 얘깁니까.
대통령 : 1973년도 석유파동 이후 중동국가들은 달러가 넘쳐 주체하지 못할 정도인데 관리들을 보냈더니 2주 만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공사를 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정주영 : 그래요. 오늘 당장 떠나가겠습니다.
(정주영은 5일 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박대통령을 만났다)
대통령 : 잘 다녀오셨습니까.
정주영 :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운 것 같습니다.
대통령 : 무슨 얘기요.
정주영 :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입니다.
대통령 : 왜요.
정주영 : 일년 열두 달 비가 오지 않으니 1년 내내 공사를 할 수 있어요.
대통령 : 또요.
정주영 : 건설에 필요한 모래,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고요.
대통령 : 물은.
정주영 : 그거야 어디서든 실어오면 되고요.
대통령 : 50도나 되는 더위는.
정주영 : 뜨거운 낮에는 천막을 치고 자고, 밤에 시원해지면 그때 일하면 됩니다.
대통령 : (부저를 눌러 비서실장을 불렀다) “임자, 현대건설 중동에 나가는데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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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정희와 정주영의 에피소드
1977년 무역진흥 확대회의 때, 중동 진출 성과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당시는 무역진흥 확대회의가 끝나면 박정희 대통령은 3부 요인, 관계 장관, 경제단체장 등과오찬에 참석하는 것이 순서였다. 중동진출 붐이 한참 일어나고 있을 때라 박 대통령도기분이 몹시 좋았던지, 오찬 도중에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에게, “정주영 회장, 중동에서 성공을 거둔 이유가 무엇이오” 하고 질문을 던졌다. 정주영 회장은 오찬 도중이어서인지 부담 없는 답변을 했는데,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각하! 제가 공부를 제대로 했습니까, 대학을 나왔습니까, 영어를 할 줄 압니까? 그리고 현대간부가 세계 일류의 외국회사에 비해 기술이나 경영면에서 우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나 회사간부가 잘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전적으로 근로자의 공입니다.”라고 답변했다. 박 대통령도 “정 회장 말이 맞아” 라고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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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연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정주영 현대창업주, 이병철 삼성창업주, 박정희 대통령. 중동 문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해결사, 前 청와대 경제수석 오원철은 기획입안자, 정주영은 행동대장으로 분업과 협업이 아주 잘 되었다. 중동의 역사는 박정희-오원철-정주영의 라인업(Line-up)으로 출발되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왼쪽부터) |
오찬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의 감정이기도 했다. 60년대에는 우리나라의 여성 근로자들, 즉 여공들이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공업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70년대에는 남성근로자들이 중동 열사의 공사터에서 달러를 벌어들여 에너지 위기라는 국난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자랑스럽다. 우리나라의 국운은 행운의 여신 쪽에 서 있었다.
2. 오원철 경제수석의 “국보론”
오원철 경제수석은 찾아오는 외국 손님을 만날 적마다 “당신 나라에서는 석유파동에 대한 대책을 어떻게 하고 있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에 한 가지 공통적 사항이 있었다. 그 답은 “원유값 인상으로 중동 산유국에 달러가 모여들어 넘쳐흐르고 있다. 중동국가들은 이 돈을 가지고 경제건설을 한다는 정보가 있다. 그래서 일본이 중동에 진출하려고 노력 중에 있다”라는 것이었다.
이 답을 듣고 오원철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무릎을 쳤다. ‘우리나라도 월남전 때 <월남 붐>을 일으킨 경험이 있지 않느냐? 이번에는 중동에 진출하자. 그것도 다른 나라보다 앞서 진출해서 교두보를 확보하자 그리고 기반을 구축하자’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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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독일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가 파독광부 및 간호사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사진은 독일 재독동포역사,광산박물관에 걸려있다. /사진=미디어펜 |
결심이 서자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중동에서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사우디의 나제르 기획상을 서울에 초청하였고, 장관급을 단장으로 해서 중동에 파견시켰고 경제기획원, 국방부, 상공부, 외무부가 협력하여 태스크 포스팀(Task Force Team)을 설치하여 가동시켰고, 해외건설촉진법 제정을 박 대통령에 건의하여 1981년까지 한시법으로 성안하여 중동진출기업에게 국가적 뒷받침을 확고히 하여주었다.
그래서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처럼 오원철은 한국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의 효시로서 공무원의 정신자세 기준을 제시한 분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창조경영 제시였다. 그는 확고부동한 경제철학으로 수십 개의 후진국들이 수십년 동안 경공업으로 걸어가고 있는 경제정책을 단숨에 중화학공업(조선, 화학, 기계, 전자, 자동차, 제철)과 방위산업 방향으로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오늘날 6대 경제강국의 초석이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을 가리켜 “저 사람은 국보야”라고 극찬했다.
3.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
1) 500원 짜리 지폐 한 장
정주영은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일본으로, 영국으로 배를 수주하러 돌아다녔다.
나는 ‘봉이 김선달’이 되었다. 세계의 유수 기존 조선소의 엄청난 규모를 알면서도 그 사진만 들고 다니면서 “당신이 배를 사주면 영국, 수출보증기구의 승인을 얻어 영국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이 사진 속 백사장에 조선소를 지어 당신 배를 만들어 주겠다” 1971년 9월 영국의 에플도어 롱바툼 회장을 만나 그때 바지주머니 안에 있는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보이면서 “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요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던 실적과 두뇌가 있소 영국 조선 역사는 1800년대부터로 알고 있다. 우리가 300년이나 앞서 있었소” 내 말에 롱바톰 회장이 빙그레 웃었다. 그의 도움으로 버클에이은행의 차관도입이 이루어졌다. 이튿날 해외담당 총책임자인 버클레이은행 부총재는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내게 물었다. “당신의 전공이 뭡니까” “사업계획서가 내전공이요” |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현대중공업은 조선소를 짓지도 않은 상태에서 26만톤급 대형 유조선을 수주한 이후, 1972년 현대중공업을 창업하여 2년 3개월 만에 1974년 6월 28일 26만톤급 대형 유조선 2척을 만든 것이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1977년부터 세계 1위였던 일본을 제치고 수주량 1위요, 수주잔류량 세계1위를 달성했다. 이는 정주영만이 할 수 있는 배포였다.
2) 주 베일 항만공사-神의 조화다
주 베일산업항 공사는 몇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9억 3,000만$로 세계건설업계가 20세기 최대의 대역사로 불렀던 일감이었다. 현대건설은 1975년 9월에 입찰 정보를 영국 런던의 음용기 이사로부터 입수했는데 이미 미국의 브라운앤드루트, 영국의 코스테인, 서독의 보카리스, 프랑스 스피베타놀 등 세계 굴지의 9개 회사는 입찰자격을 따놓은 상태였다.
정주영은 런던의 음용기 이사에게 무조건 따낼 것을 지시했다. 우선은 10개 중에 하나로 끼는 것이 선결 문제였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현대는 열 번째 입찰자격을 따냈다. 다음은 입찰보증금 2000만$가 필요했다. 입찰 4일 전에 극적으로 마련했다. 현대 입찰팀은 100페이지가 넘는 견적서를 마련하여 8억 7000만$로 응찰가격을 정주영 특명으로 정했다. 그러나 전갑원 상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8억 7000만$가 너무 싸다는 생각에 실패하면 걸프만에 빠져 죽겠다는 결심으로 6000만$를 더 얹어 9억 3114만$를 써놓고 나왔다. 9억 440만$를 미국 브라운 앤드루트사가 낙찰되고, 현대는 2등으로 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낙찰 받은 회사가 서류에 결함이 생겨 무효 처리되고 2등인 현대가 재낙찰받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또 하나의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2억 8000만$ “공사수행 보증금의 지급보증서”가 문제였다. 40여 일의 진통 끝에 해결했다. 이 수주로 말미암아 한국 건설업자들의 외채 부도를 해결하는 구국의 장이 펼쳐진 것이다.
3) 비웃을테면 비웃어라-정주영 공법
정주영은 현대그룹을 경영하면서 갖가지 신화를 만들어 냈다. 기상천외한 공법을 동원하여 내노라하는 세계 공학도 놀라게 만들고 입을 다물게 하였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정주영만의 아이디어인 것이다. 그 사례 두 가지를 들겠다. 하나는 주 베일항만 ‘정주영 공법’이요. 또 하나는 서산 방조제 ‘정주영 공법’ 물막이공사다.
(1) 정주영공법의 주 베일 항만공사
주 베일 산업항공사는 몇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20세기 최대의 건설대역사로 불렀던 일감이었다. 1976년 7월에 착공했던 이 공사는 실제적인 작업의 난이도보다도 무경험으로 미지의 공사를 강행하면서 겪는 정신적인 고초와 현대건설 기술능력에 대한 불안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발주처와 감독 관청의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는 트집과 지독한 감독관도 고통이었다.
주 베일 공사는 콘크리트 소요량 5톤에 트럭으로 연 20만대 분이 동원되어야 하고, 철강재만도 1만톤 짜리 선박 12척분이 들어가는 공사였다. 참고삼아 말하면 설계상의 자켓이라는 철 구조물 하나면 해도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로 무게가 550톤이며 제작비는 당시 5억원이었고, 웬만한 10층 빌딩과 같았다. 10층 빌딩만한 이 자켓이 꼭 89개가 필요했다. 울산항에서 자켓을 제작해서 12,000㎞의 주 베일항까지 옮기는 것이었다. 경부고속도로를 15번 왕래하는 먼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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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일본으로, 영국으로 배를 수주하러 돌아다녔다. 그로부터 현대중공업의 신화가 시작됐다. 사진은 현대그룹 故정주영 회장(1915~2001). /사진=현대그룹 홈페이지 |
1만 마력 터크보트 3척, 대형 2만톤 바지선 3척, 5천돈 바지선 3척을 서로 연결시켜 10층 규모의 자켓을 실어 수송하는 것이다. 공학자의 논리로는 물론 말도 안 되는 막무가내의 정주영 공법이었다. 수심 30m나 되는 곳에서 중량 550톤짜리 자켓을 한계오차 5㎝ 이내로 20m 간격으로 심해에 설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차가 5㎝만 넘으면 빔을 깎아 줄일 수도 늘릴 수도 없어 그냥 버려야 한다. 감독관들은 당장 철수하라고 목청껏 호통 쳤다. 끝내 정주영 공법은 89개의 자켓을 5㎝ 이내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설치해내서 전 세계 기술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주 베일 산업 항공사에서 시공 능력을 인정받아 라스알가르 주택항공사, 알고바 젯다지역의 대단위 주택공사, 쿠웨이트 슈아이바항 확장공사, 두바이발전소, 바스라-하수처리공사 등의 대형공사를 수주했다.
(2) 정주영공법의 서산방조제 물막이공사
서산 방조제 공사의 마지막 연결공사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아무리 돌을 쏟아 부어도 세찬 물살은 흔적도 없이 돌무더기를 쓸어갔다. 4.5톤이 넘는 바위 덩어리를 쇠줄로 3~4개씩 묶어서 던져도 소용이 없었다. 1983년 말 충남 서산에 대규모 간척지를 만들려던 현대그룹은 고민에 빠졌다. A지구 물막이공사는 불가능한 도전처럼 보였다. 6,400m에 이르는 방조제 중 270m만 메우면 되는 상황이었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 거리인데 천수만의 거친 물살은 바다를 땅으로 만들려는 인간의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현대그룹에서는 각종 아이디어를 짜냈다. 하지만 초속 80m의 물살을 이겨낼 해법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무릎을 쳤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해체해서 고철로 쓰려고 30억원에 사다가 울산에 정박시켜놓고 있던 스웨덴 고철선 워터베이호를 끌어다 가라앉혀 물줄기를 막아놓고 바위덩어리를 투하시키면 될 것 같았다. 현대정공, 현대상선, 현대중공업의 기술진이 총동원됐다. 길이 322m의 대형 유조선은 서서히 그리고 정확하게 못 다 이은 방조제의 틈을 막았다. 물살이 잦아들자 수많은 돌무더기를 바다로 던져 넣었다. 이른바, ‘정주영공법’으로 서산 방조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정주영 공법은 여의도의 18배에 이르는 새땅을 대한민국 국토에 추가했다. 공사기간은 3년이나 단축됐다.
행정구역은 충남 서산시, 홍성군, 태안군이 함께하고, 총 간척면적은 4,661만평, 총 답(논)면적 3,062만평, 제방길이 7,688m, 제방높이 26~28m, 연간 미곡(쌀) 생산량 54,000톤(336,280섬), 공사기간 1980.5~1995.8까지 15년 3개월 기간이 소요된 한반도 지형이 바뀐 대단한 공사이다.
4. POST 오일 제2차 중동 붐
외주공사 제1호로 쿠웨이트공사를 시공하였을 때는 제1차 중동 붐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이제 제2차 중동신화를 반드시 재현해야 우리나라 경제가 재도약할 수 있다. 세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첫째가 중동의 거인 이란이 미국과 핵 타결로 복귀할 것이다. 이란은 낙후한 산업인프라를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할 것이다. 이란은 인구가 8,000만 명이고, 천연가스 매장량이 세계1위의 잠재력이 폭발하는 국가다. 보도에 의하면 이란 시장이 개방되면 경제 재건비용으로 향후 10년간 1조 달러 이상의 건설 및 플랜트사업이 추진될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는 포스트오일 시대를 우리정부는 준비해야 한다. 중동국가들은 석유가 고갈될 미래를 대비해 개방경제 체제로 전환하고 있는 중이며, 세계경제와 소통하려고 하고 있다.
세 번째는 건설 일변도의 제1차붐을 지양하고 중동 진출의 다각화를 시도하여야 한다. ①석유관련사업 ②서비스산업 ③제조업 ④IT산업 ⑤보건의료 ⑥식품 ⑦금융 ⑧방위산업 ⑨중소형원전의 공동사업화 ⑩농업기술수출 ⑪교육제도수출 등을 분야별로 연구팀을 두어 활성화해야 한다. 정부내에 제2중동기획과를 설치해야 한다.
이제 중동은 우리의 국익을 챙기기 위한 어떤 프로젝트보다는 박근혜 대통령 4개국 순방 중에 한 말인 수백리의 사막을 같이 걸어가는 동반자(라피크) 관계로 발전해서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idea를 만들어내야 한다. /안용환 명지대 한국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