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지난 70년간 일제 강점으로부터의 해방, 1948년 건국, 1950년부터 3년간 펼쳐진 6·25 전쟁 등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판 삼아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왔다. 광복 이후 70년의 위대한 여정은 이승만 박정희 등 정치적 리더십과 위기를 슬기로 극복했던 국민 개인 각자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는 지난 70년의 저력을 바탕으로 세계 속의 선진한국, 나아가 자유통일 달성을 위해 도약해야 할 시기다. 이에 바른사회시민회의(이하 바른사회)는 광복 기념 연속토론회의 마지막 순서로, 지난 70년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위대한 발자취를 짚어보고 ‘미래 도약’ 제언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바른사회가 1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개최한 ‘광복 70주년 기념 연속토론회 <6차> 위대한 여정 70년, 새로운 도약의 70년을 위한 제언’에서, 이영조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의 사회로 박범진 前 국회의원, 안용환 명지대 한국학연구소 교수, 김호연 단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김진규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정치, 산업, 문화, 동포 각 분야의 발제를 맡았다. 아래 글은 김호연 단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의 발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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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한류의 물결을 지속가능한 한류로”
: 70년 한류의 발자취, 그리고 포스트 한류를 위한 제언
1. 한류의 생성과 그 의미
광복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다양한 범주에서 쉼 없이 달려왔다. 6.25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불모지의 상황을 딛고 일어서며 지금의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렇다면 그 배경은 무엇일까? 물론 수출에 의한 경제적 측면은 그 근원이라는 점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그 밑바탕이 되는 문화적 요소는 더욱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재미있는 비교를 통해 한국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한국과 가나의 1960년대 초반 경제 자료를 비교해 보면 1인당 GDP 수준도 비슷하고, 1차 제품의 경제 점유 분포도가 높은 것도 두 나라가 유사한 모습이라 분석하였다. 그런데 지금의 규모를 보면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국과 가나는 비교가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고 정치적으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발전적 차이에 대해 새뮤얼 헌팅턴은 ‘문화’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한국인들의 근검절약, 투자, 근면, 교육, 조직, 기강, 극기정신 등을 하나의 가치로 생각하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새뮤얼 헌팅턴 공편, 문화가 중요하다, 김영사, 2001, 8~9쪽) 그만큼 문화는 그 나라를 이끌어 가는 상징적 체계로 보이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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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사회시민회의가 1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개최한 ‘광복 70주년 기념 연속토론회 6차 위대한 여정 70년 새로운 도약의 70년을 위한 제언’ 전경./사진=미디어펜 |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 이후 한국문화에 대한 타자(他者)의 인식은 그리 깊이 있게 나타나지 못하였다. 한국전쟁이후 국가 재건에 앞장서며 우리는 경제에 모든 우선을 두었고, 그것이 최우선 과제로 놓였기 때문이다. 간헐적으로 몇몇 예술인들이 외국에 나가 다양한 활동을 하며 한국을 알렸지만 집단적 지속적이지 못하여 한국문화를 알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찌 보면 이즈음 한국문화를 알리는 첨병으로 기억할 것은 ‘태권도’가 아닐까 한다. 전 세계에 나가 태권도를 전파하면서 한국의 정신과 문화를 알린 태권도 사범들의 노력은 민간 외교 사절로 한국문화를 인식시키는 초석으로 의미를 지닌다. 그러던 흐름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전 세계가 한국과 한국문화 맛보는 계기가 되었고 서서히 한국문화가 전파되는 동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한국, 한국 문화가 문화콘텐츠로 타자에 다가선 것은 한류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1990년대 이후일 것이다. 한류는 1990년대 후반 즈음 동아시아에 나타나기 시작한 한국 대중문화의 확산과 그 수용 양상을 의미한다. 드라마, 영화, 가요 등의 한국 대중문화의 매력은 타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고, 한국을 이해시키는 기호로 다가서게 되었다. 요즘에는 대중문화만이 아닌 음식, 게임 등 여러 한국문화의 확산까지도 한류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한다.
한류의 생성은 문화콘텐츠와 관련이 깊다. 인류 발전의 역사에서 우리가 깊이 기억하며 배울 수 있는 건 문명과 함께 문화의 창조적 행위에서 비롯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문화는 저 혼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산업과 결합되면서 부가가치의 새로운 원천이 나타난다. 그래서 적은 자본을 들여 많은 이익을 남기는 산업구조는 자원이 부족한 한국에서 하나의 방향성을 주는 키워드였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쥬라기 공원>이 벌어들인 수익이 현대자동차 150만대 판매수익에 맞먹는다는 말은 문화콘텐츠의 의미를 되새기는 화두로 기억하게 된 것이다.
한류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 제고이다. 그동안 한국에 대한 인식이 그리 높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을 확실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두 번째 한류를 통한 파생적 경제적 효과이다. 한류를 통해 나타난 관광산업의 호황, 유학생의 증가, 한국 상품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로 인해 수출이 증대되는 것은 한류가 이미지에 머무는 것이 문화산업으로 가능성을 열고 있는 모습이다.
2. 드라마를 통한 한류의 흐름
한류라는 명칭은 중국, 타이완에서 처음 생성되었다. 1997년 여름부터 중국 베이징라디오 방송에서 시작된 ‘서울 음악실’이란 프로그램에서 한국 대중문화에 빠진 마니아들을 ‘한뤼우(韓流)라고 부른데서 이 명칭은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한국 대중문화의 물결이 자연발생적으로 타자들에게 수용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함께 1997년 중국에서 방영된 <사랑이 뭐길래>는 한국드라마로는 처음으로 중국 전역으로 방송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한국문화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드라마는 중국인들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불러 일으켰고, 드라마에서의 관심은 대중가요로 장르의 확대로 나아가게 된다. 한국 대중음악의 중국 개척자는 클론, H.O.T, NRG, 베이비복스, SES 등 대부분 댄스 그룹 음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중국의 10대 팬들은 화려한 한국 대중문화의 모방이 ‘도회적, 현대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느끼고 한국 대중문화를 수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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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금>은 2000년대 초반 인기를 모았던, 대표적인 한류 드라마다. ‘장금’이란 인물의 성장 이야기인데, 궁중 식사를 준비하는 수라간 나인에 불과했던 장금이 임금의 신뢰를 받는 의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사진은 드라마 <대장금>의 포스터. |
중국에서 한류의 긍정적 수용은 한국화 된 서양문화가 본래의 서양문화보다 중국인들의 기호에 맞아 떨어짐에서 기인한다. 서양식의 화려하고 세련된 생활양식을 배경으로 동양적 가치관을 담아내었기에 그들에게 다름과 비슷한 점을 같이 찾아내게 된 것이다. 또한 중국 문화콘텐츠가 소비자의 취향 변화를 반영하지 못함에서도 한류가 크게 자리 잡는 역할을 하였다. 중국의 방송시스템은 아직까지 사회주의의 잔재로 제작관행이 뒤쳐져 있으며 그 내용도 정치적 의도를 지닌 혁명극, 역사극이 주를 이루기에 한국 대중문화의 세련된 모습은 매스미디어라는 매체를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게다가 일본문화의 정제됨에 대한 반발과 홍콩이 새로운 문화 트랜드를 형성하지 못하자 그 틈새를 한국 대중문화가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가을동화>는 타자(他者)에게 있어 한국을 처음으로 일깨운 첫 번째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2000년 대만에서 방영된 이후 각 나라에 관심을 일으켰고 시청자들을 적극적인 수용자로 만들게 하였다. 이들은 단순한 시청자가 아닌 속초 아바이 마을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의 촬영공간을 찾아다니며 주인공의 흔적을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이는 문화콘텐츠로서 첫 번째 드라마로 <반지의 제왕>을 통해 뉴질랜드 경제에 끼친 파급효과라는 ‘프로도 경제’(Frodo Economy)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촬영지가 지역 경제를 살리는 바탕이 됨을 보여주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한류는 또 다른 측면으로 나타났다. 일본에서 한국 대중문화에 인식은 그리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는 자국 대중문화의 탄탄한 토대와 한국을 낮게 보는 시선에서 비롯되었다. 그렇지만 영화 <쉬리>(2000년 일본 개봉)가 일본 내 흥행 1위를 거두며 새로운 물꼬를 트고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TV를 통한 한국에 대한 학습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인식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2004년 <겨울연가>는 그저 하나의 TV드라마라는 점을 떠나 타자에 한국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큰 사건만 일어나면 꺼이꺼이 울거나 격렬한 데모만 일삼는 것처럼 보이던 한국에 대한 부정적이고 편협한 이미지는 이 한편의 드라마를 통해 살아있는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근대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배용준 이전이냐 이후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할 정도로 그 영향은 커다랗게 나타났다. 이러한 면모는 ‘한류’라는 거대한 물결을 통해 동아시아인들이 서로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물고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후 <대장금>의 열풍은 한류를 더욱 가속화시켰는데 <대장금>의 성공은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한꺼번에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가장 모범적인 작품으로 기억할 수 있다. <대장금>은 역사드라마는 아니지만 한국의 여러 문화전통을 바라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음식, 건강이라는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를 다룸으로 원형과 전형을 함께 보여주어 전 세계인들이 사랑한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이란, 아프리카까지 확대되며 한류가 동아시아를 벗어나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 드라마를 계기로 많은 드라마들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란에서는 페르시안 민족답게 드라마 <주몽>이 시청률 90%에 육박할 정도였고, 몽골에서 <아내의 유혹>은 국민드라마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3. 영화를 통한 한류 확산의 모습
한국영화는 1980년대 이후 유럽 여러 영화제에 출품하여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데 이는 유럽에 한국 문화를 새롭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한국인 스스로 한국 문화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이 시기는 한국 문화의 원형적 요소를 모티프로 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데 그러한 영화들이 가지는 한국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를 통해 한국 문화의 원형질에 가장 잘 드러난 시기였다.
1981년 제38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이두용 감독의 <피막>이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하고, ISDAP상(특별상)을 수상한 것은 한국영화가 유럽에서 주목받는 계기적 사건이 되었다. <피막>은 여러 필름페스티발에 초청되어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고, 이를 통해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1984년 제37회 칸영화제에 진출,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에 선정되어 다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씨받이>(임권택 감독)에 출연한 강수연이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그동안 한국영화의 적극적 도전과 응전에 대한 결실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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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조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의 사회로 박범진 前 국회의원, 안용환 명지대 한국학연구소 교수, 김호연 단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김진규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정치, 산업, 문화, 동포 각 분야의 발제를 맡았다./사진=미디어펜 |
임권택 감독의 농익은 영화 미학은 <서편제>(1993)를 통해 정점을 이루는데 남도의 애잔한 정서와 판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관객들에 큰 사랑을 받는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서울 관객 동원 100만 명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예술성 좋은 작품도 흥행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이 작품을 통해 한국 문화 속에 내재된 정체성을 스스로 발견하겠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데, 민족적 현실에서 민족적 문화로 옮아가면서 영화적 표상과 민족성의 걸출한 결합을 통해 ‘한국의 내셔날시네마’는 곧 임권택이라는 공식도 이 즈음부터 시작된다.(허문영, 「확장된 리얼리즘 혹은 민족적 리얼리즘」 김미현 책임 편집, 한국영화사-開化期에서 開花期까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393쪽)
<서편제>는 일본에서도 1994년 <바람의 언덕을 넘어(風の丘を越えて)>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당시로는 한국영화 최고의 수출액과 일본 내 관객 10만 명 동원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 영화를 수입한 시네콰논 대표 재일교포 이봉우는 ‘서편제의 성공은 한국과 일본의 이야기하는데 하나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고 한국문화를 강렬하게 일본에 심어준 최초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는 <공동경비구역 JSA>, <쉬리>로 이어지는 일본 내한국영화의 확산에 기틀이 된 씨앗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함께 유럽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는 중요 관심 대상으로 거듭나는데, 2004년 김기덕 감독이 만든 <사마리아>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같은 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이 <빈집>(김기덕 감독)으로 감독상을, 그리고 칸 국제영화제에서 <올드보이>(박찬욱 감독)가 심사위원 대상을 받는 등 이른바 세계 3대 영화제에서 한 해 중요한 상을 모두 받게 되는 경사를 맞는다. 이러한 유럽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인정은 앞서 1980년대 모습과 조금은 변별되는 양상을 보인다.
점진적인 한국영화의 내적 성장과 함께 외국 여러 영화제의 수상을 계기로 한국영화는 대외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2004년 한류를 계기로 한국영화는 대중적으로도 관심을 받는데, 일본 내 한국영화 흥행 1~3위인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외출>,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도 2004, 2005년에 개봉된 영화들이었다. 또한 중화권에서도 다양한 영화들이 상연되어 한국을 알렸고, 합작을 통해 다양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새로운 한류를 위하여
2006년을 정점으로 한류는 희미한 그림자만 남기게 된다. 2004년 특히 2005년 즈음은 무조건 한류 스타가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영화, 드라마가 수출되는 현상을 보였다. 이에 타자들은 한국대중문화에 대해 식상하게 되었고 또한 <겨울연가>, <대장금>처럼 큰 영향을 끼치는 작품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못하면서 극에 달했던 관심은 서서히 사그라진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한류가 죽었다며 근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둥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지만 이는 단순하게 현상만을 바라본 것에 불과하였다. 타자에 있어 한국문화의 인식은 그들의 기호에 따라 하나하나 수용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인식은 ‘막걸리’였다. 한국 내에서도 잊힌 존재였던 막걸리는 <겨울연가>가 그러하였듯 일본인들이 새롭게 부각되었고, 우리에게도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선정한 10대 히트상품의 첫 번째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2010년 즈음부터 아시아에 머물던 한류는 문화 넘어섬을 거듭하며 전 세계적인 확산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로 걸그룹, 보이그룹의 열풍을 들 수 있다. 이들의 확산 현상은 인터넷, 유튜브 등에 힘입은 바가 크며 또한 Well-made 잘 만들어진 상품으로 기획된 제품 그리고 한국 내 탄탄한 토대가 그대로 외국에서도 수용된 문화콘텐츠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한국문화가 일부 계층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시공간을 함께 공유하며 인식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현상을 다시 되뇌지 않더라도 이러한 문화경계 넘어섬의 여러 가치체계는 한국문화를 빠르게 알리는데 기호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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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이 강남스타일의 유튜브 20억 조회수를 기록하며 만든 일러스트. 미국 및 글로벌 시장을 제패했던 싸이는 한국 가수 중 세계 가요시장에서 역대 최고의 인지도를 자랑한다. /사진=YG엔터테인먼트 제공 |
한류는 광복 이후 70년 동안 한국을 확실하게 타자를 인식시키는 상품으로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다. 이는 무형이나 유형의 가치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한류의 바탕은 대중문화였다. 그러다 보니 대중문화의 속성대로 부침도 있었고, 의도된 전략에 의한 경우는 실패하기도 하고, 의도치 않은 경우에서 사랑을 받은 경우도 등장하였다. 이는 너무 성급하게 경제적 이익만을 쫓을 경우 실패할 수 있으며 국내에서 탄탄한 지지를 얻지 못하면 결국 다른 나라에서도 호응을 얻기 힘들다는 기본에서 출발하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이러한 점을 극복하며 새로운 한류를 위해 몇 가지 기본적인 점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한국을 기억할 뚜렷한 브랜드이미지가 필요하다. 그동안 한류라는 이름으로 여러 의미체계가 한국을 인식시키고 있었지만 어찌 보면 모두 추상적인 면모였다. 일본하면 무엇, 영국하면 무엇이라는 확실한 이미지가 문화 확산의 동력이 되었던데 반해 우리의 경우는 부가가치의 파생적 이미지가 약하다보니 한국 문화 전반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이러한 요소를 이끌 문화상징의 개발과 투자는 가장 먼저 생각할 문제이다.
또한 이러한 요소를 찾아내기 위한 바탕은 결국 문화원형적 요소, 혹은 민속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층문화의 삶 속에 드러나는 여러 요소들, 설화, 의식주, 신앙 등은 한국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보여주며 문화콘텐츠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이야기는 21 세기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등은 모두 신화적 요소에서 출발하고 있고, 게임의 바탕은 서사구조에서 비롯된다. 스토리텔링은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다시 재생산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재인식은 다시금 한류의 바탕이 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음식은 단순하게 먹거리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이는 한 나라의 여러 상징적 코드가 들어있는 문화체계이다. 그렇기에 일상의 가장 기본인 음식문화의 재인식은 한국문화의 보편적 인식을 가지게 하는 기재로 다가서는 그 첫 번째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백범 김구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결국 세계인으로 존경받는 것은 문화의 힘이며 이를 전승하고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임을 한류를 통해 다시 한 번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김호연 단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