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갑진년(甲辰年)을 대표하는 동물 용은 12간지 중에서 유일하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생물이다. 올해 한국 경제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상징으로 다가온다. 2024년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경제는 승천의 기쁨을 누릴 수도 있지만, 나쁜 선택을 할 경우 연초의 모든 희망은 한낱 가상의 꿈으로 흩어져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올해 전체를 조망해 보면 상‧하반기에 각각 거대한 불확실성이 자리 잡고 있다. 4월의 한국 총선과 11월의 미국 대선이다. 두 가지 정치 이벤트는 올해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확실한 불확실성(certain uncertainty)’이다. 어느 쪽으로 진행될지 아직은 감조차 잡을 수 없지만, 뭔가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선거 전까지 매복돼 있던 문제들이 개표 결과와 함께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올 한 해의 경제 변동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클 것으로 전망된다. 블룸버그 산하 연구기관인 블룸버그 이코노믹스 역시 1일(현지시간) 내놓은 보고서에서 "전쟁, 선거, 경제 경착륙 등 위험 요인이 많아 예상치 못한 위기가 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디어펜은 금융·건설·산업 등 분야별로 한국경제를 진단해 본다. [편집자주]
[기업이 대한민국이다-건설]부동산 PF 위기 해결책 시급
[미디어펜=성동규 기자]국내 시공능력평가 순위 16위인 태영건설이 지난해 말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을 신청했다. 최근 몇 년간 공격적인 수주 활동을 통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관련 우발채무가 급격하게 증가한 영향이 컸다.
PF 대출 관련 우발채무는 통상 건설사가 시행사의 대출금에 지급보증(연대보증, 자금보충, 채무인수) 등을 서준 경우를 의미한다. 부동산 경기가 한창 활황일 당시에는 큰 문제가 될 게 없었겠지만 2021년 하반기 이후 침체기에 들어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시행사가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면서 PF 대출 관련 우발채무가 결국 태영건설이 갚아야 할 빚으로 돌아왔다. 이런 기형적인 구조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제2, 제3의 태영건설 사태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해결책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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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부동산 침체 때마다 PF 대출 부실 위기 반복
현재의 사태가 묘한 기시감을 주는 건 이유가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경기가 침체했을 당시와 똑같은 일들이 연출되고 있어서다. 사업 위험성이 높아지자 금리가 상승했고 이에 따른 수익성 악화로 사업이 지지부진해지면서 PF 대출이 곳곳에서 연체됐다.
2011년이 되자 곪았던 문제가 터졌다. 전체 금융권의 PF 대출 연체율이 10%를 웃도는 등 위험 신호가 켜졌다. 대부분의 PF 대출이 저축은행에서 이뤄졌나 보니 금융당국은 서둘러 조치에 나섰다. 저축은행별 총 여신에서 PF 대출 비율을 25% 이하로 낮출 것을 요구했다.
저축은행들은 이에 따라 건설사를 상대로 대출 회수나 추가 담보물 확보에 나섰다. 이는 LIG건설과 삼부토건, 동일하이빌, 진흥, 월드건설, 임광토건 등이 차례차례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100대 건설사 중 총 24개 건설사가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가야 했다.
파장은 저축은행 부실로도 이어져 31곳의 저축은행이 문을 닫았다. 10만명이 넘는 피해자가 발생했고 이들이 보상받지 못한 피해금액은 1조3703억원에 달한다. 예금보험공사는 저축은행 구조조정에 27조원을 투입했지만 2022년 말 기준 8조5000억원을 여전히 회수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흘러가는 양상이 비슷하다. 부동산 경기침체와 함께 원자잿값 급등이라는 변수가 더해져 건설업계의 목을 더욱 옥좼다. 설상가상으로 2022년 말 '레고랜드' 사태를 분기점으로 PF 대출 금리는 5~6%에서 10~18%까지 치솟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낙관적인 부동산 경기 전망과 금리 인하 기대 영향으로 금융기관들은 그동안 PF 대출 만기를 연장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 들어 PF 부실 위기감이 다시 고조되자 금융기관들이 이른바 '옥석 가리기' 기조로 선회했다.
PF 대출로 유동성 문제를 겪고 있던 태영건설이 첫 표적이 됐다. 태영건설이 추진하던 서울 성수동 오피스 개발 사업장의 대주단인 KB증권, NH농협캐피탈, 키움저축은행은 지난달 28일 만기가 돌아온 432억원 규모의 PF 대출 만기 연장을 거부했다.
시장에서 워크아웃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자 채권을 회수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용평가사에서는 만기연장으로 그동안 버텨온 PF 대출 중 15조원 가량이 올해 최종 손실 처리될 것이라는 전망치를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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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한 건설 현장 전경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한국에서만 PF 대출 때 건설사 신용 의존
건설업계에 위기감이 확산하고 있다. 특히 중견 건설사가 문제다. PF 대출을 일으켜야 하는 분양사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고 주로 수도권 외곽이나 지방 사업장이 많아 사업의 질이 좋지 않아서다.
대형건설사와 달리 그룹의 자금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데다 신용등급도 낮아 금융권의 자금 대체 능력이 부족하다. 우발채무 부실이 현실화된 가능성이 크지만 실제로 현실화됐을 때 버틸 수 있는 여력은 낮은 셈이다.
2011년 건설사 줄도산이 올해 재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있다. 부동산 시장 침체는 세계적인 현상인데 한국에서만 유독 PF 부실 문제가 불거지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것이다.
PF 대출은 크게 '브릿지론'과 '본PF'로 나뉜다. 착공 전 토지를 매입하는 등 초기 단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이 브릿지론이다. 대다수 시행사는 토지매입 등에 필요한 큰돈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현재 부동산개발업체(시행사)는 자본금 3억원만 있으면 설립할 수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사업의 위험성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보니 대출 자체가 어렵고 금리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런 탓에 브릿지론 단계에서 건설사는 연대보증, 채무보증, 매입확약, 이자지급보증, 자금보충약정 등 신용보강에 들어간다. 대신 추후 시공계약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브릿지론에서 본PF로 넘어갈 때도 건설사는 필수적으로 책임준공(채무인수) 약정을 제공한다.
금융기관들이 본PF 대출을 실행하면 시행사는 그 돈으로 브리지론을 상환하고 일부를 건설사에 공사비로 지급한다. 당연하게도 공사비가 부족한데 이를 수분양자들의 중도금으로 충당한다. 분양이 완료될 때까지 돈을 돌려막는 형국이다.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미분양 대거 발생한다면 건설사는 시행사의 채무를 이행해야 한다. 이처럼 건설사가 거의 모든 책임을 떠안는 PF 대출 구조는 한국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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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여의도의 한 건설 현장 전경./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 선진국형 PF 대출 구조로 개선 절실
현재 금융당국에선 '건설업과 부동산 PF 시장의 연착륙'을 한국은행은 '부실 PF 사업장의 질서 있는 정리 유도'를 언급하고 있다. 정상 사업장엔 금융을 원활하게 공급하고 부실사업장은 정상화하거나 경·공매 등을 통해 재구조화하면서 PF를 정리해가야 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당장의 문제를 덮기 위해 미봉책에 불과해 보인다. 근본적인 대책 없이는 향후 부동산 경치 침체가 또다시 찾아 왔을 때 큰 혼란이 불가피하다. 이 때문에 선진국형 PF 대출 구조로 개선해 건설사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위해선 먼저 시행사의 자본 요건 강화와 부동산 개발 초기 단계에 다양한 재무적 투자자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유인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 이렇게 되면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고 시행사는 전체 개발비의 20~30% 수준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미국과 일본 등은 사모펀드, 개인투자조합, 연기금, 리츠(REITs) 등의 부동산 투자가 활발하다. 자본력이 충분한 시행사와 다양한 투자자는 함께 유한책임회사(LLC), 프로젝트금융회사(PFV) 등을 설립해 충분한 초기 투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금융시장이 잘 발달해 있다.
일본의 시행사인 모리빌딩은 도쿄를 대표하는 복합상업시설인 '롯폰기힐스'의 총사업비 약 2700억엔(2조4600억원) 중 37%에 해당하는 약 1000억엔(9조원)을 직접 출자할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나머지는 투자자들로부터 자본을 조달해 토지를 사들였다.
PF 대출 공사에 필요한 만큼만 일으키면 됐다. 한국과 달리 절대로 수분양자의 자금은 공사비에 사용되지 않는다. 수분양자는 중도금 없이 부동산가의 5~10%인 계약금만 내고 이는 제3기관에 예치된다.
시행사는 선분양비율과 수분양자 계약금을 담보권으로 PF 대출 이자율을 낮추는 용도로만 활용한다. 건설사의 신용이 아닌 오로지 사업성에 기반을 둔 PF 대출이 가능해지려면 우리 금융기관의 사업성 검토 기준이 지금보다 훨씬 고도화될 필요성이 있다.
금융기관에서 입지 분석은 물론이고 현금 흐름 타당성, 시행사의 사업수행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PF 대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변화는 PF 대출 정책 관련 결정권을 쥐고 있는 금융당국의 적극적인 의지가 있다면 실현 가능한 일이다.
[미디어펜=성동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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