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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문화평론가 |
분명 신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누가 그걸 부인하랴? 재단법인 ‘통일과나눔’에 주식 등 2000억 원의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밝힌 이준용(77) 대림산업 명예회장 얘기 말이다. 조선일보는 이 스토리를 8월18일자 1면 머리기사로 올린데 이어 다음 날 2, 3면 전체를 다시 할애했다.
신문 한 면을 꽉 채운 전단(全段) 제목도 감동이다. “‘우리도 이런 기업인 있다니’… 2000억 기부, 한국사회를 깨우다”. 이 기사엔 이른바 ‘이준용 기부 쇼크’가 재계는 물론 우리나라의 기부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란 각계의 찬사로 가득하다.
그날 이 신문 사설의 강조대로 대기업 총수 중 공익사업에 전 재산을 내놓은 건 분명 드문 사례다. 더 큰 액수를 기부한 재벌총수가 몇 명 있었으나 그때그때의 비판적 여론을 잠재우려는 카드란 인상이 없지 않았다. 이번의 경우 완전히 자발적이었다. 또 장학재단 등을 설립하는 관행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신선했다.
‘이준용 쇼크’에 모두 동의할 수 없는 이유 두 개
당연히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말도 등장했는데, 새삼 이 명예회장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필자가 이런 덕담의 홍수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다.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첫째 왜 우린 사적이윤의 영역을 그렇게 긍정하지 못하는가? 그걸 좀 따져봐야 한다. 냉정하게 말해 한국사회엔 암묵적으로 부자의 재산헌납을 강요하는 집단심리가 없지 않다. 정당한 기업이윤조차 긍정하지 않으려는 완강한 태도다. 그 배경에는 그렇게 축적한 재산이 온전히 당신만의 것이냐? 그걸 인정 못하겠는 식이다.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 때 유난스레 언론이 호들갑을 떨던 배경에도 그런 집단심리가 작용했는데, 이젠 이걸 돌파해야 할 때다. 명분 좋은 기업가 정신을 찬양하는 것은 좋은데 왜 당신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가를 누군가가 따져물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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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항공과 롯데그룹 문제에 끼어들어 도덕의 이름 아래 재벌 때리기의 굿판을 벌이던 언론과 한국인들은 바로 뒤돌아서서 대림의 기부행위엔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대한항공-롯데 백안시와, 대림에 대한 열광이란 똑같은 구조의 집단심리에서 나온다. 즉 바탕에 깔린 사익과 기업이윤에 대한 부정심리가 문제다. 사진은 2000억 원을 기부한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 /사진=연합뉴스 |
쉬운 얘기다. 기업가정신이고 뭐고 내 돈을 모은다는 사익(私益)추구의 가능성이 보장될 때라야 사람들은 판에 뛰어든다. 이 보장이 없는데, 누가 애써 기업을 하고 돈을 모으랴? 재산 헌납을 강요하는 사회분위기란 근대적 의미의 재산권을 흔드는 위험요인이기도 하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다분히 위선적인 한국인들은 사익의 가치를 애써 부정하면서 사업보국-사회기여의 거룩한 구호를 외치는 걸 즐긴다. 경제학자 좌승희 박사의 말처럼 “시장은 자기 욕심에서 출발한다”는 명제를 애써 외면하는 표리부동이다. 이걸 정확하게 이해한 미디어펜 김규태 기자는 최근 기사에서 이렇게 지적했는데 이게 핵심이다.
“롯데가(家) 신동빈 신동주 형제의 갈등은 애초부터 사적인 영역에서 개인들끼리의 다툼이었다. 주변 어디에서나 보는 상속유산을 둘러싼 분쟁과 다를 바 없지만, 이를 대하는 세상의 시선은 따가웠다.…주주가 배당금을 얼마 받는지는 대주주들이 결정하는 사적인 영역이다. 이에 대해 손가락질한다는 것은 주식제도를 부정하는 행위다.”
대한항공과 롯데그룹 문제에 끼어들어 도덕의 이름 아래 재벌 때리기의 굿판을 벌이던 언론과 한국인들은 바로 뒤돌아서서 대림의 기부행위엔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대한항공-롯데 백안시와, 대림에 대한 열광이란 필자의 눈엔 똑같은 구조의 집단심리에서 나온다. 즉 바탕에 깔린 사익과 기업이윤에 대한 부정심리가 문제다.
대한항공-롯데 백안시와, 대림에 박수 치는 집단심리
바로 그게 이 나라 경제의 뒷다리 잡고 있다. 사익(私益)과 기업이윤을 마구 때리고, 그런 걸 억제하는 정책이 정의롭고 공익적이라는 집단적 착각으로 실로 심각하다. 상생, 동반성장, 경제민주화 구호를 외치는 건 그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이준용처럼’을 외치는 게 압도적인 사회에서 누가 애써 기업활동을 하고, 부를 축적하려 할까?‘이준용처럼’을 반복하면 이 나라 기부문화가 바뀔 것이라는 한가한 진단이란 우리가 당면한 사안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책상물림의 말참견일 뿐이다.
이준용 명예회장의 기부 선행이 아름답고 감동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두 번째 이유는 과연 그렇게 한다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통이 절로 만들어질까라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렇게 간단할 리 없다. 역사적 성찰이 우선이다.
상식이지만 우리 한국인은 역사실패로 점철된 19세기의 망국에 이어 해방을 맞았고, 얼떨결에 근대화 산업화에 성공했다. 전혀 다른 사회질서가 깨진 뒤 정반대의 원리를 가진 자본주의 사회의 복판에 자의반 타의반 뛰어든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린 옛 시절의 주자학적 사대부 윤리를 버린 채 ‘자본주의와의 파우스트적 거래’를 이미 마쳤다.
20세기 한국인은‘자본주의와 파우스트적 거래’를 마쳤다
거래는 놀랍도록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성공한 대한민국으로 벌떡 일어섰다. 그랬으면 이 파우스트적 거래의 새로운 가치를 인정해야 옳다. 지금 우린 정반대다. 마음은 하늘의 뜻(天命)과 사람다움을 향한 도덕적 목표 아래 안정된 공동체를 전제로 한 조선조 사회를 벗지 못한다. 그래서 몸 따로 마음 따로의 구조다.
이런 형편에서 이 나라 언론과 식자층에서 서양 근대 전후 피렌체 가문 등 특권층의 덕성만을 반복해 강조하는 것은 너무 공허한 게 아닐까?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 ‘헬조선(지옥 한국)’이라는 신조어가 공감을 얻고 있다. ‘탈(脫)조선’이라는 말로 이민을 꿈꾸기도 하고, “죽창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섬뜩한 구호도 등장하는데, 이게 참담한 우리네 현실임을 각성해야 한다.
때문에 항구적 위기를 반복하고 있는 한국사회를 위한 처방과 사회적 합의를 생각해야 한다. 사실 서구 선진국이 근대적 산업화에 성공해 날아오르는 데 걸리는 기간은 천차만별이다. 영국은 장장 131년이 걸렸다. 산업혁명이 막 시작됐던 1783년에서 1914년까지다.
상대적인 후발국인 프랑스는 84년(1830~1914), 독일은 74년(1840~1914), 일본은 72년(1880~1952)이 걸렸다. 서구 열강들에 한참 뒤친 1960년대에 출발했던 우리는 20년 만에 이륙에 성공했다. 아무리 길게 봐야 반세기 전후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과 재벌에 대한 신뢰가 높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다.
이런 우리만의 특수한 경험에 어떻게 하면 진정 의미있는 내용물을 채워넣을 수 있을까? 대림 이준용 명예회장의 미담이란 부의 축적과 사회적 기여라는 논의의 첫 장을 연 것인지도 모른다. 부자들 돈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게 능사가 아니고, 마음에도 없는 박수를 보내는 걸로 자기책임 다하는 게 아니라는 지적을 새삼 전한다. /조우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