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80)-우리 곁에 온 스승 소크라테스의 교육 철학
플라톤(기원전 427~347년)의 <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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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우리는 무엇 하나라도 남보다 뛰어나길 원한다.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경우 이러한 사회적 요구로부터 받는 심리적 압박이 더욱 심할 터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남보다 탁월해지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당장의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는 청년들에게 이런 근원적 질문을 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든 사회적 관계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싶은 것은 인간 본연의 속성이다. 특히 사회적 활동이 왕성한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자연히,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자신만의 탁월한 재주를 열망한다. 개인적 탁월함은 여러 영역에서 추구될 수 있을 것이다. 신체적 우월함과 재능의 우수함, 지식과 덕성의 뛰어남도 한 예다. 아무튼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욕망은 개인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는 동시에 사회적 활력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를 꽃피우던 기원전 5세기 그리스는 탁월성을 추구하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제공했다. 탁월함 또는 덕성을 뜻하는 아레테(Arete)는 그리스 문명을 읽는 핵심 키워드다. 아레테는 고대 그리스 사회를 관통하는 가치 관념이었던 것이다.
아테네의 황금 시기에 정치적 참여의 문호가 모든 시민들에게 개방되면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은 사람들이 급증했다. 장군을 제외한 아테네 시민은 누구나 추첨에 의해 관직을 맡아야 했고, 민회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또 시민 법정에서는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아테네의 시민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토론과 비판, 설득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수요가 증대되었다.
따라서 저마다 탁월한 교사를 자칭하는 소피스트(sophistes)들이 양산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소피스트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많아지면서 소피스트들의 질적 저하도 가져왔다. 얄팍한 지식으로 대중을 현혹하는 소피스트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단지 상대를 이기기 위한 반박의 논리를 가르치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사회적 불신과 적대감도 적지 않게 형성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나쁜 교육자로 고발되어 사형을 당하게 된 것도 이런 사회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소피스트들에 대한 사회적 불신의 불똥이 소크라테스와 같은 참된 지식을 추구하던 지식인들에게 튀었던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한 저작을 여러 편 남긴다. <메논(Menon)>도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다. <메논>은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사상적으로 의존하던 시기인 청년기에 씌어져 ‘소크라테스적’ 대화편으로 불린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와 테살리아의 젊은 귀족인 메논의 대화를 통해 ‘탁월함(Aarete)’이 어떻게 획득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그는 메논과 소크라테스가 대화하는 방식을 통해 소피스트적 견해와 소크라테스의 사상적 차별성을 뚜렷하게 대비시킨다. 따라서 <메논>은 소크라테스가 시중의 소피스트와 어떻게 다른지, 진정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어떠한 지혜를 지녔는지를 식별하게 하려는, 플라톤의 스승에 대한 신원(伸寃)적 변론의 성격을 띤다.
메논이 제기한 화두는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이다. 메논의 단도직입적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세 단계에 걸쳐 문답법(dialektike)을 통해 탐구를 진행한다. 먼저 탁월함과 가르침의 본질을 규명한다. 그런 다음에 두 개념, 즉 탁월함과 배움/가르침의 결합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검토했다.
메논이 ‘정의는 탁월함이다’라고 언급하자, 소크라테스는 탁월함 자체와 탁월함의 일종을 구별하고, ‘정의’는 탁월함의 일종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메논이 탁월함을 ‘훌륭한 것들을 욕구하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자, 소크라테스는 나쁜 것들을 욕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정의롭고 경건하게 좋은 것들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재규정한다.
메논은 소크라테스와의 문답에서 패배한다. 이에 메논은 소크라테스의 비판적 검토를 상대방의 영혼과 입을 마비시키는 일종의 주술로 간주한다. 소크라테스를 ‘전기가오리’로 비유한 이유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논증이 그의 이성을 꼼짝 못하도록 마비시켰음을 자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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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의 좌상, 아테네 국립 학술원 앞에 있다. |
사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시험’, ‘검증’과 ‘반박’을 통한 인식 추구의 기술이다. 이는 곧 ‘합리적 검증과 비판적 검토의 기술’, 즉 ‘엘렝코스elenchos’다. 소크라테스의 문답을 통한 비판적 검토는 메논을 꼼짝 못하는 난관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아포리아(aporia), 즉 출구가 막힌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실상은 메논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해줌으로써 참된 앎을 여는 결정적 출구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의 그릇된 확신들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메논 스스로 탐구의 길을 열 수 있도록 돕는 ‘산파(産婆)’의 역할을 한 것이다.
‘배움’의 본질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영혼불멸과 영혼윤회 사상에 입각한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배움을 이승에서의 습득으로만 보지 않고 전생에서 배운 것의 상기(想起)로 규정한다. 이는 매우 독특한 관점이다. 그는 인간 지성의 원천을 당대의 실존적 차원을 넘어 과거에 존재했던 영혼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이 데리고 온 어린 노예를 통해 이를 증명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은 어린 노예에게 도형의 면적을 구하는 기하학 문제를 내고 풀어보도록 시킨다. 어린 노예는 간단하게 풀어낸다.
기하학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어떻게 그 문제를 풀 수 있었을까. 이는 배움 이전에 그 사람에게 내재해 있던 선험적 지식이 상기된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실험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배움이란 자신의 인식을 되찾는 과정, 즉 상기임을 입증한 것이다. 이는 탁월함이 일정 부분 본성적으로 타고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논증의 주제는 탁월함이 가르쳐 질 수 있는 것인가이다. 즉 탁월함과 가르침이 결합될 수 있는가의 여부다. 소크라테스는 일단 ‘탁월함이 인식(지식)이라면,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다’라는 가설을 인정한다.
하지만 ‘탁월함의 교사가 없다면,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없다’라는 전제를 건다.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배움의 대상이냐의 여부다. 하지만 탁월함이 배움의 대상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누구나 온전하게 탁월함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탁월함을 가르칠 교사 자신이 정작 탁월함을 갖추고 있는가의 문제다.
소크라테스는 배움을 통한 탁월함의 습득 여하는 필연적으로 탁월함의 교사가 존재하는가 여부에 달려있다고 본 것이다. 그가 이런 전제를 단 이유는 당대 아테네 사회를 풍미하던 소피스트들에 대한 불신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탁월함의 교사라고 자처하던 당대의 소피스트들은 참된 의미의 탁월함의 교사는 아니라고 보았다. 당시 아테네에는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아뮈토스 등 이름난 소피스트들이 활동했다. 아테네 청년들은 탁월한 재주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 이들 소피스트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몰려들었다.
아테네 청년들이 탁월해지기 위해서는 탁월한 선생들에게서 배워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사회적 수요를 간파한 소피스트들은 저마다 탁월함의 교사를 자처하면서, 교육의 대가로 돈을 받는 직업적 교사 역할을 했다. 메논 역시 말을 잘하게 만드는 설득의 수사학자로 자처했던 고르기아스의 제자였다.
결국 메논과 소크라테스의 대담은 곧 통속적 소피스트와 참된 철학자 간의 대결적 양상이 된 것이다. 플라톤은 이를 통해 소피스트적 관점과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 같다. 아무튼 소크라테스가 ‘탁월함의 교사가 없다면,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없다’라고 주장한 것은 당시 그리스 사회에 넘쳐나던 소피스트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경멸과 신랄한 풍자를 담고 있는 셈이다.
소피스트들은 분명 소크라테스가 상정하는 탁월한 교사는 아니었다. 진정 탁월한 교사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의 영혼에 잠재한 인식을 상기시키는 능력까지 갖춘 사람이어야 할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무지하다고 자처했기 때문에 자신 역시 탁월함을 갖춘 영혼의 교사라고 여기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만 스스로 모르고 있었을 뿐, 우리는 그가 우리 곁에 온 탁월한 영혼의 교사였음을 기억한다.
탁월함을 갖춘 교사가 없는 세상에서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없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탁월하다고 이름난 사람들은 누구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받아 탁월함을 갖추게 된 것일까? 탁월함의 교사가 없어 탁월함이 가르침을 통해 생겨 날 수 없다면, 그들이 탁월하게 던 데에는 가르쳐질 수 있는 것 이외에 무엇인가 다른 요소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탁월함을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로 ‘참된 확신’이 제기된다.
아테네 전성기에는 한 때 탁월하다고 일컬어지는 많은 정치가들이 있었다. 정치가들은 지성 없이도 많은 큰일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식견과 통찰을 갖춘 페리클레스가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페리클레스 이후 등장한 정치가들은 대부분 지식과 식견이 부족한 선동가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자기 확신 속에서 ‘참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말하곤 했다. 이들의 예를 본다면 탁월함이 마치 지성 없이 신적인 섭리에 의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자기 확신만으로도 탁월함을 갖출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정치가들은 신탁을 말하는 사람, 예언자들처럼 주로 영감에 의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소크라테스는 지성적 인식이 겸비되지 않은 정치가들을 그들의 정치적 성공만을 기준으로 탁월함의 진정한 교사로 인정할 수는 없다는 암시를 내비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탁월함의 교사라고 공언하는 소피스트도, 보수적 성향의 민주파 정치가 아뉘토스가 주장한 훌륭하고 뛰어난 정치가도, 모두 탁월함의 교사로서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탁월한 지성과 참된 확신을 갖춘 탁월한 교사, 영혼의 상기를 불러일으킬 영혼의 교사가 없는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아테네가 기원전 4세기 들어 급격하게 쇠락하게 된 것도 이러한 참된 스승이 없어 탁월한 청년들을 길러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이와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다. 여러 분야에서 멘토를 자처하는 탁월함의 교사들이 넘치지만 ‘지혜의 가뭄’은 여전하다. 청년들을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탁월한 인재로 길러내기 위해서는 탁월한 교사가 필요하다. 이는 강단의 교사와 교육체계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탁월하다고 자처하는 기성세대들은 스스로 미래 세대들을 가르치는 탁월함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성과 철학이 결여된 채 자기 확신에 가득차서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정치가들의 오만한 탁월함만 넘친다. 게다가 탁월한 스승으로 자처하는 전문가들이 각 분야의 기득권을 독점하고 사회의 교사로서의 책무는 방기한 채 사회 여론을 호도하기도 한다. 시민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진정한 스승은 드물다. 진정한 탁월함이 과연 무엇인지, 진정한 스승의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 집요하게 ‘엘렝코스elenchos’를 추구하던 소크라테스의 혜안이 더욱 그립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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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도서: 『메론』, 플라톤 지음, 이상인 옮김, 이제이북스(2009), 20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