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의 고민과 손 내민 중국의 복잡한 속내 제대로 읽어야

   
▲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
가야 한다, 가지 말아야 한다, 갑론을박 상반된 주장 속에 결행된 박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가. 거의 모든 언론은 시진핑 주석의 극진한 한국 대통령 환대에 열광했다. 그와 동시에 미-중-일 사이에 끼인 한국이 외교적으로 진일보한 선택과 전략으로 이만한 대접을 받는 것 인양 보도하기에 바빴다. 냉정히 되돌아 보자. 과연 한국이 잘해서인가?

한마디로 '어부지리'성 반사이익을 낚아챈 공이 크다. (물론, 이런 타이밍을 포착하는 것이 전략적 역량이라고 한다면 부정은 안하겠다.) 만약 북한이 '나 홀로 뻘 짓'으로 중국의 미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일본이 '오로지 미국과 함께'라는 외곬 전략을 버리고 한국의 반(半)만큼이라도 미국 주도 외교를 탈피, 동북아에서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더라도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이만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중국의 유례없는 '친한(親韓)환대' 이면엔 역사적으로 자리잡은 중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 작용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장 중국의 외교목표가 전세계를 주름잡는 G1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태평양에서, 그 태평양의 패권을 차지하는 동북아 공간에서 '도전자 없는' 골목대장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거다. 중국의 이런 위상과 기대에 방점을 찍어준 상징적 사건(!)이 박대통령의 방중이다. 그런데 어찌 대접이 소홀할 수 있겠는가.

   
▲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일 오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서대청에서 오찬을 하며 대화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일본이나 미국의 관점에서는 이런 한국의 외교적 선택이 ‘친중행보’로만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과 일본에 되물어야 할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대들 미국이나 일본은 한국에 어떤 '당근'을 제시했냐고 말이다. 정작 한국의 아픈 과거에 대해서 일본의 무례함은 변치 않으며 이런 일본을 두둔하는 미국의 진심은 뭐냐고 말이다.

실속없는 말의 논리로만 한국에 유〮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이제 구태가 됐다. 미국은 이 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확실히 외교적으로 몇 수 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미망에 쌓여있다. '언제까지 한국은 응석만 부리냐'는 오만함이 일본 주류 보수세력의 기저에 깔려 있다. 일본 우파야말로 이런 낡은 인식을 버려야 한다.

미국과 일본이 갖고 있는 기형적 인식틀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은 일부의 뚜렷한 반대논리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 어쩔 수 없이 쏠릴 수 밖에 없는 경제적, 상황적인 외적 요인들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이나 미국의 조야는 알아야 한다.

이것이 미-중-일에 둘러싸인 한국외교가 돌파해 나가야 할 교착상태의 현실이란 거다. 산케이식 망언이 여전히 통하는 이상 일본이 동북아에서 그 ‘국격’만큼 제대로 대접받기란 물 건너 간 일이다.

   
▲ 3일 오전 중국 베이징 톈안문광장에서 항일 전승 70주년 기념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그러나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외교역량을 발휘한 결과 이만한 대접을 받는다고 착각하지는 말자는 거다. 중국에게 북한은 당장은 '눈엣 가시'일지 모르나 '순망치한'으로 묘사되는 북중관계의 특수성을 한중관계라는 경제적 가치만으로 뛰어넘는 ‘임계점’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한국이 미국을 ‘내 편’으로 믿는 것 이상 북한과 중국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평상시에는 아무리 제 자식을 꾸짖고 옆 집 아이를 칭찬하는 부모라도 위기 시 말썽쟁이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없다. 북한을 향한 중국의 복잡한 속내가 이런 거다. 동북아 외교의 얼개와 구조가 한국의 외교적 입지에 준 무임승차적 지위는 상황가변적일 뿐이다.

16세기 베스트발렌 조약 이후 정착된 유럽식 협약외교와 신사협정에 기초한 고상한(?) 외교의 민낯은 우아한 외교적 수사에 있지 않고 힘(국력)의 크기에 비례했다. 군사력으로 포장된 폭력의 힘으로 의해 담보되지 않는 외교적 언어란 공허할 뿐이다.

한국이 이만한 대접을 받게 됐다고 한국주도의 북핵문제 해결,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 통일 등 한국이 희망하는 중국의 주도적 개입이 한국의 몇 마디 외교 수사만으로 이뤄질 거라 기대하는 사람은 이제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전승절 이벤트의 실체는 전에 없던 군사력의 과시에 있다. 실전투입 가능한 최신무기의 대대적 공개. 서방국가를 향한 엄포이자 동북아는 중국의 앞마당이라는 선언에 한국이 동참한 것이 그렇게 깔끔한 일은 아니다.

뒷맛 떨떠름한 불편함을 애써 무시하는 일은 현실을 외면한다는 징표다. 중국은 전승절이란 모호한 국가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일사분란하게 보여줬다. 민주국가였다면 이만한 연출에 훨씬 많은 사회적 비용이 소요됐을 것이다. 공산당 독재체제가 아니면 가능할 수 없다.

푸틴의 러시아만이 이런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것이다. 서방국가들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중국의 전승절이 중국만의 잔치라고 폄하할 수도 없다. 중국 입장에서야 서방국가들은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인 손님들이었다. 아니 올래야 올 수가 없다. 미국과 일본을 파시스트 국가라고 낙인찍은 행사에 미〮일은 갈 수 없는 거다.

   
▲ 박근혜 대통령이 3일 오후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 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주최 오찬 리셉션에 참석해 시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와 대화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서방 언론의 비판 또한 그것이 무엇이든 중국으로선 기대했던 바다. 이래나 저래나 중국이 전세계, 특히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 선진국들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단 하나, 태평양 앞바다는 자기네 거라는 무언의 시위이자 협박이다.

동북아의 이런 흐름에 승선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전승절 참석이었고 한국은 일단 올라타는 쪽으로 기선을 잡았다. 이를 통해 북핵을 해결하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선도하는 중견국이 되겠다는 각오도 작용했을 법 하다.

희망 섞인 목표와 외교적 선택의 끝은 여전히 동북아에서 당사자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의 행동에 달렸다. 북한이 핵 문제에 전향적으로 나오든, 고립적이고 자기집착적 반응으로 나오든 외부의 바램대로 개혁개방과 핵 포기의 수순에 들어설 리는 만무하다. 한중 관계 중심추의 변화를 결과적으로 북한이 도와주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어차피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외교 현실에서 현재 한국이 누리는 특수한 지위를 최대한 살리는 수 밖에 없다. 내키지 않아도 한국을 지지해줄 수 밖에 없는 미국, 분명 같은 진영이긴 한데 조금도 ‘코드’가 맞지 않는 일본.

이 둘을 대신하여 공통의 이해를 넓혀가자는 진짜 속을 알 수 없는 중국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만 할 수 없는 한국의 입장을 일본과 미국이 언제까지 수수방관할 것인가.

동북아 외교 퍼즐이 이례적이고 특이한 관전 포인트를 형성했다는 사실이 역사의 아이러니인 동시에 중국 전승절의 함의다.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