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정치판을 배회하고 있다. 정치공학이라는 힘있는 유령이.
현재 주요 3당은 당(黨)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로 분주하다. 이미 판세가 결정돼 코스워크(course-work)를 밟고 있는 민주당과 달리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소음으로 달아올랐다. 상호비방이 선을 넘어 전당대회장이 폭력에 노출되고 ‘너만은 절대 불가’라는 후보들의 입길에 “전당대회가 아닌 분당대회”라는 위기감이 분출한다.
그렇다고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가 열기를 넘어 폭염을 불러올 만큼 후보별 지지도가 박빙은 아니다. 여러 여론조사 결과가 말하듯 한동훈 후보가 원희룡, 나경원, 윤상현 후보보다 여론조사 오차범위를 넘어 앞선다. 일부 여론조사는 1차 투표에서 한 후보가 50%를 넘어서는 과반 득표를 예상하기도 한다. 현시점 한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세론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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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의힘 전당대회장에서 지지후보가 엇갈린 지지자들의 갈등이 폭력사태로 비화돼 여론의 비판을 사고 있다. |
정치가 민심을 독점하자 정치 루머의 중심인 여의도 골목길은 ‘김옥균 프로젝트’라는 루머성 정치공학이 등장했다. 한 후보의 당선을 막기는 역부족임을 인지한 국민의힘 주류가 ‘한동훈 당대표’ 당선 후 100일 내 고사시킨다는 내용이다. 구한말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았던 김옥균이 3일천하로 끝났던 것처럼 한 후보를 빠른 시간내 끌어내린다는 정치공학이 정교하다. 친윤(윤석열계) 좌장으로 알려 진 중진 국회의원과 친윤으로 정치권에 입문한 초선 의원의 콜라보레이션, 지렛대로 활용되는 총선백서 등이 씨실과 날실로 엮였다. ‘카더라 통신’과 달리 등장인물과 그 역할이 구체적이고 현 정치판의 민낯을 반영해 찌라시 보다 윗길인 학(學)을 달았다. 여기에 용산(대통령실)의 강한 부정이 없어 그 파괴력은 날로 더한다.
또 하나 정치권 방향타를 가늠할 정치공학은 야권에서 불을 지폈다. 당사자는 민주당의 그루이자 진영논리 생성자인 유시민 전 장관이다. 유 작가로 커밍아웃한 그가 6월 펴낸 저서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은 불과 한 달 만에 100만 부 판매를 넘어섰다. 유튜브 전성시대에도 종이책 판매량이 100만 부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종이책의 주장이 주요 어젠다로 자리매김했음을 입증한다. 제목에서 ‘그’는 윤석열 대통령이고,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했지만 ‘제2기 이재명 대표시대’를 맞이하는 민주당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유 작가의 논리가 민주당 내에서 소비되는 과정을 미루어 향후 민주당의 중론으로 자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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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나경원, 윤상현, 원희룡, 한동훈 후보(좌측부터)가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저서에서 유 작가는 윤석열 대통령의 안전한 퇴임을 제안한다. 현재 진행 중인 윤 대통령의 탄핵 움직임이 확실해진다면 “그가 자진 사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자”는 요지다. 이를 위해 미국식 ‘놀리 프로시콰이’(nolle prosequi, 항구적 불기소 특별사면) 도입을 주장한다. 우리 법체계상 사면권은 형 확정 후 시행되지만 ‘놀리 프로시콰이’는 아예 기소 자체를 차단하는 사면이어서 새로운 입법이 필요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온갖 의혹에 대해 윤 대통령이 법적 부담 없이 물러서도록 하자는 타협안이다.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같은 시민 혁명이 아니라 연성 혁명(soft-revolution)으로 여야 정치권뿐 아니라 진영으로 나뉜 국민 모두를 포용할 타개책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주체들의 동의에 의한 혁명은 헌법 체계를 수호하고 국회 절차와 재판과정에서 빚어지는 국론분열을 제거하는 방책으로 설명된다.
우선 여권은 터무니없는 전제로 인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입장이다. 탄핵을 전제로 한 어떠한 논의나 준비도 필요치 않다며 “유 작가의 주장은 교묘한 프로파간다”라고 치부한다. 헌법적 근거도, 정치적 당위성도 없는 탄핵을 도모하려는 저급한 정치공학이라고 경계한다.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 역시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유 작가의 저서가 100만 부 이상 판매되고 야권 오피니언 리더들의 어젠다로 논의되고 있지만 뚜렷한 입장표명은 늦어진다. 유 작가의 주장이 강력한 휘발성을 지니고 있어 헛스윙의 경우 총선 승리 이후 펼친 진법이 일거에 무너질까 고민이다. 무엇보다 이재명 전 대표의 사법리스크와 윤 대통령의 안전한 퇴진이라는 야합으로 투영될까 짐짓 외면 중이다.
‘김옥균 프로젝트’와 유시민 작가의 베스트셀러의 공통점은 양 진영 모두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조바심이다. 여권은 정권을 잡고 있음에도 총선 패배 이후 진로를 잡지 못한 채 선장마저 선주와 갈등 중이다. 당대표 가능성이 높은 한동훈 후보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밟고 일어선 ‘제2의 노태우’가 되면 최악이다.
민주당도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대통령의 거부권에 막혀 오히려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다. 이재명체제가 순항하지 못하고 좌초하거나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면 또다시 정권을 내줘야 한다는 위기감이 내심 껄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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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일 이재명 민주당 전 대표가 당대표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
또 하나 양측이 공감하는 터닝포인트이자 티핑포인트는 2026년 6월 3일 실시되는 전국동시지방선거다.
여의도 호사가들은 지방선거마저 여권이 패배하면 윤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친윤이 먼저 야권에 손을 내밀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니 2025년 하반기까지 현재 정치권의 판세가 여권에 유리하게 변화하지 않으면 좋은 옵션을 얻기 위한 친윤의 조기 결단이 있을 수 있다는 예측이다.
이재명 전 대표측 역시 야합이 아니라면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타협은 불감청(不敢請)이지만 고소원(固所願)이다. 조국이라는 대체재가 상시 대기하는 불안한 상황을 타개하는 덤도 있다.
이렇기에 ‘김옥균 프로젝트’는 찌라시가 아니고, 유 작가의 저서가 베스트셀러인 이유다. 정치권 유령은 힘이 있다.
미디어펜= 김진호 부사장 겸 주필
[미디어펜=김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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