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
[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 영화 하나를 보고 가자다. 영화의 무대도 오래 전이고 본지도 꽤 오래된 영화다.

안젤리나 졸리와 존 말코비치가 주연을 맡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을 맡은 영화 '체인질링(changeling)'이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건 2009년 1월이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1928년 미국 LA의 경찰은 최악의 부패 상태에서 철저히 권력화 돼 있었다. LA 경찰청장은 일체의 범죄에 대해 관용을 허락하지 않았고 즉결처분을 명령하면서 일선 경찰들에게 기관총을 지급했다. 그리고 실제 LA 거리에서는 재판도 없이 경찰의 기관총에 의해 총살당하는 젊은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에 이르렀고, 경찰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LA에서 전화회사 팀장으로 일하는 싱글맘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 분)는 9살 난 아들 월터를 유일한 희망으로 알고 열심히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생떼 같은 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몇 개월 후 LA 경찰청의 청소년 담당 반장인 존스는 크리스틴에게 월터를 찾았다고 전한다. 막강한 권력 탓에 언론으로부터는 별로 환대를 받지 못하던 LA 경찰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월터가 돌아오는 기차역엔 경찰청에서 부른 수많은 기자들이 취재 경쟁을 벌이고, 그런 가운데 크리스틴은 잃어버렸던 아들 월터와 상봉한다. 물론 이 자리엔 LA 경찰청장과 존스 반장이 함께 한다.

하지만 월터가 아니었다. 크리스틴은 존스 반장에게 월터가 아니라고 얘기한다. 당황한 존스 반장은 몇 개월이 지나 아이가 달라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는 금방 자라기 때문이라며. 일단 집에 데려 가서 지내다 보면 곧 잃어버렸던 아들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아이를 집에 데려온 크리스틴은 월터가 아니라는 확신과 증거를 가지게 된다. 이 아이는 진짜 월터보다도 3인치나 키가 작았고, 월터는 하지 않은 포경 수술을 했던 것이다. 치과 의사도 이를 입증해줬고, 월터의 담임교사도 “이 아이가 월터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우리 말 번역이 그랬다)”고 했다.

경찰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의사를 동원해 부모의 책임을 방기하려는 파렴치한 엄마로 몰자 크리스틴은 언론 앞에 직접 나선다. 그리고 LA 경찰에 대한 강력한 비판 세력이던 시민단체의 구스타프 브리그랩 목사(존 말코비치 분)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LA 경찰청에 불려갔다가 곧바로 LA 시립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된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하는 정신병자이고 위험한 인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 영화 '체인질링'의 한 장면


할리우드 거장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작과 연출을 맡았고, 마릴린 몬로 이후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여배우라는 안젤리나 졸리가 섹시함을 벗어버리고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부패한 경찰과 온몸으로 맞서는 싱글맘을 연기했다고 해서 당시 화제가 됐던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철저히 실화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1928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명 '와인빌 양계장 연쇄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그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월터 콜린스 실종 사건'이 영화의 배경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와인빌 양계장 연쇄 살인사건'보다는 그 시발인 '월터 콜린스 실종사건'을 영화의 소재로 삼았고, 그가 이 영화에서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1928년 당시 미국 경찰 권력의 무도함과 파렴치함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 소속인 제30대 캘빈 쿨리지였고, 그는 워런 하딩 정부의 부통령이었지만 하딩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미국 대통령에 오른 인물. 1927년 러시모어산에 큰얼굴 미국 대통령상을 만들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유명한 공화당원이었고 영화가 만들어지던 때는 아들 조지 부시가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절이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보기도 어렵고, 또 미국이 인권 국가로 완벽히 자리잡은 시기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강력한 미국을 추구하는 공화당 정권의 미국에서, 그것도 세번째로 큰 대도시인 LA(지금은 LA가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지만, 당시는 시카고에 이어 LA는 세번째 도시였다)에서 경찰의 권력이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영화다.

이 영화가 2009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의 후보일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LA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당시 LA는 연방 정부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대도시였고, 연방 정부의 손길이 잘 닿지 않았다. LA의 경찰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나 LA 시장만 용인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아마 미국 역사상 공권력에 의한 가장 참혹한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경찰을 견제할 수 있는 어떤 장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이든 검찰이든,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 기관은 견제가 없을 경우 무한대로 팽창하고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기관총을 들고 총질이야 할 수 없을지라도 경찰이 수사권을 남용하고, 검찰이 기소권을 남발한다면 이는 1928년 미국 LA에서 벌어지는 경찰의 총질 보다 덜 무섭지 않다. 그래서 철저한 견제가 있어야 한다. 견제를 넘어 통제도 이뤄져야 한다.

굳이 잘 만든 영화 한 편을 보면서 100년 가까이 흐른 지금 태평양 건너 대한민국에서 그 때 그 사람들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이슈가 있거나 이유가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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