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의 우남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이승만 친일프레임, 남남갈등 부추기는 좌파 전략”
[미디어펜=김규태기자] 자유경제원이 23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 종합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입을 모아 “우남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오늘에 기여한 건국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한 공은 전혀 무시된 채, 일부의 왜곡과 거짓 선동에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종합토론회는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에게 씌워진 7가지 누명에 대해 7인의 전문가가 나서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진실을 밝히는 자리였다. 자유경제원은 지난 5월 13일부터 9월 10일까지 7차에 걸쳐 이승만 관련 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승만은 6.25가 발발하자 국민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망쳤다는데?”를 주제로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은 “국가 원수가 적군이 코앞에 닥치고 체포되거나 사살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을 안전하게 모두 피신시킨 후 자신도 피신했어야 한다는 주장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다. 국가원수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국가의 안위와 정부의 연속성을 위해 긴급피난을 하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이승만은 기습남침을 당한 긴박한 상황에서도 전황을 직접 살폈고 미국과 유엔의 지원을 이끌어내었으며, 통일을 달성하는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대담한 구상을 하고 실행에 옮겨 최종적으로 대한민국을 지켜 낸 사람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승만은 독재자라던데?”라는 주제로 두 번째 발제를 맡은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은 “이승만은 1890년대부터 봉건주의와 투쟁하고, 1906년부터 군국주의와 투쟁하고, 1945년부터 공산 전체주의와 투쟁하며 한반도에 신생독립국과 개발도상국으로서는 갈 수 없는 수준의 민주주의체제를 만들어나간 혁명가다. 정치발전은 다른 모든 사회-경제-교육수준 등과 함께 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영역의 미성숙성은 당연한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다른 영역과 분리시켜 정치영역에서만 후진적이고 미성숙했다는 식의 평가란 비논리적 자체 모순이다. 오히려 이승만은 1940∼50년대 한국의 모든 사회경제적 수준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가장 앞서 나가며 탁월한 민주적 체제를 만들어 세운 지도자였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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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경제원이 23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 종합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입을 모아 “우남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오늘에 기여한 건국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한 공은 전혀 무시된 채, 일부의 왜곡과 거짓 선동에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사진=자유경제원 |
“이승만은 친일청산도 안하고 친일파를 비호했다는데?”라는 주제로 발제를 맡은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은 “해방 후 이승만을 친일 프레임으로 공격한 것은 박헌영과 공산당이다. 이승만이 공산당이 자기에게 부여한 인민공화국의 주석직 사퇴 선언을 하자 박헌영과 공산당들은 집요하게 이승만을 친일 프레임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북한 공산집단과 박헌영의 남로당 및 좌익들이 이승만을 친일 프레임으로 공격한 이유는 소련의 완벽한 괴뢰 역할을 했던 자신들의 행적을 은폐, 기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고도의 선전선동이었다”라고 밝혔다.
네 번째 발제 “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나?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이승만이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것은 이미 북한에서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가 틀을 잡았으며 남한까지 공산화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가운데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를 면하게 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독정부론을 제창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앞당겼다. 새로운 국가 건설은 자연발생적 과정이 아니라 지도자의 인위적 노력의 결과라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과 건국의 주역들의 역할을 설명하는데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다섯 번째 발표자로 나서 “이승만은 항일투쟁을 했나(무장투쟁 vs 이승만의 외교전략)”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맡은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진행된 독립운동 노선은 무장투쟁, 실력양성, 외교 독립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식민지 상황에서 외교에 의해 독립을 추구하는 노선은 언론, 출판, 대중 집회, 로비 등을 통해 세계 여론에 호소하여 한국의 독립이 필요함을 알리는 노력이다. 또한 해외에 진출한 한국 동포들을 교육하고 계몽하여 그러한 노력을 더욱 효율적으로 강화시키는 방안도 포함한다. 이승만은 이러한 노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일부에서는 이 노선을 두고 상대적으로 손쉬운 즉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은 비교적 안전한 노선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이 노선은 해외에 진출한 한민족 내부의 역량에 기초해 독립운동을 추구했던 만큼 무장투쟁 노선과는 달리 한민족 외부의 지원 내지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장점 그리고 실력양성 노선과는 달리 일제나 총독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장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승만을 ‘친일파’라고 왜곡하지만 이승만이 남긴 기록과 활동을 살펴보면 이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주장인지 쉽게 알게 된다. 이승만은 초지일관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또한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승만이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빌미는 건국 직후 진행된 친일청산 과정에서 반민특위 활동을 일부 견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 좌익세력의 남한 공산화 책동에 대응해야 하는 이승만의 입장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48년 새로 탄생한 국가의 건설을 주도해야 하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으로서는 이미 사라진 적 일본을 따랐던 ‘친일파’를 정리하는 일보다는, 새로 등장한 적 북한을 따르는 ‘공산세력’을 상대로 투쟁하는 일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승만은 집권 기간 동안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반일정책을 남겼다. 1952년 선포한 평화선을 통해 이승만이 독도에 대한 주권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라는데?”라는 주제로 발제를 맡은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은 “수 십 년 동안 미국 유학과 망명생활을 하면서, 미국이 저질렀던 배신행위와 기만, 그리고 무관심으로 이승만이 겪어야만 했던 쓰라린 체험들은 그로 하여금 맹목적 친미주의자가 아니라 미국의 정치와 외교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철저한 ‘지미(知美)주의자’로 만들었다. 나아가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희생이 다반사처럼 자행되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이승만은 초강대국인 미국이 지닌 힘과 영향력을 너무나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 생존의 확보를 위해 미국을 반드시 붙잡아야만 하는 ‘유일한’ 국가라고 믿었던 철저한 용미(用美)주의자였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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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경제원이 23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 종합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입을 모아 “우남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오늘에 기여한 건국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한 공은 전혀 무시된 채, 일부의 왜곡과 거짓 선동에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사진=자유경제원 |
마지막 발제자로 나서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데?”라는 주제로 발제를 맡은 조우석 문화평론가는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이승만이 3.15 정-부통령 선거라는 ‘악의 꽃’을 만들어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남에게 부정선거의 원흉이란 누명을 모두 뒤집어씌우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며, 우남을 악마화하려는 세력의 뒤집어씌우기 전략일 뿐이다. 3.15선거란 당과 내각 그리고 경무대 비서실의 합작이었다.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오히려 부정선거로 촉발된 학생시위 이후 스스로 하야한 그의 결정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라고 밝혔다.
이어진 토론회 자리에서 첫 번째 패널로 나선 김정수 KBS 정책기획본부 국장은 “이승만에 대한 생각은 그에 대해 왜곡되고,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 즉 50대 이하 486, 386은 물론 그 이후 세대까지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에 관한 다큐를 준비하면서 이승만은 몇 가지 사실로 옥죄어 놓고 평가를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일을 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는데 방송 후 4년이 지나도록 그에 대한 왜곡과 부정적 평가가 하나도 변한게 없어 아쉽다”라고 말했다.
두번째 토론자인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은 “공산주의 세력들이 이승만을 친일 프레임으로 공격한 것은 북한에 소련식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전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헌영이 친일 청산을 들고 나온 것은 친일 청산을 주장함으로써 남남 갈등을 부추겨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민족진영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토론자인 여명 한국대학생포럼 회장은 “2015년은 대한민국 역사에 기념비적인 해이다. 늘 어느 나라의 속국 혹은 식민지였던 한반도다. 반만년 역사상 유례없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기에 ‘해방 이후 70년’이 우리 국민들에게 주는 함의가 크다. 이승만은 미국조차 공산주의의 기만성과 폭력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 하던 때에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로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김일성의 야욕으로부터 이 땅의 자유를 지켜냈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