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이 23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 종합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입을 모아 “우남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오늘에 기여한 건국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한 공은 전혀 무시된 채, 일부의 왜곡과 거짓 선동에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자유경제원은 지난 5월 13일부터 9월 10일까지 7차에 걸쳐 이승만 관련 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다. 자유경제원이 23일 주최한 종합토론회는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에게 씌워진 7가지 누명에 대해 7인의 전문가가 나서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진실을 밝히는 자리였다. 아래 글은 주제발표자로 나선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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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이승만은 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나. 그는 분단의 원흉인가.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권력욕에 찌든 노인네가 단독정부 수립을 획책했다는 증거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실은 이전에도 같은 내용의 발언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아시다시피 6월 3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5월 8일, 이미 같은 요지의 발언을 던진 바 있다. 3만 여 명이 모인 목포 산수초등학교 연설에서 이승만은 남조선에 단독 정부를 세우는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이 발언이 문제가 되지 않은 이유는 당시 미소공위가 한참 진행 중이라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야야 할 것이다.” 죄송하지만 말씀을 좀 잘 못하셨다. 서두는 이렇게 꺼냈어야 했다. “늦었지만 이제 우리 남쪽도...”
무슨 얘기냐. 1946년 2월 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한다. 해방 후 겨우 반년이 지난 시점인데 이미 국가 기구를 만든 것이다. 이 기구는 얼마 안 가 이름에서 ‘임시’를 떼고 정식으로 활동하는데 남한보다 훨씬 빨리 헌법 논의를 시작했고 군대도 창립했다. 이 위원회는 북조선의 인민, 시회단체, 국가기관이 실행할 임시 법령을 제정하고 발포할 권한을 갖는다고 밝혔다. 토지개혁까지 강행하여 무상몰수를 했으니 사실상의 정부라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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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이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것은 이미 북한에서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가 틀을 잡았으며 남한까지 공산화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가운데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를 면하게 하겠다는 발상이었다./사진=연합뉴스 |
게다가 북쪽은 중국 국공 내전의 후방 병참기지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 이승만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하는 동안 이미 북쪽에서는 차근차근 정권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2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1차 회의에서 “지난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우리나라 력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중앙정권기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연설을 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사실상의 단독정권이었던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이어 1946년 11월에는 도ㆍ시ㆍ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으며 1947년 2월과 3월에는 리ㆍ면까지 인민위원회를 확장했다. 이를 기반으로 1947년 2월 국회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회의가 만들어졌으며 이 북조선인민회의는 행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정리하자면 북한에서는 남한에서의 단독 선거인 5월 10일 선거가 실시되기 1년 전에 이미 단독 선거를 실시하고 단독 국회를 구성하고 단독 정부를 만든 것이다. 뒤늦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을 두고도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모는 것은 한 쪽의 기록을 완전히 배제한, 말 그대로 악의적인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이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것은 이미 북한에서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가 틀을 잡았으며 남한까지 공산화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가운데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를 면하게 하겠다는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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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는 오랜 경험과 과정을 거쳐 발전하고 성숙된다. 민주주의는 제도 도입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런 사례도 없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에 대한 관습이나 사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대한민국에 민주주의체제를 만들어나갔다./사진=연합뉴스 |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국가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지도자의 역량을 ‘비르투(Virtu)’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 건설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지도자의 영웅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독정부론을 제창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앞당겼다. 새로운 국가 건설은 자연발생적 과정이 아니라 비르투에 입각한 지도자의 인위적 노력의 결과라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과 건국의 주역들의 역할을 설명하는데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