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84) 신념보다 공적 책임을 먼저 생각하라
막스 베버(1864~1920)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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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동체, 즉 국가를 구성하게 되며, 국가는 가정과 개인에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따라서 실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zoion politikon)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이렇듯 인간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가족을 넘어 사회공동체와의 연대 속에서 살 아야 하는 숙명적 존재다. 특히 공동체와의 다양한 관계망에 놓인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국가 공동체를 형성하고 운용해 내는 데 필요한 체제와 주체, 작동원리와 참여자 행위의 총체적인 양상은 바로 정치에 다름 아니다. 인류가 갖가지 형태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정치를 끊임없이 화두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에게도 정치적 결사체인 국가(Staat)를 누가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그리고 그 운용 주체들의 속성과 행태의 정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특히 그는 가장 중요한 행위 주체이자 참여자인 정치가와 관료의 속성과 기능에 대해 관심을 집중했다.
막스 베버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근대 국가의 지배 형태로서의 정치의 특성을 체계적으로 규명한 최초의 정치학자이자 사회학자다. 특히 그는 근대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대두된 새로운 직업 정치가와 전문 관료제, 그리고 정당체제가 발달하게 된 경위를 체계적으로 논의하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위자인 정치가의 속성을 분석하고 바람직한 자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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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베버 |
우선 막스 베버는 공동체를 지배하는 집단이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세 가지를 든다. 전통적 지배, 카리스마적 지배, 그리고 합법성에 의한 지배가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그가 주목하는 유형은 ‘카리스마’에 추종함으로써 성립되는 지배유형이다. 이 유형의 지도자는 봉건군주와 같은 신성화된 관습이나, 제정된 법규의 타당성과 합리적 절차에 따른 객관적 권한에 의지하기보다, 정치에 대한 가장 높은 차원의 표현인 소명(Beruf)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런 정치가에게 복종하는 것은 “전통이나 법규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이런 카리스마적 정치가에는 과거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나타났던 데마고그(demagogue, 선동가)의 유형과 근대 입헌 국가에서 출현한 정당 지도자 유형이 있다.
근대에 뚜렷해진 경향은 바로 카리스마적 지배를 꿈꾸는 직업 정치가들의 출현과 합법적 지배를 공고하게 뒷받침 해주는 이른바 직업 공무원으로 일컬어지는 전문 관료제의 등장이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경향이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나타난 곳이 독일이라고 본다. 독일에서는 근대 입헌 국가의 정치 지배 권력을 둘러싸고 군주와 지배 관료층이 상호 이해관계를 매개로 견고하게 결탁하여 의회 및 정치가들의 권력 추구에 대항했다. 의회 권력이 군주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었던 영국과는 상황이 크게 달랐다.
입헌제가 발전함에 따라 한 사람의 지도적인 정치가가 국내 정치를 포함한 정치 전반을 통일적으로 지휘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전문적 훈련을 받은 관료집단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관료 지배’ 현상이 심화됐다. 게다가 정당 조직이 커지면서 정당 내의 조직도 관료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결국 전문적 훈련을 받지 못한 정치가는 정당 관료들이 일상적 당무를 관장하고, 행정 관료들이 집행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관직을 차지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미국에서는 앤드루 잭슨에 의해 ‘엽관제’(spoils system)에 따라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이 전리품의 형태로 관직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관료에 의한 지배 현상이 강화되면서 정당정치가 위축되어 카리스마적 정치가의 배출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베버는 당시 대의기구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던 무기력한 독일 제국 의회의 상황을 간파하고 있다. 막스 베버가 당시 독일 정치가들이 권력도 없었고, 책임도 없어서, 단지 협소한 이익을 갖는 동종 직업 집단들인 ‘길드’적 파벌 본능에 빠져있었다고 질타한 이유다. 나아가 독일의 상황을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라고 자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독일의 정당들이 명사들의 길드에서 벗어나 관료 지배체제를 통제하고 정치적 책임을 감당해 주길 기대했다. 나아가 이를 구현해 줄 ‘직업 정치가’로서의 소명과 카리스마적 자질을 갖춘 정치가를 희구했던 것이다.
막스 베버가 희망한 ‘직업 정치가’의 바람직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정치가라는 직업은 우선 권력감을 제공한다.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에 대한 지배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과,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중대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자신이 일상의 존재들 위에 우뚝 서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따라서 직업 정치가는 자신이 누릴 권력감에 도취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감당해야 할 권력을 책임성 있게 수행해 낼 자질과 역량을 갖추었는지 자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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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들과 환담하는 막스 베버 |
막스 베버는 정치가에게 요구되는 세 가지 자질로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을 제시한다. 권력에 대한 야심과 허영심에 들뜬 ‘불모의 흥분 상태’가 아니라, 대의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객관성을 갖춘 책임성, 그리고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균형적 판단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세 가지 덕목은 비단 정치가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모든 공직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아울러 막스 베버는 정치가가 대의와 신념을 구현하기 위해 따라야 할 윤리적 기준을 제시했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가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윤리적 지향성을 갖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적 성격을 띤다. 신념 윤리를 중시하는 정치가는 자신이 지향하는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선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부작용의 개연성도 감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책임 윤리를 중시하는 정치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인식을 갖는다. 이 두 윤리의 추구가 만들어 내는 결과는 심연과 같은 깊은 차이가 있다.
막스 베버가 발굴해 낸 정치가의 윤리의 원칙은 현실 정치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정치는 항상 책임의 도덕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주변에서 신념 윤리를 따르는 사람이 그 결과가 어찌되든 자신의 순수한 정치적 이념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불법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현상을 자주 목격한다.
막스 베버는 신념 윤리가 야기하는 목적에 의한 수단의 정당화는 악마적 힘과 거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정치가는 선한 것이 악을 낳을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고 질타한다.
정치가가 책임 윤리를 갖추기 위해서는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그런 삶의 현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이 요구된다. 특히 정치가는 먼저 늘 결과에 대한 책임성을 진심으로 느끼며 행동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막스 베버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가 서로 절대적 대립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두 윤리가 균형적으로 결합될 때,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질 수 있는 참다운 정치가가 만들어진다.
막스 베버가 요청하는 참다운 정치가의 조건은 오늘날 정치인들이 늘 숙고해야 할 명제가 아닐까. 베버가 말했듯이 정치는 늘 ‘악마의 힘’이 작용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대의민주주의 아래서 민의를 대변해야 할 정치가에게 더 엄중한 정치적 이성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정치인이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을 갖추고 윤리적 역할을 자각할 때, 우리 정치와 공동체의 진화가 가능해진다. 100년 전에 막스 베버가 갈파한 정치가의 소명과 윤리 기준을 우리 직업 정치인들은 어느 정도 충족하고 있을까?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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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도서: 『직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나남(2007), 14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