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렬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됐다.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까지 탄핵을 부추길 정도로 ‘비상계엄 = 민주 파괴’라는 공식이 진리가 됐다. 마치 ‘착하게 살자’는 구호에 반대하면 착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 같아 두려운 것처럼, 민주 파괴라는 구호에 꼼짝하지 못하는 공포사회가 된 것이다. 경제적으로 선진국인 한국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이번 탄핵안의 주된 사유는 ‘민주 파괴’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알고 있지만, 이는 용어가 주는 착각이다.  ‘democracy’를 ‘민주주의’로 잘못 번역한 탓이다. ‘주의’는 사상을 의미하지만, democracy는 사상이 아닌 정치체제다. 

정치 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니 이름부터 ‘민주제도’라고 바로 잡아야 한다. 더군다나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이 민주제도는 절대 신이 아니다. 다수의 횡포가 염려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플라톤이 민주제도가 아닌 철인정치를 이상적인 정치 제도로 꼽은 것도 이 때문이다. 

   
▲ 지난 9일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풍패지관 앞에서 열린 '내란수괴 윤석열 탄핵! 내란공범 국민의힘 해체! 전북도민 촛불 대행진'에서 500여명의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기독교의 예수도 다수의 손을 들어주는 민주제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는가. 대통령 중심의 민주제도를 처음 실시한 미국의 3대 대통령 아담스 조차 “민주제도는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다수가 환각 속에 사로잡혀 행동하면, 민주제도로 인해 그 사회는 파괴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민주제도는 ‘가치’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가치는 ‘자유’다.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정치제도가 ‘민주제도’인 것이다. 자유라는 가치를 소중하게 지킬 때 민주제도의 역할이 가능하다. 반면 다수라는 행포로 자유를 침해하게 되면, 민주제도는 다수 독재자의 칼이 된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민주’를 중단하는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자유 가치가 침해됐을 땐 민주가 중단돼야 한다. 이는 헌법에도 명시돼 있다. 자유 파괴는 꼭 외부 침략만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오히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 윤 대통령 역시 그간 국회에서 일어난 무조건적인 반대와 묻지마 의사결정 행위가 국가의 자유질서를 침해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이런 인식 하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파괴된 자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본인에게 주어진 계엄이라는 권한을 사용한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윤 대통령의 행위가 ‘민주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인지하고, ‘비상계엄=민주 파괴’ 공식을 맹신하는 대중들에게 제대로 설득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윤 대통령은 순수하지만, 바보 같은 정치인이다. 

민주주의 파괴행동에 대한 제도권의 행동은 대중들보다 더 처참하다. 계엄을 실행한 군인 수뇌부들이 모두 구속됐다. 군인은 통치권자의 명령에 따르는 집단이지 가치를 판단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명령에 따라 행동한 군인을 구속한 것은 대중적 광풍에 법치주의가 굴복한 셈이다. 동시대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역사다.

대통령 권력과 국회 권력이 대치되면서, 그 판단은 헌법재판소로 넘어 갔다. 이제 차분히 법적 논리로 민주제도의 두 거봉들의 행동을 평가해야 한다. 사법부는 민주제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해야 할 때다. 우리 사법부에도 자유가치를 이해하고, 민주체제의 한계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매서운 판결’이 필요한 때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정치제제의 민주제도를 절대 맹신해선 안 된다. 민주제도는 제대로 활용하면 자유가치를 지키는 선한 제도가 되지만, 대중적 광풍에 편승하면 민주제도로 인해 그 국가는 망한다. 대한민국은 그 기로에 서 있다. /김민 개인자유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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