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방민준의 골프탐험(79)- 어깨가 가벼운 자가 승리한다

지구촌 골프팬들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인천 송도에서 나흘간 열린 2015 프레지던츠컵 대회는 골프의 진수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세계 톱클래스들이 펼쳐 보인 플레이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골프의 교과서를 보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혀를 내두르게 하는 엄청난 비거리, 군더더기 없는 스윙, 모든 샷에 쏟는 정성과 냉철한 판단, 동료는 물론 상대선수에 대한 배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실수의 순간까지 명승부의 파노라마를 연출했다.

수많은 극적인 장면 중에서도 골퍼들에게 교훈을 준 가장 극적인 순간의 주인공은 배상문(29)이었다.
세계랭킹이 프레지던츠컵 출전 조건에 들지 않아 자력 출전이 불가능했던 배상문은 단장(닉 프라이스) 추천 선수로 선발되어 기대 이상으로 선전했고 대회 마지막 날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까지 주어졌다.

빌 하스와 함께 마지막 싱글매치에 나선 배상문은 최선을 다했다. 빌 하스의 승리로 끝날 위기가 몇 차례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한 홀 차이로 파5 18번 홀을 맞았다. 첫 티샷을 페어웨이로 잘 날린 배상문에겐 이 홀을 이겨 매치를 비길 수 있는 희망이 보였다. 이 매치를 비기면 미국 팀과 인터내셔널 팀이 비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빌 하스의 두 번째 날린 볼이 그린 옆 벙커에 빠지면서 이런 시나리오는 실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배상문은 투온을 노리고 두 번째 샷을 날렸으나 약간 두껍게 맞으면서 온 그린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잘 붙인다면 버디의 기회는 남아있었다.

결정적 실수는 세 번째 어프로치샷에서 나왔다. 범프 앤 런(bump and run)으로 볼을 핀 가까이 붙일 요량이었으나 그만 뒤땅을 먼저 치면서 볼은 그린에 오르지도 못하고 다시 굴러 내려왔다. 배상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던 시나리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네 번째 어프로치 샷은 핀을 지나쳐 파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빌 하스는 편안하게 벙커에서 볼을 떠올려 핀 가까이 붙였다. 이미 한 홀을 지고 있던 터라 상황은 빌 하스의 2홀 승리로 종료되었다. 동시에 미국 팀의 1점 차 승리가 확정되었다.

골프깨나 친다는 사람이라면 18번 홀에서 배상문이 겪은 마음의 요동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홀을 승리해서 매치를 비결 경우 자신에게 쏟아질 환호와 찬사, 대회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영웅으로 탄생하는 순간의 기쁨이 눈에 선했을 것이고 세 번째 어프로치샷으로 볼을 핀에 붙여 반드시 버디를 낚아야겠다는 결의와 이에 따른 부담감, 미스 샷 이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 등 짧은 순간 배상문의 마음속에 몰아친 격랑은 대단했을 것이다.

   
▲ 짐을 질 것인가, 내려놓을 것인가는 나에게 달려있다. 골프에서 심리적 짐을 내려놓으면 좋은 결과가 나오듯 일상생활에서도 짐을 내려놓으면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삽화=방민준
배상문의 실수는 바로 무거운 중압감으로 결정적인 순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데서 나온 자연스런 것이었다.

배상문의 경우와 흡사한 사건이 2003년 디 오픈에서 일어난 기억이 새롭다.
일본PGA 상금랭킹 3위의 자격으로 생애 처음 세계 최고 권위의 메이저대회인 디 오픈에 참가한 허석호 선수(당시 31세)는 참가 자체만으로도 한국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는데 3라운드 내내 선두권을 지켰다. 한국의 골프팬들은 흥분했고 세계의 골프전문가들도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처음 참가하는 지구촌 최고 권위의 메이저대회, 바람과 러프와 벙커로 이뤄진 거친 골프코스, 골프 원조국의 수많은 갤러리 등 결코 친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세계적인 대선수와 함께 라운드하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플레이하는 모습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1라운드 공동 4위, 2라운드 2위. 3라운드에선 데이비스 러브3세와 함께 한국 남자골프 사상 처음 메이저대회의 챔피언조로 출발하는 영광을 누렸다. 3라운드의 결과는 공동 8위였다. 중압감을 모르는 듯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 국내의 여느 골프장에서처럼 무리 없이 휘두르는 스윙 등은 국내 골프팬들에게 톱10의 가능성을 믿게 했다.

사단은 3라운드를 마친 후 일어났다. 허 선수가 예상 밖의 좋은 성적을 내자 국내 골프채널에서 스승을 자처하는 프로골퍼 선배를 내세워 통화를 하게 했다.

선배를 자처하는 그는 허 선수에게 “개인이 아닌 국가를 대표하는 자세로 임하라.”고 당부했다. 부모들까지 등장시켜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었다. 무심하게 골프에 몰입해 최선을 다하고 있던 허 선수에게 ‘무언가 대한민국을 위해 이정표를 세워야 한다.’는 중압감을 지워준 꼴이 된 것이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허선수는 유난히 힘이 들어가고 샷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최종 스코어는 8오버파로 28위를 차지했다. 이만한 결과도 대단한 것이지만 끝까지 허 선수가 자기 스타일대로 무심하게 라운드 할 수 있게 내버려두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같은 대회에서 미국 PGA 데뷔 1년차인 벤 커티스(당시 26세)가 우승했다. 모든 면에서 경쟁이 안 되는 기라성 같은 대 선수들을 제치고 디 오픈의 우승컵 ‘클라레 저그’의 주인이 된 벤 커티스는 그야말로 골프의 애송이다. 본인 스스로 컷 오프 통과면 대성공이라고 생각하며 대회에 임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그는 최종 합계 1언더파 283타로 전날까지 선두였던 덴마크의 토마스 비욘, 피지의 비제이 싱, 타이거 우즈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벤 커티스가 우승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그에겐 지워진 짐이 없었다. 아무도 주시하지 않았고 욕심도 없었다. 그저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가벼운 어깨가 없던 실력까지 발휘하게 만든 것이다.

배상문은 경기를 마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2년 뒤가 될 지 4년 뒤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프레지던츠컵에 출전해서 그때는 꼭 미국 대표팀을 이기고 싶다"고 다짐했는데 제발 누군가를 꼭 이기겠다는 자세에서 벗어나 주기를 바란다.

골프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게임이지 누군가를 꺾는 게임이 아니다. 결과는 얼마나 최선을 다해 집중을 했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지 결의와 전의나 투지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때는 미국 팀을 꼭 이기고 싶다”는 말 대신 “그때는 후회하지 않는 게임을 하겠다”고 말했다면 참 격이 돋보였을 텐데.

우리도 자신의 베스트스코어를 냈던 날을 기억해보자. 십중팔구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누구를 이기겠다는 경쟁심도 없이, 겸손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라운드 한 날일 것이다. 신기록을 내겠다고 다짐하고, 누구를 반드시 이기겠다고 벼르고 나간 라운드는 어김없이 형편없는 스코어를 안겨주었던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짐을 질 것인가, 내려놓을 것인가는 나에게 달려있다. 골프에서 심리적 짐을 내려놓으면 좋은 결과가 나오듯 일상생활에서도 짐을 내려놓으면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방하착(放下着)’이란 불가(佛家)의 용어가 있다. 일체의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무언가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욕심, 나의 것에 집착하는 아집, 나를 거미줄처럼 묶는 망상들을 툴툴 털고 빈 마음이 되는 경지다. 무소유로 전체를 소유하듯, 놓음으로써 전체를 얻는 이치다.
골프야말로 짐을 내려놓는 스포츠다.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