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은 지난해부터 기업가연구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데 기여한 기업가, 소비자니즈에 발맞추어 기업가정신의 승리를 보여준 기업가들을 연구하고 있다. 국가대표 생활용품 기업에서 항공사에 이르기까지 기회의 발견 및 차별화를 통해 연매출 6조원의 애경 그룹을 건설해 낸 장영신 회장에 대한 분석은 김연주 자유경제원 연구원이 담당했다.
애경의 신화는 대한민국 최초의 미용비누 ‘미향’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후 국내 최초의 주방세제로 주방세제의 대명사가 된 ‘트리오’를 출시하여 정부도 하지 못한 ‘위생생활 개선’을 이룬다. 창립자 채몽인 회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위기를 맞게 된 애경이었지만 망망대해에서 새 선장을 맡게 된 이는 아이 넷 딸린 30대 미망인, 장영신 회장이었다. 장영신 회장은 시장을 읽는 기민한 감각과 기회의 발견, 역발상과 차별화로 기업 혁신을 이루어낸다. 애경 그룹은 현재 AK백화점 등 유통산업은 물론이거니와 제주항공 등 항공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아 일취월장하고 있다. 아래는 김연주 자유경제원 연구원의 발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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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주 자유경제원 연구원 |
‘애경’, 국가대표 생활용품 기업에서 하늘을 날기까지
장영신 회장, 기업가정신의 승리를 보여주다
'트리오’ '스파크’ '2080’ '케라시스’를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이 있을까? 애경의 친숙한 상품들은 간첩도 못 들어본 이름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만큼 국민 생활용품기업으로 우뚝 선 '애경’은 대한민국 팔도강산 아주 조그만 슈퍼마켓 매대 구석구석까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애경은 1912년 인천 중구 송월동에서 한 일본인이 자금 30만원으로 차린 '애경사’를 광복 이후 고(故) 채몽인 회장이 인수하면서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1954년 소공동에 새로이 둥지를 튼 비누제조업체 '애경(愛敬) 유지공업주식회사’는 자본금 5천만 원, 종업원 50명으로 소소하게 시작했다. 그저 '작은 비누 하나’로 시작한 회사가 어떻게 오늘날 6조에 육박하는 연매출, 유통·화학·부동산·항공·레저사업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총 46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살아있는 성공신화에는 세상에 '변화’를 일으킨 장영신 회장의 기업가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난한 나라의 더러운 삶, 그 슬픔을 닦아 낸 '애경’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생활상은 끔찍함 그 자체였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국토 어디에도 보금자리라 부를만한 곳은 찾기 어려웠다. 그저 집이란 비바람이나 막아주면 감지덕지였던 시절, 마른먼지가 솟아나는 집구석엔 배곯는 아이들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제대로 된 주방, 화장실 하나 없던 그 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은 '식생활 및 위생상태’였다. 세탁비누가 있긴 했지만 당시 비누는 비싼 사치품으로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세정제 역할을 하던 대체품은 있었다. 보통 풀잎을 태운 재를 빗물에 오래 담가두었다 쓰는 '잿물’이나 녹두·팥 등을 갈아 무언가를 닦는데 썼다. 비누도 못 쓰는 가난한나라에 주방세제라고 있었을까. 위생관념이 전무했던 시절, 주부들은 그릇에 묻은 기름기, 음식찌꺼기를 닦아내기 위해 '짚으로 엮은 수세미’나 '모래’를 쓰곤 했다. 설거지를 하는데 모래를 쓴다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궁핍했던 시절 '위생’은 사치였다. 국민들은 그렇게 지독히도 가난하고 더러운 매일을 견뎌내야만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미용비누 '미향’-전국 소비자를 사로잡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국민, 꼬질꼬질 때 뭍은 삶’, 애경 창업주인 채몽인 회장은 국민들의 이런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독자적 기술을 바탕으로 1956년 1월 드디어 국민들 마음 속 얼룩을 지워줄 대한민국 최초의 미용비누 '미향’을 출시했다. 더러움이 지긋지긋 했던 터일까, 매끈매끈하고 은은한 향기가 나는 '미향’은 국민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1958년에 이르러서는 단일제품으로 월 100만개를 판매하는 경이로운 기록까지 세웠다. 어찌나 인기가 있었던지 당시 공장이 있던 인천과 서울 사이를 오가는 화물차란 화물차에 전부 '애경유지’ 제품이 실려 있었다던 일화가 지금까지 국내 유화업계 전설로 내려올 정도다. 이렇게 전국에 흩뿌려진 '미향’의 향기와 함께 연이어 출시한 흑사탕비누, 레몬 비누 역시 불티나게 팔리면서 애경의 명성도 전국구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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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1] 1956년 대한민국 독자기술로 만든 1호 미용비누 '미향’ 신문광고와 패키지./사진=자유경제원 한국의기업가 게시판 |
주방세제의 대명사 '트리오’-정부도 못한 '위생생활 개선’ 혁신을 이루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1966년 12월, 애경은 전국에 퍼진 '미향’의 향기가 희미해지기도 전에 성공 여세를 몰아 국내 최초의 주방세제 '트리오’를 출시한다.
기껏해야 쌀뜨물 아니면 양잿물에 수세미 따위로 설거지 하던 주부들에게, '뽀드득-’ 소리를 내며 기름때까지 말끔하게 닦아주는 '주방세제 트리오’의 탄생은 그 자체로 거의 '혁명’에 가까웠다. 야채, 과일, 식기 3가지를 동시에 닦을 수 있다는 의미의 '트리오’는 전에 없던 신세계적 제품이었고, 발음하기 쉬운 3음절의 상표명까지 더해져 출시 직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애경은 특히 누구나 살 수 있을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트리오’를 공급함으로써 '가성비 최고의 세제를 만드는 회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 당시 주부들에게 '트리오’는 이미 보배 중 보배요, 주방생활의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트리오’는 대한민국에 전에 없던 '세제’시장을 만들어냈고, 곧 엄청난 수요가 창출됐다. '뽀드득-’하는 그 손맛을 한번 본 사람은 트리오 없이 설거지를 하지 못했다. 1967년 28톤이던 트리오의 생산량이 1970년 493톤으로 출시 3년 만에 무려 18배 증가한 것만 보아도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트리오’는 곧 시장점유율 70%라는 기록을 세우며 애경의 성장을 견인하는 상품이 되었다. 그 때부터 '트리오’는 주부들의 보배일 뿐만 아니라 애경의 '보배’가 되었다. 일자리 창출에도 한 몫 했기 때문이다. 애경은 '트리오’의 성공으로 50명 뿐 이던 직원을 400명으로 늘렸다. 제품의 성공이 가져온 800% 고용창출이었다.
'트리오’는 국민 위생보건 상태를 '더러움’에서 '깨끗함’으로 바꿨다. 이것이 판매 고공행진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1966년 당시의 정부도 어찌하지 못했던 국민생활에 '대(大)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열악한 위생환경, 흔한 기생충감염으로 배앓이를 하는 사람이 태반이던 그 시절 '트리오’의 개발은 설거지 편의 증진 외에도 과일, 야채 등을 깨끗이 씻어 먹도록 광고해 국민 위생생활 개선에 크게 이바지 했다. 기생충감염 예방, 철저한 개인위생 개념의 진화를 '트리오’가 가능케 한 것이다. '트리오’는 이런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낸 점을 공로로 인정받아 당시 '한국기생충박멸협회’로부터 우수 추천 상품으로 5년간 선정되었고 그 때문에 더욱 인기를 끌었다. 잘 만든 제품 하나가 국민건강 증진에 괄목할만한 기여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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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2] 왼쪽부터 최초 출시된 '트리오’, 계속해서 리뉴얼되는 트리오 시리즈./사진=자유경제원 한국의기업가 게시판 |
1966년 출시된 국내최초 주방세제 '트리오’는 다가오는 2016년 50주년을 맞이한다. 트리오를 처음 썼던 새댁은 어느덧 머리 희끗한 할머니가 되었지만 그 딸도, 그 딸의 딸도 트리오를 쓴다. 꾸준한 브랜드 리뉴얼 전략과 품질개선을 통해 고정 소비자를 유지함으로서 여전히 국민 주방세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철 식중독 균을 없애주는 '향균 트리오’, 캠핑문화 확산에 따라 야외설거지에 최적화된 '트리오 캠퍼’, 친환경 컨셉의 '곡물 트리오’는 지금도 소비자의 일상생활을 더 편하고 즐겁게 진화시키고 있다. 50년이 넘도록 소비자의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자리에 오기까지 애경이 걸어 온 길이 쭉 순탄하지는 않았다.
위기의 애경, 망망 대해에서 새 선장을 만나다
설립 초창기부터 '미향’, '트리오’의 연이은 성공으로 잘나가던 '애경’에도 위기가 닥쳤다. 창립자 채몽인 회장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한창 넓은 바다로 뻗어나가야 할 배가 선장을 잃었으니, 당장 회사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지 방향타를 쥘 사람이 없었다. '애경호’에는 갗 막내아들을 출산한 사회경험 전무(無)의 30대 미망인 한명과 처자식 딸린 수많은 선원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신은 인생의 한쪽 문을 닫을 때 반드시 다른 쪽 문을 열어둔다고 했던가, 남편이 남긴 '애경’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할 줄 알았던 아이 넷 딸린 30대 미망인은 그리 평범한 여성은 아니었다. 장영신은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필라델피아 체스넛힐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다재다능하고 대찬 여성이었고 애경의 화학시대를 열 최적의 인물이었다. 평생 한 남자의 아내로 네 아이의 엄마로 살아갔을지도 몰랐을 그녀의 운명은 남편의 죽음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여성 CEO’라는 신화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시장을 읽는 기민한 감각, '화장품 시대'를 열다
1970년부터 애경을 이끌게 된 장영신 회장은 그 누구보다 소비자의 마음을 읽는데 뛰어났고 시장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리더였다. 스스로는 그 시작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대표였다고 겸손하게 회상하지만, 이미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던 대한민국 화장품 시장에 후발주자라는 타이틀이 믿기지 않을 만큼 탁월한 전략과 마케팅기법으로 기업이 성공가도를 달리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애경이 화장품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70년대 말. 비누 회사로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고 해서 소비자들이 애경이 만든 화장품을 그냥 믿고 사줄리 만무했다. 특히 1980년대 들어 외국화장품 수입금지조치를 시행해오던 정부가 시장을 개방하겠다는 발표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애경은 자칫하면 후발업체라는 약점에 수입화장품과도 경쟁해야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다. 장 회장은 하루 빨리 화장품 시장에 진입해 안착하기 위해서는 애경이 기존 업체들과는 다른 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소비자의 눈으로 시장을 읽기 시작하자 곧 길이 보였다.
기회(opportunity)의 '발견’, 역발상이 만들어낸 '클렌징’ 시장
이미 포화상태였던 화장품 산업에 뛰어드는 대부분의 기업들, 특히 후발 업체들은 그 분야를 기존 업체들에 움직이는 닫힌 시장으로 파악했다. 시장을 그렇게 밖에 파악하지 못하는 후발주자들은 기성 트렌드를 따라 색조화장품에 열을 올리고 곧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장 회장은 끌려 다니지 않았다. 지금까지 저평가된 자원들 사이에서 열린 시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클렌징’이었다. 기존 화장품 업체들이 색조 중심 사업에서 립스틱 하나라도 더 팔고자 유명연예인을 모델로 영입하기 바쁠 때, 장 회장은 전혀 새로운 것을 보았다. 당시 화장품 시장에서 '피부 본연의 건강’이라는 가치가 저평가 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기업가 정신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까지 간과되었던 시장 가치의 존재를 깨닫는데 있다. 장 회장이 저평가 된 '피부 본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화장품 시장은 화장, 즉 'make up’만 이야기 할뿐 '피부’를 조명하지 못했다. 화장 이후의 처리는 그야 말로 관심 밖, 미지의 세계였다.
화장품 산업에서 애경이 나아가야 할 사업 방향은 확실해 졌다. 여성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피부 결점을 가리는 색조 화장품이 아니라 피부 자체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화장품이라는 점에 착안해 곧 바로 미국 폰즈사와 기술 제휴를 통해 '콜드크림’과 '바세린 로션’을 첫 상품으로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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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이 남긴 '애경’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했던 아이 넷 딸린 30대 미망인, 장영신은 그리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다. 장영신은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에서 화학을 전공한 다재다능했던 여성이었고 애경의 화학시대를 열 최적의 인물이었다. 후일 장영신 회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여성 CEO’라는 신화를 썼다./사진=애경그룹 홈페이지 '그룹회장 인사말' 캡처 |
차별화가 만든 '더 멋진 결과’ - 유통혁신으로 성공하다
콜드크림과 바세린 로션에 대한 확신은 있었다. 다만 문제는 화장품의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요즘이야 중저가부터 고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브랜드가 있지만 당시만 해도 화장품은 값비싼 소비재라는 인식이 강했다. 좋은 제품을 착한 가격에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애경의 원칙을 지키고 싶은 장 회장의 마음과 유통채널이 없어 단가를 낮추기가 불가능한 애경의 현실이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진입장벽’이 있었고 후발업체가 뛰어들기에 시장은 당연히 불리했다.
하지만 장 회장은 늘 “차별과 편견은 세상으로 나가는 통과의례”라고 입이 닳도록 말하던 인물이다. 진입장벽이라는 시장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다르게 보려고 했다. 제품 가격을 낮출 수 없는 원인에 초점을 맞췄다. 문제는 유통구조. 화장품은 비싼 소비재로 1980년대 당시 백화점, 화장품 전문매장, 방문 판매를 통해서만 유통되고 있었는데 이 유통구조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단가를 낮출 방법이 없었다.
'왜 저곳에서만 팔아야 하지? 다른 곳에서 화장품을 팔면 되지 않을까?’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하는 장 회장 머릿속에 이내 떠오른 곳은 '슈퍼마켓’과 '약국’이었다. 슈퍼마켓과 약국은 기존의 방식 보다 유통비용이 적게들 뿐 아니라 장을 보러오거나 약을 사러 오는 소비자에게 자연스럽게 제품을 노출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애경 콜드크림과 바세린 로션이 슈퍼마켓과 약국에 깔리면서 본격 판매되기 시작하자 시장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획기적인 시장 확대가 아닐 수 없었다. 예상 밖의 기회를 발견하는 것. 그것을 시장에서 이윤 창출로 승화 시키는 것이 기업가 정신이다. 장 회장이 보여준 기업가 정신으로 소비자들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화장품을 발견해 놀라워했고, 애경은 자만에 빠져있던 화장품업계와 언론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며 성공적으로 화장품 업계에 안착했다.
'포인트(POINT)', 소비자의 인식을 새로 쓰다
콜드크림과 바세린 로션의 성공에 힘입은 장 회장은 '클렌징 시장’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폰즈사와의 합작을 마친 애경은 즉시 순수 국내 기술로 최초의 클렌징 제품 '포인트’를 곧 바로 출시했다. 화장품 시장에 새 지평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콜드크림과 바세린 로션이 소비자에게 어필한 '클렌징’ 개념은 단순히 화장을 지우는데 한정되어 있었을 뿐 피부건강을 위한 필수 코스라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장 회장은 그런 부분에 착안해 단순히 제품이 갖는 우수성보다 '클렌징’이라는 행위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마케팅 방점을 두었다.
이렇게 '화장은 하는 것 보다 지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는 유명 광고 카피가 탄생했다. 광고는 이머징 마켓의 새로운 장을 여는데 톡톡히 한 몫을 했고 애경은 시장 개척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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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3] 왼쪽부터 1993 애경 '포인트’, 미세모 전동브러쉬와 함께 파는 '포인트’./사진=자유경제원 한국의기업가 게시판 |
색조 화장을 아무리 잘해도 깨끗이 닦아내지 못하면 본연의 피부가 망가진다는 뜻을 담은 카피는 클렌징 제품에 대해 소극적 관점을 갖고 있던 소비자들에게 확실한 인식의 전환을 선사했다. '클렌징’은 단순히 화장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피부를 지키는 제품이라는 인식이 소비자들 사이에서 확산되면서 포인트의 인기는 치솟았다. 애경은 화장품 시장에서 후발주자라는 핸디캡을 딛고 당당히 클렌징 전문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시장 성공의 황금열쇠 - '소비자의 니즈 발견하기’
세상의 위대한 발명품들은 대부분 불편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만들어 졌다. '소비자’가 불편해 하는 것이 곧 '원하는 것’이었고 시장에서 성공하는 황금열쇠였다. 벨이 만든 전화기는 원거리에서도 '목소리’를 전달하고 싶었던 사람들의 욕망이 현실화 된 것이고, 에디슨의 전구 역시 어두운 밤에도 언제 어디서든 주변을 밝힐 수 있는 빛이 필요했던 소비자의 니즈에서 탄생했다.
비누와 화장품도 6.25전후 열악했던 생활상 속에서 위생적인 환경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욕망과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포인트’의 성공 비결 역시 저렴한 가격으로 피부 본연의 아름다움을 가꾸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취향과 욕망을 발견한데 있다. 기민한 기업가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발견’한다. 단순히 전에 없던 특이한 제품이라고 해서 성공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익숙한 '불편’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안주하겠지만,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편’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세상을 놀라게 할 위대한 발명과 발견의 역사를 쓸 수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기존의 시장이나 제품에서 소비자가 느끼는 불만과 욕구 등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다.
장영신 회장의 기업가정신은 언제나 '소비자의 니즈’를 '발견’하는데서 가장 빛났다. 시장에서의 제품 성공은 장 회장의 '발견’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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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4] 왼쪽부터 2080덴탈클리닉, 매출 600백억 돌파의 '에센스커버팩트’, 루나팩트./사진=자유경제원 한국의기업가 게시판 |
치약업계의 새 지평을 연 '2080클리닉’은 전 국민 치아건강 캠페인으로 번졌고, 전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케라시스 퍼퓸샴푸’는 샴푸향에 매혹되는 여성과 남성, 경쟁업체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뿐만 아니다. 일명 '견미리 팩트’로 인기몰이중인 브랜드 '에이지투웨니스’는 에어쿠션 전쟁으로 법적 공방에 매달리고 있는 라이벌 기업들을 일제히 충격에 빠뜨렸다. 현재 '에센스커버팩트’가 얻고 있는 폭발적 인기는 과거 아모레퍼시픽이 '에어쿠션’을 처음 출시했을 때의 그 명성을 무색하게 할 정도다.
얼마나 역동적인가. 이래야 살아남는다. 소비자 니즈를 얼마나 빨리 파악해 현실화 시키는 역량을 갖췄느냐에 따라 기업은 흥할 수도 망할 수도 있다.
시장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장영신 회장은 '기업에 있어 현상 유지라는 것은 안정이 아니라 퇴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 나은 모습을 위해 정진해온 애경은 자본금 5천 만 원으로 시작한 작은 비누회사에서 2015년 현재 국내외 46개 계열사를 거느린 연매출 6조원의 '애경그룹’으로 성장했다.
비즈니스에 쉬운 길은 없다. 험난한 가시 밭 길을 개척하는 프런티어 정신으로 무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장 회장도 처음 경영을 시작할 때는 비누업계에서 최고, 화학원료사업에서 최고가 되면 좀 편해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내 최고의 자리라는 것이 부단한 노력 없이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이만하면 됐겠지’ 싶어 숨 고르기를 하다보면 어느샌 애경 제품보다 뛰어난 제품이 개발돼 나왔다.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끝없이 높아지는 소비자의 눈높이에 뒤처지지 않고 따라가야 했다.
대한민국 사회에는 대기업을 '재벌’이란 표현으로 일컬으며, '앉은 자리에서 편하게 돈 굴려 돈돈을 버는 속편한 존재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아직도 만연하다. 기업가 정신, 기업 운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이 끊임없이 생산,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제조업도 서비스업도,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경쟁기업에 최고의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신제품을 개발해야 하고,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면 후퇴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도전을 감행해야 기업의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애경 '날다’- 새로운 성장동력 “항공산업”
1950년대 생활용품을 기반으로 출발한 애경은 1970년대 기초화학, 1980년대 화장품산업 분야에서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1990년대 채형석 현 애경그룹총괄부회장이 경영일선에 참여하면서 AK백화점(현재 AK플라자, AK&) 등 유통업에 진출해 왔다.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갈 때 마다 신중했고, 탁월했다. 서두르지 않고 기본기를 탄탄히 다진 덕분인지 200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한 부동산개발, 항공, 해외시장 진출 등 새로운 성장동력 개발의 성공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제주항공’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채 부회장이 2005년 시작한 항공사업은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 같은 'FSC(Full Service Carrier)’에 대비되는 '저비용항공사LCC(Low Cost Carrier)’로, 기존 항공업계와 명확한 차별화가 가능했다. 그 자체로 파격적인 행보였다. 제조업기반의 기업이 거대 서비스 산업으로 분류되는 항공산업 진입장벽을 뚫고 도약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도전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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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5] 올해 유가증권시장 상장 예정인 '제주항공’./사진=제주항공 웹사이트 '메인페이지' 캡처 |
채 부회장의 판단은 정확히 시장을 강타했고, 저비용 항공은 불편하고 불안하다는 소비자의 선입견도 곧 깨졌다. 가격 대비 만족스러운 서비스와 안전운항을 책임짐으로써 제주항공은 저비용항공사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2006년 국내선에 이어 일본, 홍콩, 태국, 필리핀 등 국제선도 취항해 동북아시아권의 대표적인 저비용항공사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다. 국적 LCC 최초로 보유 항공기 20대를 돌파한데 이어 연내로 2대를 더 추가할 여력까지 있다고 하니 제주항공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자명하다.
'자유 경쟁’을 통해 진화하는 시장
'제주항공’이 올해 말까지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될 것이라는 계획이 가시화 되면서 애경그룹의 성공 스토리가 다시 한 번 주목 받고 있다. 항공사 진출 소식으로 업계에 화젯거리를 몰고 온지 9년만의 쾌거다.
제조업, 유통업으로 기반을 다져온 애경의 항공산업 도전은 당연히 어려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각, 차별점으로 무장한 기업에겐 길이 열린다. 취항과 동시에 기존 항공업계는 바짝 긴장했고 대형항공사가 독점해오던 항공시장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이제 '저가항공’은 소비자에게 너무나 익숙한 서비스다. 이윤창출하기 위한 기업가의 도전이 시장의 진화를 이뤄낸 것이다.
'중소기업적합업종’ '동반성장위원회’ 의 존재가 안타깝다. 중소기업에 적합한 산업, 대기업에 부적합한 산업은 없다. 애경이라고 처음부터 6조 원 매출을 기대하는 대기업이었겠는가? 애경은 안 해본 사업이라고 뒷걸음치지 않았다. 위기가 닥칠 땐 기회로 삼았다. 새로운 시장에도 단단히 준비하고 출사표를 던져왔다. 개방의 물결이 이는 시장에서 몸을 움츠리기 보다는 한발이라도 먼저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고자 세계로 뻗어 나갔다.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고 도전해온 역사가 무르익어 오늘의 애경 그룹을 이루었다.
온정주의적 정책들은 시장을 망친다. '균형’이라는 이름의 세계는 기업가적 발견과 창의성이 전혀 필요하지도, 쓸모도 없는 공상 속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는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다. 엉키고 뒤틀려 왜곡될 뿐이다. 시장의 진화는 정부와 규제정책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의 '발견’과 소비자의 '응답’이 어우러지는 데서 출발한다. /김연주 자유경제원 연구원
참고자료
『Stick to It, 스틱 투 잇 』, 장영신 지음, 동아일보사
『시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불균형, 기업가 정신 그리고 발견 』, 이즈리얼 M. 커즈너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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