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시장은 6.25전쟁 당시 남한으로 내려온 북한 피난민들이 이 지역에서 미싱 한 두 대로 옷을 만들거나 미군복을 염색, 탈색해 판매하던 것이 모태가 되었다. 판자촌으로 출발한 평화시장은 전쟁이후 청계천변에 노점상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본격적인 상권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1958년 이 일대의 대화재 이후 판자촌들은 사라졌고 1962년 지금의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평화시장’이라는 이름은 평화통일을 기리는 실향민들의 염원에 따라 붙여졌다. 평화시장은 개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치열하게 일하고 성공한 승리의 현장이었다. 현재 평화시장은 3개 층, 2070개 점포, 5300 여 명이 종사하는 평화시장(주)라는 기업형태의 56년 전통을 자랑하는 재래시장이다.
이에 자유경제원에서는 평화시장의 경제적·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자유경제원이 10일 오후 2시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 평화시장’ 토론회에서 참석한 전문가들은 “평화시장이야말로 대한민국 빈곤탈출의 표상, 고용 역사의 현장, 산업화 민주화의 조우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소”라며 입을 모았다. 아래 글은 발표자로 참석한 조우석 미디어펜 주필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 조우석 주필 |
전태일, 조영래가 평화시장을 상징할 수 있나
민주화·산업화 새롭게 만나야 동대문패션타운도 살아난다
“태연, 씨스타, 씨엔블루, 방탄소년단, 갓세븐…. 내로라하는 한류 스타들이 지난 9일 저녁 동대문 DDP 앞거리에서 공연했습니다. 서울디자인재단이 펼친 ‘시민이 함께하는 DDP 동대문 축제’의 하나였습니다. 이 공연은 중국 미국 프랑스 등 116개국에 생방송됐습니다. 도심 한복판에 불시착한 우주선 같은 DDP의 특이한 외관을 보면서 외국 시청자들은‘서울에 가서 저 건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DDP가 자리한 동대문 패션시장은 밤 풍경이 더 화려하고 활기가 넘치는 곳입니다…”(국민일보 10월16일자 보도)
동대문패션시장의 원조인 평화시장이야말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거대한 압축판이다. 6.25전쟁 이후 청계천 5~6가의 판자촌과 노점상으로 초기 상권이 형성된 이후 2000년대 초반 지금은 너무도 달라진 모습이다. 생계를 위해 재봉틀 한두 대로 옷을 만들거나 군복 염색으로 시작했던 그때와 달리 현재는 두산타워-밀리오레 등 고층 의류상가 건물은 물론 ‘패션 수도의 심볼’DDP를 포함한 동대문패션타운으로 자라났는데, 이 블록의 중심엔 평화시장이 있다.
동대문패션타운은 의류전문 도매상가인 평화시장과, 원단-부자재를 파는 동대문종합시장, 밀리오레 같은 의류전문매장까지 생산부터 판매가 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패션명소다. 요즘 세계의류업계의 대세는 SPA브랜드(제조·유통까지 전 과정을 제조회사가 맡는 의류전문점)가 대세인데, 디자인-생산에서 유통-판매까지 원 스톱으로 돌아가며 하루 만에 뚝딱 신상품이 쏟아내는 시스템은 동대문이 원조다.
지난해 말 서울시는 ‘서울 스토리텔링 관광명소화 사업’을 벌였고, ‘동대문패션 이야기, 3일의 기적’ 이란 이름 아래 평화시장 벽면에 초대형 벽화도 선보였다. 하지만 의미있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됐는지는 의문인데, 그건 이유가 있다. 한국사회를 특징 지우는 현실 따로, 신념 따로의 인지부조화 현상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평화시장의 어제 오늘의 역사와, 우리의 평균적 신념이 따로 놀면서 엇박자를 내는 것이다. 평화시장의 경우 핵심에는 45년 전 분신자살한 청계피복노조원 전태일(1948~1970)과, 그에 관한 평전을 쓴 인권변호사 조영래(1947~1990)가 똬리를 틀고 있다.
▲ 동대문패션시장의 원조인 평화시장이야말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거대한 압축판이다./사진=평화시장 웹사이트 메인페이지 캡처 |
평화시장의 경제사회적 의미를 점검할 때 나오는 말은 대강 이런 식이다. “전태일은 우리시대의 감추어진 얼굴을 드러낸 횃불이었다.”이 말은 2.5류 좌파 신영복의 선동적이면서도 상투적인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그건 조영래도 만찬가지다. 올해로 타계 25주기를 맞는 그를 두고 “시대를 밝힌 자랑스러운 변호사”이자 “변호사들의 정신적 푯대”(서울지방변호사회장 김한규)라는 찬사를 중앙일보는 최근 한 면을 할애해 쏟아냈다.(11월7일)
시대를 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없으며 죽은 자를 향한 공허한 추모만이 반복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운동-인권 그리고 민주화 타령뿐인데, 평화시장의 경제-역사적 무게를 어찌 신화화된 노동운동가와 변호사 한 명에 가둬둘 수 있는가? 그건 평화시장 화석화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현대사의 반쪽에 불과하다. 평화시장엔 분명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는데, 지식권력을 쥔 좌파의 손에 의해 한쪽만 조명된다. 그건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심히 불행한 노릇이다.
안타깝게도 지식정보의 좌편향화는 이미 구조화됐다. 조형곤 21세기 미래교육연합 대표가 전국 80개 초중고 도서관 장서 124만여 권을 분석한 결과가 그걸 새삼 보여줬다. 전태일과 관련도서(300권)가 산업화 대통령 박정희(266권)와, 불멸의 기업인 정주영(223권) 이병철(88권)보다 각각 많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주제로 한 책은 31권으로, 북한 김일성(34권)보다도 적고, 압도적 1위가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었던 김구(1866권)였으니 ‘뒤집힌 현실’이 아찔할 뿐이다.지금 평화시장과 동대문패션타운이 샤넬과 디올도 놀라는 ‘불이 꺼지지 않는 패션 수도’로 떠올랐다면 응당한 조명을 더 해야 옳지만, 아직도 전태일-조영래 타령에 그친다. 시야를 넓히자. 우리현대사를 이끌어온 두 개의 축인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 사이의 진정한 만남 가능성을 모색해볼 순 없는 것인가? 그걸 위해 오늘 나는 산업화 세대 상징인물의 한 명인 엔지니어 김해수(1923~2005년)를 잠시 부각시키려 한다. 이 스토리엔 김해수와 인연을 잠시 공유했던 산업화 대통령 박정희도 언급된다. 김해수의 사위인 박노해도 깜짝 등장을 한다.
김해수, 등록문화재559-1호인 국산 라디오 제1호(금성사 A-501)를 설계했던 엔지니어이니 이 나라 산업사 명예전당에 올려져야 할 이름의 한 명이다. 경남 하동 태생인 그는 1958년 럭키화학공업사가 설립했던 자회사인 금성사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해 이듬해 A-501을 설계·제작했다. 6.25때 미군라디오수리점을 운영했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회사는 부산 연지동에 있었다. 문제는 A-501가 지독히도 안 팔렸다는 점이다.
부산을 포함해 전국에 밀수품이 득시글거리는 시기인데 누가 국산을 쳐다나 볼까? 라디오를 개발한 지 2년, 회사는 문을 닫을 위기였다. 그 무렵 한 사나이가 공장에 찾아들었다. 선글라스를 낀 키 작은 사나이, 뜻밖에도 박정희였다. 쿠데타 전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재임했던 그가 잠시 이곳에 내려왔던 길에 이 공장을 찾은 것이다. 1961년 가을 오후, 김해수는 그날을 훤히 기억한다. 하필이면 사장 이하 중역들이 자리를 비운 그 시각 생산과장인 자기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예고 없이 찾아와 미안합니다. 라디오공장을 좀 보러왔습니다.”
가슴이 쿵쾅댔다. 경비원이 철문을 여는 와중에 검정색 승용차에서 내린 군인 셋 중 한 명이 눈에 익었다.“저 양반이 요즘 신문에 자주 나는 박정희 의장?”인가 싶었다. 그는 부품가공실, 라디오 조립실까지 두루 들러본 뒤 김해수의 즉석 브리핑을 청취했다. 이윽고‘선글라스 장군’의 질문이 쏟아졌다. “공장 기계시설은 어느 나라의 것이냐? 부품 국산화율은 어느 정도인가?” “자금력은 어떠냐. 기술은 자신이 있느냐?”
박정희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금성사가 살아날 수 있겠소? 무얼 도와드리면 좋겠소?” 김해수는 “광복동에 즐비한 라디오가게가 온통 밀수품으로 도배됐다는 사실부터 확인해보시라”고 귀띔을 했다. 자리를 일어서는 박정희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김 과장, 기운 내시오.”라며 등까지 두드려준 뒤 휭 하니 발길을 돌렸다. 그 며칠 뒤 회사는 뒤집혔다. ‘밀수품 근절에 관한 최고회의 포고령’이 발표된 것이다.
공보부 주관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이어 전개됐다. 회사 전화통에 불이 났다. 전국에 30만대이던 라디오 보급대수는 그 뒤 2년 만에 100만대를 돌파했으니 그만도 놀라운 일인데, 김해수-박정희 인연은 7년 뒤 한 번 더 있었다. 금성사 동래공장을 세우고 국산 TV 제1호 ‘VD-191’을 생산해낼 무렵, 박정희가 그곳을 찾았다. 그 모델은 이미 인기폭발이었기 때문에 금성사는 여유있게 대통령을 맞이했는데, 그때 브리핑봉을 잡은 사람도 TV 개발책임자 김해수였다.
“김 과장, 아직도 과장이요?”
용케도 대통령은 첫눈에 그를 알아봤다. 이후 김해수가 성실한 엔지니어로 탄탄대로를 걸었음은 물론인데, 이제부턴 집안 얘기다. 그에게는 고명딸이 있었다. 1955년생 김진주, 이화여대 약대 졸업 뒤 백병원에 근무하던 그는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 그가 훗날 『노동의 새벽』을 쓴 2년 연하남 박노해였다. 부모는 펄펄 뛰었다. 금쪽같은 딸이 왜 고졸 출신, 그것도 노동자에게 시집을 가야하는가? 그게 부모 마음일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인사차 찾아온 박노해에게 김해수는 어렵게 결혼을 승락했지만 시대 자체가 사나웠다. 신혼부부인 딸과 사위는 노동운동에 헌신한다며 위장취업을 했다. 둘은 1987년 민주화항쟁에 한 몫 했고 그 뒤 나란히 감옥에 갔다. 1991년 봄 사노맹 사건이 그것이다. 억장이 무너진 아버지는 거실에 자랑스럽게 붙여놓았던 대통령 표창장을 떼어냈던 것도 그 즈음이다. 어지럽고 몹쓸 세상에 대한 환멸이 아니었을까?
더 가슴 아픈 것은 생애 만년의 그를 보는 딸과 사위의 심상치 않았던 눈길이다. 자신을 군사독재와 자본가의 협력자로 바라보는 듯했다. 세월이 흘렀다. 김해수는 2005년 타계했는데, 그 직전에 딸은 아버지 당신의 생애를 글로 남기시라고 권유했고, 아버지는 정성을 기울여 원고를 썼다. 그 열매가 8년 전 출간된 김해수의 유작 『아버지의 라디오』다. 그 책에는 김해수와 딸의 고백이 나오는데, 가슴을 저민다.
▲ 박정희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금성사가 살아날 수 있겠소? 무얼 도와드리면 좋겠소?” /사진=『박정희, 살아있는 경제학』(좌승희 著)의 표지 |
우선 아버지. 김해수는 평소에 “산업화 세대의 일원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자녀 세대에게 좀 더 든든한 물질적 기반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후손들이 산업화 세대를 항해 박수를 보내줄 것이라는 기대도 접어뒀다.”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 사이의 냉랭한 관계를 상징하는 안타까운 고백이다. 이어지는 건 딸의 발언이다.
“나는 민주화운동의 열풍 속에서 한때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미워한 적이 있었다. 우리 세대가 보기에 아버지는 비겁한 친일 협력자였고, 군사독재와 자본가의 하수인일 뿐이었다. … 감옥에 사는 동안에 나는 아버지의 시대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일제치하로부터 해방 정국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체득한 기술의 진보를 통해 아버지가 우리 삶의 지평을 얼마나 밝게 열어줬는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막연하게나마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서로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중간결론에 도달한 느낌이다. 하지만 미흡하다. 김진주와 박노해 부부가 과연 아버지이자 장인인 김해수와 박정희의 산업화 세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앞 세대의 위대한 성취를 끌어안고 있는가? 좀 더 뜨겁고 직접적인 고백은 나온 바 없다. 그리고 김해수의 가족사의 갈등과 비극은 지금 대한민국호의 갈등과 비극으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직도 김해수-박노해 집안의 갈등은 온전히 치료한 게 아니며, 산업화와 민주화의 갈등이란 대한민국의 과제는 온전히 풀린 게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걸 기미조차 아직은 없다. 모두 과거사를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탓인데, 여기까지가 한국사회의 인식 수준이다. 개발연대 우리 모두가 부익부 빈익부로 성장했던 것을 잊기로 작정했고 여전히 소모적인‘민주 대 반민주’그리고 ‘착취 대 수탈’의 이분법에 사로 잡혀 있다.
이런 엉터리 이분법 속에 이 땅에 숱했던 다양한 모습의‘전태일들’의 모습은 누구도 추적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 큰 의문은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다. 즉 일제는 해방 이전 이공계 인력을 철두철미 억제했다. 일제 36년 동안 배출됐던 이공계 대학생은 통틀어서 400명이다. 그중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6명. 반면 일본은 1940년 한 해에 이공계 졸업자가 6만 명에 가까웠다. 경성제대에 이공학부가 만들어진 것도 일제 말인 1941년이고, 해방되던 해까지 34명을 배출한데 불과했다.
그러면 1960~70년대 개발시대 제조업은 과연 누가 일으켰다는 얘기일까? 과학기술 인재를 길러낸 바 없는데 누가 엔지니어로 활약했단 말일까? 그걸 묻는 이가 없는 고약한 풍토가 이 나라다. 그저 착취 받다가 자살했다는, 예외적 인물 전태일만이 반복해 언급되고 그를 열사에 영웅으로 떠받들기에 바쁘다. 실은 그 시대는 또 다른 산업역군 그룹이 존재했고 그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사람들이 아닐까?
용접·배관·제관·전기·기계조립 기술로 중동현장의 손발 역할을 했던 숱한 기능사들, 기계공업의 정밀가공사 양성을 위한 많은 공고생 등 실업고 출신들, 기능올림픽을 휩쓸었던 직업훈련생 말이다. 이들 인적자원 배출의 첫 출발도 박정희인데, 그들을 키워낸 ‘교사 박정희’의 모습도 아무도 돌아보려하지 않는다. 일테면 산업 대통령 박정희는 지방순시 때 부산을 찾을 때면 해운대관광호텔을 찾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습관처럼 호텔 창문에 기대 한참이나 멀리를 쳐다보곤 했다.
그러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곤 했다. 부산기계공고 기숙사생 전원이 오전 6시에 일어나 작업장에 불을 켜고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또 보았던 장면이다. 전태일이 죽은 이듬해인 1971년 경북 구미의 금오공고를 설립한 이도 박정희였다. 재직 당시 네 차례나 그가 방문했던 이 학교에선 주물, 용접, 열처리, 단조 등의 현장교육을 시켰다. 전원 무료 기숙사 교육 등의 장학 혜택은 설립 직후부터 명문 소리를 들었는데 1976년 400명 모집에 126명이 중학교 수석 졸업자로 채워졌다.
▲ 지금 우리는 그 시대의 큰 진실을 놔둔 채 작은 진실에만 코 박고 있다. 전태일도 그렇지만, 조영래 붐도 그러하다./사진=『전태일 평전』(조영래 著)의 표지 |
자신감을 얻었던 정부가 금오공고 수준의 학교를 11개 증설했다. 이들이야말로 당시 표현으로 산업화의 주역이었다. 실제로 학교에서는 기름때 묻은 그들 작업복 왼쪽 가슴에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휘장을 걸어줬고, 틈나는 대로 이들을 방문했던 대통령의 얼굴에는 친자식을 끌어안는 듯한 흐뭇함이 섞여 있었다. 1977년 이후 1991년까지 종합우승 9연패라는 위업을 이뤄냈던 국제기능올림픽 싹쓸이도 그 뒷받침 때문이다.
중동 건설현장도 이들의 활약무대였는데, 이런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데, 거의 예외적인 게 1970~80년대 중화학공업 분야의 기능공들의 삶을 분석한 유광호 박사의 2년 전 박사학위 논문( <1970~80년대 양성된 중화학공업 부문 기능공의 계층이동에 관한 생애사적 연구>)이다. 유광호 박사의 논문 결론이 이렇다.
“농촌 중하층 출신의 청소년을 중화학 공업화에 필요한 숙련노동자로 변신시키지 않았다면 농촌의 잠재적 실업자인 농촌과잉인구로 퇴적되거나, 잘해야 경공업 부문의 半(반)숙련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이러한 대변화는 발전국가가 만난을 무릅쓰고 공업화, 그것도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결과다.”그게 진실인데, 이건 1960~70년대 개발연대 전체에 적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그 시대의 큰 진실을 놔둔 채 작은 진실에만 코 박고 있는 셈이다.
전태일도 그렇지만, 조영래 붐도 그러하다. 올해는 <전태일 평전>을 쓴 변호사 조영래의 25주기를 맞는 해이며, 오는 12월12일이 그의 기일(忌日)이다. 지금 그의 대표적 저술 <전태일 평전>과 조영래에 대한 평가는 식을 줄 모른다. “버스비를 털어 배고픈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었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그의 삶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전태일 평전』은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 감동적인 이 시대 최고의 고전입니다.”는 식의 찬사(소설가 공선옥)가 대표적이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다양한 조영래 추모행사가 추진 중인데,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22명의 인터뷰를 통해 일대기를 만들고, 인권 변론에 헌신한 변호사와 단체를 선정해 ‘조영래상’도 준비 중이다.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입구에 설치할 조영래 변호사의 흉상 제작도 완료했단다. 나는 이런 부산한 움직임에 별로 관심이 없다. 조영래 신화에 덮어놓고 감격하는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건 따로 있다.
폐암으로 사망하기 직전 몇 해 동안 그의 걱정은 민주화가 순수성을 잃은 채 좌파이념에 물드는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그건 그의 유고집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1991년)에 등장한다. 실제로 그런 걱정을 원로 언론인 남시욱 전 동아일보 기자 등에게 귀띔하곤 했다는 게 진실이다. 간혹 그걸 생각한다.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그리고 그가 정말 영민했다면 민주화 굿판으로 날 새고, 노동운동으로 난리인데다가 근현대사 문제로 온통 시끄러운 지금의 한국사회에 과연 뭐라고 할까? /조우석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