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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평화시장 여공의 눈물, 개발연대 이끈 항해사

2015-11-22 13:13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평화시장은 6.25전쟁 당시 남한으로 내려온 북한 피난민들이 이 지역에서 미싱 한 두 대로 옷을 만들거나 미군복을 염색, 탈색해 판매하던 것이 모태가 되었다. 판자촌으로 출발한 평화시장은 전쟁이후 청계천변에 노점상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본격적인 상권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1958년 이 일대의 대화재 이후 판자촌들은 사라졌고 1962년 지금의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평화시장’이라는 이름은 평화통일을 기리는 실향민들의 염원에 따라 붙여졌다. 평화시장은 개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치열하게 일하고 성공한 승리의 현장이었다. 현재 평화시장은 3개 층, 2070개 점포, 5300 여 명이 종사하는 평화시장(주)라는 기업형태의 56년 전통을 자랑하는 재래시장이다.

이에 자유경제원에서는 평화시장의 경제적·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자유경제원이 10일 오후 2시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 평화시장’ 토론회에서 참석한 전문가들은 “평화시장이야말로 대한민국 빈곤탈출의 표상, 고용 역사의 현장, 산업화 민주화의 조우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소”라며 입을 모았다. 아래 글은 발표자로 참석한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미디어펜은 조동근 교수의 발제문을 상, 하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아래 글은 하편이다. [편집자주]

 

   
▲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평화시장 여성노동자의 땀과 눈물: 대한민국 빈곤탈출의 조력자 [하]

5. 평화시장의 변모

1) 상가형성 초기 및 공장밀집 시기: 1950대말 1970년대 말

1950년대부터 이미 청계천번 판자집 2층에는 의류제조업체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6.25전쟁 이후 의류시장이 팽창하면서 1955년에는 내수의류의 60%가 이 지역에서 생산됐다. 청계천변의 공장들은 1961년 평화시장에 입주한 이후 70년대까지 업황이 좋아 주변에 계속 의류상가가 지어졌다. 1962년에는 동신시장이 1968년에는 통일상가가 69년에는 동화상가가 연이어 들어섰다.

평화시장 상가는 기능면에서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점포와 제조공장이 같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장만 있는 것이다. 평화, 동화, 통일, 동신, 종합, 신평화, 동문 등 7개 상가는 시장개설허가를 받아 점포와 제품공장이 같이 있는 상가이다. 반면 을지, 연쇄, 부관 및 을호, 성동 등은 공장만 있다. 그리고 중부 시장 주변에 공장이 산재되어 있다.

   
▲ <표-1> 1970년 청계천 주변의 의류시장의 공장 분포 및 노동자 밀집현황. 원자료: 전태일 평전(조영래, 1995), 주은선 재인용.

 

   
▲ <표-2> 1971년 평화시장의 규모별 의류제조업 사업장 수. 원자료: 장명준(1971), 주은선 재인용.

70년대에 의류산업은 내수확대와 의류수출 증가로 호황을 누렸다. <표-1>은 1970년 청계천 주변의 의류시장의 공장 분포 및 노동자 밀집 현황을 나타낸 것이다. <표-1>에 의하면 1970년 당시 최소한 550개 이상의 공장과 2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밀집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편 장명준(1971)은 4개 시장내 전사업장을 개별 방문해 사업장 규모별로 공장수를 계수했는바, <표-2>와 같다. <표-2>에 의하면, 전체 사업장 수는 564개이며, 상가공장 중 전체의 74%인 420개 업체가 10-19인이다. 1975년 청계피복 노동조합의 조사에 따르면 사업장 평균노동자 수는 17.2명이며 전체 노동자수는 약 2만 5천명으로 추정된다. 70년대 중반까지도 평화시장 전체 노동자 규모 및 평균 노동자 수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산량 변동은 공장 내 작업시간을 조정해 맞췄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통제가 쉽지 않은 하청생산을 선호할 이유가 없었다. 노동시간 조절을 통한 생산 유연성 확보 방식은 도급제-갯수급으로서 주로 미싱사들에게 적용됐다. 당시는 ‘객공제’도 보편화됐다. 객공제는 재단사나 미싱사가 일시적으로 회사에 고용되어 회사가 제공한 미상과 원단 및 부자재로 회사 작업장에서 생산하면서 개수임금을 받는 작업형태를 말한다. 1인에서 5인 정도를 자신이 직접 고용하면서 회사에서 받은 임금을 나눈다. ‘팀 단위’의 불안정고용형태로, 오늘날 ‘사내하청’과 유사한 고용형태이다. 당시 공장끼리의 계열화, 협력업체 지정 등을 통한 안정적 생산네트워크를 형성해 생산을 하지는 않았다.

(1) 급여 및 복지수준

가게와 공장이 결합되고, 생산공정은 한 공장 내에서 완결되었으며 임금, 노동시간, 복지 등은 사업주(가게주인)에 의해 사실상 결정되었다. 1973년 당시 월 2회 휴무인 업체는 절반에 못 미치는 46.5%로 조사됐다.

저임금 상황 하에서 임금수준 및 임금산정 방식은 직무에 따라 차별화되었다. 1971년 당시 이미 미싱사의 50% 정도는 객공으로 독립해 시다와 미싱보조를 거느리고 도급제로 일을 했다. 미싱사는 숙련에 따라 임금을 차별적으로 지급했다. 하지만 재단사와 시다는 고정월급제 였다. 이 같은 작업형태(고용형태)는 하청분화가 완결되기 전인 199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임금은 전반적으로 낮았다. 재단사와 숙련된 미싱사만이 ‘가족의 최저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임금을 받았고, 대부분의 미싱사, 재단보조, 시다의 임금은 이에 훨씬 못 미쳤다. 시다 임금은 ‘1인당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칠 만큼 인색했다. <표-3>은 1970년 평화상가 의류 노동자의 직무별 임금수준을 나타낸 것이다. 4인 기준으로 1973년 도시지역 최저생계비는 20,617원이다. 최저생계비를 100으로 보았을 때, 재단사 임금은 146%에서 742%이며, 재단보조는 15%에서 73%, 미싱사는 34%에서 121%, 시다는 9%에서 15%이다. 최저생계비는 식비를 중심으로 계산된 것으로, 말 그대로 생존임금 수준이다. 재단사만이 겨우 4인 가족의 생계비를 벌 수 있었다.

   
▲ <표-3> 1970년 청계의류 노동자 직무별 임금수준. 자료: 주은선 인용.

여공에게 2층 다락방을 공장 기숙사로 제공해, 급여에서 주거비가 제외됐다. 노동청이 1970년 11월 시행한 분진실태조사에서는 평균적으로 허용치를 1.6배에서 2.5배 넘었다. 의료보험과 최저임금은 아직 제도 도입 전이었으며, 산재보험과 근로기준법은 있었으나, 산재보험은 50인 이상 노동자만이 가입할 수 있었다. 근로기준법은 15인 이상 사업장 근로장에만 적용됐다. 따라서 대다수의 평화시장 근로자에게 사회보장 혜택은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다수 노동자가 ‘복지의 미(未)적용지대’에 놓인 것이다.16)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 분신이후 결성된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조직 강화를 거쳐 1975부터 1981년 강제해산 이전까지 일요일 휴일제 획득, 다락철거, 시다임금 사용주 지불 및 임금인상, 퇴직금 지급 등을 이슈로 활동했다.

2) 평화시장 공장 분산기: 1980년대

(1) 1980년대 초반

80년대 초반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분산기다. 동화상가는 1982년 약 250개에서 1985년 57개로 200여개가 감소했다. 이 같은 감소는 평화시장의 생산위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평화시장 주변에 밀집되어 있던 공장들은 80년대 이전에 이미 상당수 주택가로 분산되었다. 이들 공장은 중규모 이상의 기업들과 수직적 하청관계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청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아 보조적 역할에 머물렀다.17) 80년대의 여전히 지배적인 생산 방식은 하청보다 점포주가 공장을 소유한 가운데 작업량에 따라 생산물량을 조절하는 방식이었다.

이 시기에는 ‘팀생산과 객공제’가 일반화되었다. 객공제를 통한 팀작업에서는 미싱보조의 월급은 미싱오야가 직접 지급했다. 이때 사업주는 월임금을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장당 단가’를 정해 임금수준을 대강 정한다. 예를 들어 잠바의 장당 가격은 800원이다. 하루에 잠바를 30벌 만든다면, 사업주가 62만원(800원*30벌/일*26일/달)을 한 팀 앞으로 계상(計上)해 두는 식이다. 사업주가 시다오야와 시다에게 14만원, 12만원을 주고 나머지 36만원은 미싱오야에게 지불한다. 그러면 미싱오야는 15만원을 미싱보조에게 주고 자신은 21만원을 받는다. 이러한 임금체계는 대부분 여성인 미싱, 시다에게 적용되었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숙련을 갖춘 인맥으로 형성된 ‘객공제에 의한 팀생산’은 작업장의 규율 및 사업주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왔다.

남성직종인 재단, 재단보조, 시아게 등은 기본급이 있는 월급제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직무별, 성별로 임금선정 방식 및 임금수준 격차가 커졌다. 남성 재단사의 임금은 시다임금의 많게는 10배에 이르렀다. 임금 차별화 현상이 보다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이직이 증가했다. 이는 사업자의 규모축소 및 폐업 때문이 아니라 미싱보조에서 미싱, 재단보조에서 재단 등으로 직급을 높이는 이직이 많았다. 상위 직급으로의 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사업주에게는 ‘필요노동력을 확보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하지만 사업주는 임금을 올지지 않고 노동자의 급여통장을 보관하는 등의 편법을 이용했다.

   
▲ 동대문패션시장의 원조인 평화시장이야말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거대한 압축판이다./사진=평화시장 웹사이트 메인페이지 캡처

(2) 1980년대 후반

상가에 있던 공장들의 시장 주변 주택가로의 분산이 지속됐고 동시에 하청·재하청을 통한 수직적인 하청관계 확산이 가속화됐다.

공장 분산은 한편으론 저임금으로 인한 노동력 확보의 어려움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론 수출을 중심으로 하던 대기업들이 내수시장으로 이동하면서 평화시장의 판매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공정별로 분절된 하청생산이 일반화되기 전으로 기본적으로 80년대 초반에 형성된 생산네트워크가 유지되었다. 일종의 과도기인 셈이다. 이 시기는 청계노조가 81년 강제 해산이후 88년 다시 합법화되면서 평화시장의 작업시간, 임금 및 고용형태, 그리고 하청화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시도한 시기이기도 하다. 공장 분산은 사업주들이 노조활동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87체제로 넘어오면서 1989년 단체협상에서 임금과 관련해 제기된 것은 2가지이다. 1989년 임금협약은 평화시장 최초로 감행한 101개 사업장의 연쇄파업 끝에 도출된 것으로 획기적인 임금 인상안이다. 인상안의 주요 내용은 하나는 임금수준을 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급제의 월급제로의 전환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노동시장 전반에 통용되는 임금체계가 노조의 역량에 의해 도급제 노동에 까지 그 영향이 미쳐진 것이다.

1989년 5월 노총에서 발표한 1인당 최저생계비는 33만원, 2인당 최저생계비 47만원이다. 이를 기준으로 평화시장 지역 의류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살펴보면, 시다 중에서는 A급, 미싱사 중에서는 A, B급만 최저 생계비 이상의 임금을 받았다. 나머지는 최저생계비 미만의 임금을 받았다. 노조 합법화 이후 청계노조는 10시간 정착을 위한 ‘시간단속반 활동’을 벌였다.

노조는 도급제 확산 및 객공증가에 대응해 도급제의 월급제, 기본급 도입, 객공의 월급화, 근속수당 도입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의 급속한 하청제 확산과 공장 분산으로 노조의 역량만으로는 주택가 구석구석으로 분산된 영세사업자의 노동 조건까지 포괄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조는 노동자가 파업하면 일감을 하청공장으로 빼돌리는 사업주의 전략에 맞서야 했다. 신설동, 신당동 등지의 하청공장과 연계해야 파업이 성공할 수 있었다. 하청확산에 따른 하청공장과의 연대 문제가 쟁점으로 제기됐다. 노조활동은 합법화되었지만 ‘의류생산의 특성상’ 노조가 활동역량을 결집시키기에는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다.

한편 산재보험 적용범위 확대, 89년 의료보험 도입, 최저임금제 도입 등의 국가 사회보장 제도가 갖춰지면서 평화시장 노동자들에 대한 의무적용 조항이 늘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0인 이상’ 조건으로 실제 적용은 그리 크지 않았다.

3) 평화시장 공장 해체 및 공장 분산 완료: 1990년대 초부터 1997년까지

이 시기에 평화시장 상가 공장 해체 및 주변지역으로의 분산이 완료되었다. 하청관계의 복잡화와 하청업체 역할의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평화시장 상가 내 공장 및 노동자 수는 1988년 119개, 1500명에서 1992년 35개 사업장, 228명의 노동자로 크게 감소했다. 사업장의 소규모화가 동시에 진행됐다. 1975년 사업체 평균규모가 17.5명이었던 것이 대부분 4-7인으로 줄었다.

작업장의 분화가 심화(극단화)되어 생산공정 별로 아예 다른 사업장으로 분리되는 작업형태가 나타났다. 재단판만 유지하는 업체의 경우, 재단사만 남기고 전 생산량을 하청으로 돌렸다. 어떤 경우는 재단도 독립시켜, 업주가 원자재와 부자재를 공급하면 재단사가 하청업체를 연결해 봉제 및 마무리 작업을 한 후 완제품을 납품하는 완제하청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는 ‘청계천 평화시장’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한편 디자인, 재단, 봉제, 시아게가 각각 다른 사업장에서 이뤄지는 부분하청이 성행했고, 이로써 영세 하청업체들은 더욱 증가했다. 부분하청과 완제하청의 증대에 따라 생산과 유통은 더욱 확실하게 분리됐다. 하청단위의 분화 및 영세성 심화로 제조원가 중 외주가공비 비중은 86년 19.1%에서 95년 30.6%로 증가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기존의 평화시장 주변 지역단위에서 완결적이던 생산 및 유통의 네트워크를 서울의 북부와 동부로 확산시켰다. 90년대 평화시장 주변 지역의 하청단위 분화18)는 평화시장 주변 지역의 지역적 정체성을 변화시켰다. 평화시장 주변의 주택가, 즉 창신동, 충신동, 숭인동 등 일대가 단순한 주택가가 아닌 가내하청 밀집지역이 되면서 자체 연결망에 의해 물량확보 및 공임설정 등의 경제적 기능이 수행되었다.

   
▲ 자유경제원이 10일 오후 2시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 평화시장’ 토론회에서 참석한 전문가들은 “평화시장이야말로 대한민국 빈곤탈출의 표상, 고용 역사의 현장, 산업화 민주화의 조우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소”라며 입을 모았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사진=자유경제원

생산네트워크의 변화. 공장노동자의 영세하청업자 또는 객공으로의 전환, 영세사업장 피용자로의 경제활동 형태 변화는 그 나름의 생산연결망을 통해 협업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변화가 평화시장 관련자의 복지수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이러한 변화는 하청단계별 종사자들의 수입 차이를 크게 벌려놓았다. 이로써 임금불안전성이 증폭되었다. 재(再)하청단계에서는 임금체불이 이루어져 임금 불안정성이 더욱 커졌다. 과거 회사에 고용됐던 숙련노동자들이 ‘임노동 관계’를 벗어나면서 경기부침에 더욱 종속되었다. 하청관계 확산으로 소생산자로 분해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불확실성을 안아야 했다.

다단계 하청계열화가 일반화되자 하청을 통해 고용관리 비용을 중소 영세업체에 떠넘겨 대기업이 이윤을 독점한다는 비난도 일었다. 한편 하청계열화로 근로기준법 준수, 사회보장제도 적용확대 등을 요구했던 노동조합은 ‘연대의 고리’가 끊겼다. 이는 평화시장 지역 노동자들이 공식노동부문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가 파괴됨을 의미한다.

생산단위 소규모화로 직무구분이 흐려지면서 80년대 후반의 단체협상을 통해 정해진 직무별 임금체계는 유지될 수 없었다. 한편 생산단위의 소규모화는 무등록사업장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1988년 상용직 1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도입된 국민연금, 1999년 5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하는 산재보험, 1996년 3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고용보험, 10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되는 최저임금제 등 보호장치가 평화시장 노동자에겐 사실상 그림의 떡이었다. 사회보장 제도는 도입됐지만 사업장의 분산 및 소규모화, 제도 자체의 포괄성 부족 등으로 평화시장 노동자에겐 실제 도움이 되지 않았다.

4) IMF체제 돌입에 따른 사실상의 해체

IMF 구제금융은 한국사회 구석구석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의류는 대표적인 과잉생산 품목으로 이미 재고가 쌓여있는 있는 데다 극심한 경기침체에 따른 소득감소로 가장 큰 소비위축을 경험한 품목이기도 하다. 의류제조의 하위하청을 맡았던 봉제노동자들의 삶은 그만큼 강팍해졌다.

IMF 위기로 사업장 규모가 감소했다. 창신 2동 의류사업장 202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98년 8월 사업장 종업원 규모는 1년 전에 비해 4.33명에서 4.06명으로 0.27명 감소했다. 일감이 부족해 생산물량이 줄면 하위 하청업제가 가장 먼저 일감을 잃게 된다. 5인 미만 사업장은 고용보험 가입이 제외되어 영세의류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사회적 안전망의 밖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영세사업장 사업주에 대한 고용보험 적용제외도 미(未)적용지대를 늘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사업자와 피용자의 고용상의 지위 전환이 잦고 노동 강도 등에서 별 차이가 나지 않지만 사용자라는 이유만으로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다.

   
▲ 한국은 반세기 만에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변한 유일한 나라이다. 한국은 누대에 걸친 가난과 빈곤에서 탈출한,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의 모델국가이다./사진=자유경제원. 윤서인 작.

 

6. 요약 및 결론

생산네트워크를 기준으로 평화시장의 형성 및 확대 그리고 사실상의 해체는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공장과 평화시장 상가의 가게가 동일한 자본에 의해 운영됐다. 지역노동자의 주거 등 일상생활부터 임금, 고용관계 등 경제활동 전반이 개별 사업주에 의해 통제되었다. 둘째, 1980년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이다. 공장이 평화시장 주변 주택가로 분산되고 수직적 하청관계가 급속도로 형성되었다. 노조는 1981년 강제해산 되고 1988년 다시 합법화된 후, 작업시간이나 임금, 폐업 및 집단해고 등 하청화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시도했다. ‘자본 측’의 분산 및 노동력 비공식화 전략과 ‘노조 측’의 미조직노동자의 조직화 및 공식적인 사회보장 확보 전략이 맞부딪친 시기이기도 하다. 셋째, 1990년대로 평화시장 상가 공장 해체와 공장 분산이 완료된 시기이다. 즉 수직적 하청관계 형성을 통한 의류생산이 전면화된 시기이다. 생산 공정별로 담당업체가 분화되어 2차, 3차 재하청등 사외하청이 확산되었고 동시에, 한 업체에서도 객공제나 소사장제를 통해 사내하청이 일반화되었다.

고용관계는 크게 변했다. 70년대 이미 활성화된 객공 생산 등 사업장내 분화에다 80년대 후반부터 하청 및 재하청 등 사업장끼리의 수직적 하청관계가 중첩됨으로써 많은 피고용자가 영세사업장의 사업주 또는 가내 하청노동자 등으로 변했다. 70년대 80년대 지역노동자들의 경제적 정체성은 변화되었다.19) 노동시장이 분절화 됨으로써 기본금 확보는 좌절되고 임금형태는 도급제가 더욱 고착화되었다.

이는 사업장 또는 상가 내에서의 노사관계의 틀 속에서 결정되었던 임금 및 고용 형태 등이 하청 네트워크를 통해 ‘자본대 자본’의 관계의 틀에서 결정됨을 의미한다. 이는 저임금과 통제에 따른 장시간 노동에서 하청관계의 위계열위 및 낮은 단가에 따른 장시간 노동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사업장 단위의 소규모화 및 무등록화로 사회보장 혜택의 미(未)적용지대에 잔류하게 되었다. 전태일 열사가 성토한 평화시장 노동자의 열악한 임금 및 근로조건은 노동조합이 합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개선되지 않았다.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은 노조탄압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평화시장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질적 변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산업혁명 이후 전개된 사회를 ‘자본주의’라 부르며, 그 사회는 부유한 자본가만을 위한 사회라고 했다. 70년대 평화시장의 여공의 삶을 목도하면서 일각에서는 ‘상투적’인 자본주의 모순을 외쳤을 수도 있다. 평화시장 여공의 삶이 궁핍했던 것은 누가 착취를 해서가 아니라 그 이전 시대로부터 가난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같은 가난은 일거에는 아니지만 조금씩 극복됐다.

70년대에는 노조활동이 제약되어 저임금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전태일 열사 이후 그리고 1987년의 87체제 이후 노조활동은 만개했다. 그렇다면 평화시장 노조원의 살림형편은 크게 나아졌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노조가 안정된 일자리와 소득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여공은 피해자 인가. 아니다. 70년대 중반 평화시장의 여공은 최대 2만 8천명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나름의 ‘성공 사다리’를 탔다. 돈을 벌고 기술을 배우고 또 일부는 자신의 사업을 일구었다. 만약 당시 평화시장 여성노동자의 현재의 삶을 추적한다면, 그들은 거의 대부분 중산층 이상에 속해 있을 것이다. 여공으로 일해 벌어 놓은 돈이 밑천이 돼서는 아닐 것이다. 가난과 맞서면서 키운 ‘시장에서의 전투력’이 그녀들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평화시장의 봉제공장은 이제 아스라한 역사 속의 추억이 돼가고 있다. 개발연대에 평화시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흘린 어린 여공의 땀과 눈물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번영의 일부를 설명하고 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저술한 역사학자 에드워드기번(Edward Gibbon)의 '바람과 파도는 언제나 가장 유능한 항해사의 편‘이라고 했다.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들은 인생여정에서 나름의 유능한 항해사였다. 가녀린 여성근로자의 한국 경제 번영에의 기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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