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88'. 국내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이고 근로자의 88%가 중소기업에 취업하고 있다는 사회적 통론이다. 이 말처럼 국내 경제인구의 절대 다수가 중소기업과 관련이 있다. 중소기업이 건강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경제는 건강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청년 실업률은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최악의 청년실업난이라고 아우성인데 정작 중소기업은 사람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 청년실업률은 1.1% 외환위기 이후 15년 7개월만에 최고 수준이다. 청년 일자리는 없고 중소기업은 인력이 없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구직난 속 구인난'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는 2015년 겨울, 중소기업이 직면한 현실과 기대의 경계선을 뒤쫒아본다. <편집자주>
[긴급진단 - 중소기업 인력난①] "인력 없다" 노심초사 vs "할말 많다" 아우성
[미디어펜=김세헌·고이란·정단비기자] 지난 27일 오후 초겨울 찬바람이 부는 인천 남동공단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싸늘하다. 이곳에서 만난 한 플라스틱 가공업체 이모(남·56세) 사장의 얼굴엔 시름이 가득했다. 그는 최근 직원 채용과정에서 20여명의 지원자와 면담을 진행했으나 한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적당한 인물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 사장은 “요즘과 같이 구직난과 구인난이 공존하는 데는 기업체의 책임도 있지만 구직자들도 기업이 원하는 수준의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한탄했다.
이에 반해 남동공단에서 멀지 않은 인천 논현동에 살며 6개월째 구직활동에 매달리고 있는 구모(남·31세)씨의 생각은 사뭇 달랐다.
이날 취업교육 프로그램 지원을 위해 남동공단 내 인천상공회의소를 찾은 구씨는 “애초 기대 연봉보다 700만원 정도 적은 수준의 직장을 찾고 있지만 이마저도 찾을 수가 없다”며 “기업이 근무환경개선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구직자들의 눈높이만 탓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 경제한파와 청년인력 부족으로 중소기업이 어려움에 처한 가운데 지난 27일 인천 남동구 한국산업단지 남동공단에서 구인·구직 전단지만 무심하게 붙어있다./사진=미디어펜 고이란 기자 |
같은 날 경기도 시흥시 시화공단에서 만난 김모 사장(남·53세)도 구인난에 허덕이기는 마찬가지. 기계·자동화 장비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그의 일과는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업무 외에도 자주 시간을 내 지역 인력사무소와 생활정보지업체, 평소 알고 지내던 관련분야 기술자 등을 몸소 찾아다니고 있었다.
김 사장이 이처럼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유는 최근 협력업체로부터 제품 주문물량이 부쩍 늘어서다. 현재 직원 7명이 매일 밤을 새우며 제품생산에 매달리고 있지만 협력업체에 주문물량을 제때 납품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다.
시화공단에서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3개월 전 일자리를 잃은 사회초년생 박씨(남·28세)도 마음고생은 심하지만 김 사장과는 다른 사정이다. 대학 재직 당시 건설기계와 일반기계기사 자격증을 취득한 김씨는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해 고용노동부 일자리지원센터에 구직신청을 해놓은 동시에 각종 취업포탈 구인광고를 틈틈이 챙겨보고 있다.
그는 첫 직장에서의 기계설계관련 분야 근무경험을 살릴 수 있고 연봉이 3000만원 수준인 직장을 찾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음에 드는 새 직장을 찾지 못했으며 구직신청을 해 놓은 곳에서조차 연락이 없다고 했다.
사람을 찾는 중소기업 CEO와 구직자 간 미스매치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격차, 구인·구직난 공존 가속화?
각 지방노동사무소 등 관련기관 취업알선센터 창구와 인터넷 구인·구직코너에는 요즘도 사람을 구하는 사람과 직장을 구하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기업, 특히 중소기업의 인력난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 반면 구직자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 지난 27일 인천 남동구 한국산업단지 남동공단에 위치한 한 엔지니어링 공장에 작업이 한창이다. 공장 직원 대부분이 40대를 훌쩍 넘긴 중장년층이다./사진=미디어펜 고이란기자 |
반면 일부에선 구씨의 이야기와 같이 “구직난과 구인난 공존의 이유는 기업에 있다”는 주장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가 해가 갈수록 계속 벌어지는 등 중소기업이 열악한 근무환경 개선노력을 회피하고 있어 구인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지론이다.
사실 최근 수년 동안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비교해 임금이 급감하는 등 양극화가 심한 편이다. 중소기업 근로자의 월급은 매년 오르고 있지만 대기업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
중소기업연구원이 지난해 8월 발간한 ‘최근 중소 제조업의 주요 위상지표 변화 원인 및 시사점’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주요 경영 지표에서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격차는 더 커졌다.
중소 제조업의 월평균 임금은 2008년 223만2000원에서 2013년 273만9000원으로 소폭 늘었으나 대기업과 격차는 2008년 179만6000원에서 2013년 244만원으로 더 벌어졌다.
중소 제조업체 종사자 수는 2007년 220만명에서 2012년 236만명으로 늘었으나 대기업을 포함한 전체 종사자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은 76.9%에서 76.4%로 제자리에 그쳤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5월 발표한 ‘2015 중소기업 위상지표’도 내용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중소기업 근로자의 평균 월급도 대기업보다 183만원 가량 적은 284만원이다. 중소기업 월급은 2007년 242만6000원에서 지난해 283만6000원으로 7년 만에 약 40만원 오르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대기업 월급 인상폭은 100만원에 이른다.
대기업은 2007년 374만4000원에서 2010년 처음으로 400만원선을 돌파했다. 지난해 월급은 467만8000원을 기록했다.
▲ 자료=중소기업중앙회 |
전체 사업체 가운데 중소기업의 비중은 2013년 기준 99.9%를 기록했다. 종사자 수는 전체 고용의 87.5%를 차지했다.
이와 함께 고용난과 구직난 공존의 원인이 정부의 실효성 없는 실업대책 남발이라고 지적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눈높이' 문제 앞서 정부·기업 역할 중요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구직난과 구인난이 구직자와 구인업체, 정부 당국의 책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며 이같은 삼중고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3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인력난을 겪고 있는 분야는 고급 전문기술직이거나 주물, 용접과 같은 숙련된 기술을 요구하는 기반 사업이 해당된다. 이같은 분야의 경우 아무리 실업자가 많아도 하루아침에 전문기술을 습득해 취업할 수 없기 때문에 구직난과 구인난은 해소되지 않은 채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구직자들이 단순히 더럽고 어렵고 힘든 이른바 ‘3D’ 업종을 기피하고 높은 임금만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구직난 속 구인난이 계속된다는 것은 이제 잘못된 통념이라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아울러 직장들의 눈높이만 낮춰 구직난과 구인난을 해소한다면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많다.
결국 구인난과 구직난의 궁극적 해법은 기업의 안정성과 발전성이 확보되는 방향으로 경영환경이 개선되도록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과 기업의 노력이 필요하며, 여기에 구직자의 노력이 동반돼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노동연구원 한 관계자는 “구직자들이 직장을 선택하는 데는 임금수준과 함께 근로환경, 기업의 발전성, 직업의 안전성 등이 크게 작용한다”며 “구직난과 구인난을 함께 해소하기 위해서는 구직자들이 눈높이를 낮추기에 앞서 기업의 발전성 등이 먼저 충족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 “구직자가 적극적인 자기개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업이 근무환경을 개선하고 미숙련공을 숙련공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자체 교육프로그램을 갖춰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