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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 왜 그는 최고 퍼스트레디인가

2015-12-08 08:55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올해는 육영수 여사 탄생 90주년이 되는 해다. 1925년생인 그는 양력 11월29일이 탄신일. 그날 고향인 충북 옥천군이 주관하는 숭모제가 현지에서 열렸고, 육영재단 어린이회관이 주최하는 어린이축제가 서울 능동에서 3일 동안 벌어졌다. 그와 별도로 전국 단위의 추모음악회가 이번 주말 서울 여의도 전경련 콘퍼런스센터에서 열린다. 주최는 육영수영부인추모상건립위원회(회장 이경재). 본래는 탄생일에 맞춰진 음악회였으나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와 겹치는 바람에 뒤로 미뤘다. 떠난 지 40년을 넘긴 지금도 영원한 여인상이자, 으뜸가는 퍼스트레이디로 자리 잡은 고인을 위해 당신이 숨졌던 장소인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 추모동상 한 점이라도 건립하자는 국민운동을 겸한 모임이다. 생각해보니 육 여사 동상 하나 없는 곳이 이 나라다. 생전에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조차 자서전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육 여사는 국모(國母)라 불러 손색없다”고 털어놓았을 정도이고, 그런 정서는 국민들 사이에 여전하다. 그런데도 한국사회가 왜 이렇게 모질까? 위선에 가득 찬 지식사회, 강팔라진 우리의 마음이 만든 풍토 때문이리라. 이 참에 미디어펜 주필 조우석이 우리현대사의 한 부분이기도 한 육영수와 박정희, 둘 사이 삶과 사랑을 추모 칼럼으로 썼다. 고정관념과 전혀 다른 이 이야기는 6년 전 펴낸 단행본 <박정희 한국의 탄생>(살림) 수록 내용을 수정 보완했다. <편집자주>

   
▲ 조우석 주필
“이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간다는 게 될 법한 소리야?”
처녀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은 참을 수가 없었다. 딸은 결혼을 끝내 강행할 태세였지만, 자기는 뭐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우선 전쟁통이 아닌가. 결혼 말이 오가던 것은 1950년 8월 하순.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2개월이고, 전후방은 위기일발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밀려 있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승리한다는 것은 어쩌면 요행에 가까운 일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사윗감 상대는 전쟁터 일선의 군인이다. 딸이 전쟁미망인이 될 가능성도 있지만, 키 작은 영관 장교 박정희도 미덥지 못했다. 집안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결혼의 앞뒤 상황은 이랬다.
“제발 단념하고 장가나 드십시오.”

당시 육본을 따라 대구와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근무하고 있던 짝 없는 서른 셋 박정희를 보고 군 후배들은 예전의 동거녀이자 약혼자 이현란을 잊으라고 성화를 했다. 그때 휘하 장교의 하나가 대구사범 1기 후배인 송재천이다. 옥천 출신이던 그가 퍼뜩 떠올린 것은 자기 동네 큰 부자인 육종관의 딸이었다. 마침 그 영감이 아내와 딸을 거느리고 부산 영도로 피난차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일본식 2층 집에서 세 들어 사는 와중에 육영수와 박정희는 짬을 내 만났다. 정식 맞선은 아니었으나 본인의 표현대로 ‘목이 길고 고상하게 생긴 처녀’에게 박정희는 대번 호감을 느꼈다. 곧바로 영도의 피난집을 찾아 육종관, 이경령 부부에게 인사를 드리는 절차를 밟았는데, 그건 박정희가 대단한 호감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피난지 생활에서 이런 절차를 기꺼이 허락했던 여성 육영수도 남자가 마음에 꽉 찼다.

박정희, 육영수의 약혼과 결혼식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혼식은 그해 12월 12일. 만남 4개월이 안 되던 시점이다. 예식은 대구 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올려졌다. 박정희가 전쟁 중에 결혼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전투에 직접 노출되지 않은 정보장교였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전쟁통에 평범한 일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현실적 이해를 따지지 않는 운명적·낭만적 사랑이 결혼으로 골인했던 경우다.

콩깍지가 씌워졌던 둘 사이, 그것도 양가 부모들의 동의가 애매했던 둘 사이의 결합은 불안정한 신혼으로 연결될 소지가 꽤 많았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축복받지 못한 커플의 교제 과정을 유심히 지켜본 사람이 육영수의 조카 홍소자였다. 육인순의 둘째 딸로 나중에 청와대에서 육영수를 보필했던 그는 둘 사이의 신혼살림 분위기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고모 육영수는) 부끄럽다거나 내숭 있는 표정이 아니라 맑고 투명한 표정으로 박정희씨를 맞이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 전시의 들뜨고 불안하고 뒤죽박죽이던 시절에도 안정되고 자신감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연애시절은 젊은 청춘남녀의 불타는 사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인네들의 로맨스도 아니고, 참 신기했어요. 성숙된 인격의 만남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훗날 와서 생각합니다.”

육인순은 두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서로 충만하게 보일까 생각했다지만, 박정희 개인사로 보자면 ‘구원의 여인’이 출현한 것이다. 오랜 아픔과 상처를 씻어주고 달래줄 득의의 카드였다. 박정희 삶에 영향을 줬던 여자는 김호남, 이현란, 육영수 셋이지만 깊은 정서적 안정감을 선물해준 것은 육영수가 유일했다.

육영수를 만나기 5년 전 상황을 잠시 떠올려 보라. 해방 정국에서 박정희는 ‘계급장 떼인 만주군 중위’였다. 백수로 급전직한 뒤 조선경비사령부 입학과 국방군 장교로 임관한 전후에도 연신 흔들리며 남로당 가입 등으로 헤매고 있었던 참이다. 1948년 숙군 사태 때, 즉 결혼 2년 전까지도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 형을 선고 받으며 인생 최악의 터널에 빠졌는데, ‘좌절의 3년’을 빠져나오던 국면과 육영수의 등장은 완벽하게 일치한다.

   
▲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생전 모습. 전쟁통에 만났지만 박정희, 육영수의 약혼과 결혼식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혼식은 그해 12월 12일. 만남 4개월이 안 되던 시점이다. 두 사람의 운명적·낭만적 사랑이 결혼으로 골인했던 경우다. /사진=연합뉴스
지옥 문턱의 남자에게 손을 내민 여인

결과적으로 육영수는 축복이었다. 말 그대로 박정희를 위한 베아트리체였다. 박정희의 부활 체험을 완성시켜준 사회배경은 한국전쟁이라는 대사건인데, 그럼에도 불안정했던 그의 심리는 구원의 여인을 만나며 온전히 치유될 수 있었다. 박정희 스스로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결혼 4년 뒤에 쓴 일기에 자기 아내를 “내 마음의 어머니”로 서술한다.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안에 우물 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 보다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다.”

일상생활에서 남편은 아내를 그렇게 살뜰하게 대했지만, 육영수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키 작고 새까만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처음 만남 때의 일시적 감정이 아니었다. 그 과묵한 남자는 육영수의 존재 이유로 등장했다. 그 어려운 1950년대 살림에도 맑은 성격의 육영수는 재봉틀을 돌리며 남편 사랑을 노래 불렀다. 집안사람은 하도 많이 들어 줄줄 따라 외웠을 정도였다.

검푸른 숲 속에서 맺은 꿈은
어여쁜 꽃밭에서 맺은 꿈은
이 가슴 설레어라
첫사랑의 노래랍니다
그대가 있었기에 그대가 있었기에
나는 그대의 것이 되었답니다
그대는 나의 것이 되었답니다

흔치 않은 연분이다. 육영수와의 축복 받은 인연은 박정희의 삶에 긍정적 요소로 작용했는데, 우선 강팔랐던 이미지를 씻어줬다. 그녀 없는 박정희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이런 관계는 1936년 부모가 맺어준 첫 아내 김호남과 너무도 달랐다. 육영수란 평생 반려의 등장 이후 오랜 상처를 다스려주는 훌륭한 치료제였다. 한국사회에 드리워진 전근대적 질곡을 거두기 위해 나섰던 몸짓이 1961년 쿠데타라면, 개인사에 드리웠던 먹장구름은 11년 전 육영수와의 결합을 통해 치유됐다.

실은 박정희 시작품이 갖는 중요성을 눈여겨본 사람은 정치학자 고(故) 전인권(1957~2005)이다. 지금까지 나온 책 중에서 가장 중립적인 박정희 평전을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던 그는 이 논문에서 우리의 통념을 바꿔놓았다. 박정희는 무엇보다 시적(詩的)인 인간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상황을 압축해 설명해내는 능력, 때로는 객관적 사태에 대한 관심을 생략하면서도 무엇보다 극적인 설명을 즐기는 글 솜씨야말로 ‘시적 인간 박정희’의 특징이다. 사석에 했던 육영수의 말도 그걸 뒷받침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소설을 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남긴 시 중에서 아내 사랑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것은 1952년 7월 완성한 작품이다.

당시는 부산정치파동의 소용돌이가 막바지에 달했던 무렵이다. 당시 박정희는 ‘5.16 선행학습’을 하고 있었다. 군 병력을 움직여 이승만에게 타격을 줄까를 망설이던 초미의 상황, 다른 데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완성한 서정시는 잠든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에 도취한 한 사나이’의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바깥일을 한다는 사내란 다른 것에는 등한시하는 법이 아니던가! 그것도 섬세한 애정고백을 시로 남기다니! 그것도 무려 반세기 전이다. 당시는 첫딸 근혜의 백일잔치 뒤라서 아빠이자, 남편의 뿌듯한 마음을 가늠 못할 것도 아니다. 한밤 잠든 아내를 지켜보는 박정희의 시선이 느껴진다.

밤은 깊어만 갈수록 고요해지는군.
대리석과도 같이 하이얀 피부
복욱한 백합과도 같이 향훈을 뿜는 듯한 그 얼굴
숨소리 가늘게, 멀리 행복의 꿈나라를 거니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
잠든 얼굴 더욱 예쁘고 평화의 상징! 사랑의 권화!
아! 그대의 그 눈, 그 귀, 그 코, 그 입
그대는 인(仁)과 자(恣)와 선(善)의
세 가닥 실로써 엮은 한 폭의 위대한 예술일진저(중략)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 이 찰나가
무한한 그대의 인력으로써 인생 코스가 되어 주오(하략)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보고’

전형적인 낭만파 사랑의 시이다. 아내를 “한 폭의 위대한 예술”이라며 찬양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알아왔던, 무뚝뚝한 남자 박정희 이미지와 다르다. 작품에 표현된 정서의 성격도 잘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살갑고 호흡이 잘 맞았던 사이인 박정희·육영수 커플은 유례가 드물게 금슬 좋은 부부다. 그러나 인간 삶은 영속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아내를 살뜰히 챙기던 박정희에게 1974년 여름 아내의 돌연한 타계, 그것도 괴한의 총탄에 맞았던 충격이란 가늠하기 힘들다. 감정이 북받치는 상황에서 아내 추모는 산문시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이 앉았던 의자 당신이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보세요” “어디 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 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 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 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 수가 있으리.”

당시 박정희는 거의 보름 간격으로 짝 잃은 남편의 속울음을 시로 써댄다. 당시 쏟아냈던 10편 가까운 작품 중 대표작이 1974년 9월에 쓴 앞의 산문시다. 둘의 만남이 갖는 의미는 개인사 차원을 훌쩍 뛰어 넘는다. 한국사회는 육영수를 영원한 여인상으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훗날 청와대의 안주인이 된 그녀는 깔끔한 내조로 현대 한국 여인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으뜸가는 퍼스트레이디로 남아있지 않은가!

   
▲ 29일 충북 옥천서 열린 육영수 여사 탄생 90주년 숭모제에서 어린이들이 전통무용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여인의 원형으로 떠오른 ‘육영수 매직’

“육영수 여사는 자기 역할에 대한 정리가 돼 있는 분이다. 대통령에게 ‘밝은 귀’가 돼 드려야겠다는 생각과, 국민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이다. 권력을 즐기는 행세 등으로 원망을 사서는 안 된다는 조심성 때문에 늘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나는 육 여사를 수행하면서 한 번도 그분이 차에서나 행사장에서 의자에 등을 기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오만하게 보이지 않을까 신경을 썼다.”

청와대 2부속실 비서관 김두영의 증언은 국민 마음을 빼앗은 ‘육영수 매직’을 보여주는데, 핵심은 섬세함과 사려 깊음이다. 항간에서는 대통령이 육영수에게 재떨이를 던지며 부부싸움을 했다느니 하는 미확인 소문이 떠돌기도 했는데, 그런 때마다 육영수 식의 조용한 해법이 돋보였다.

일부러 사람들을 접견해 텔레비전 화면에 얼굴이 내비치도록 했다. 자연스럽게 소문이 가라앉도록 배려한 것인데, 사려 깊은 처신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1973년 가을 박지만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청와대 관계자가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상급생에게 얻어맞은 것이었다. 저녁 무렵 육영수가 그 관계자에게 전화했다.

“아까 지만이한테 왜 맞았느냐고 물으셨다면서요?”
“예. 그랬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런 건 왜 물으세요.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가시면 어떨까요? 제가 가슴이 얼마나 아픈데…….”

학교에서는 뒤늦게 대통령 아들이 맞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발칵 뒤집혔지만 육영수 여사는 “모른 척 해달라”라고 다시 신신당부를 했다. 그의 진면목이다. 그런 섬세함은 1970년대 초 김두영에게 털어놓았던 말에서도 엿보인다.

“청와대에서 나오는 기사를 보면 ‘박종규 경호실장과 김정렴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수행했다’는 내용이 대통령 관련 기사에 항상 붙어 다니는데 국민들이 읽으면 식상할 것 같아요. 대통령이 움직이면 의례히 수행하는데 그 사실을 꼭 기사에 담아야 하나요? 그러지 않아도 대통령 측근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김두영은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언론기관에 협조를 의뢰했다. 낡은 기사의 패턴이 바로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자세, 사안이 발생할 때는 극도로 섬세하게 처리하는 현명함은 육영수의 사람됨에서 나왔다. 국민들의 감동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74년 여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조총련 문세광의 총탄을 맞고 비명에 간 다음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비극적 죽음은 길지 않은 49년 삶을 국민들에게 더욱 아름답게 기억하게 만들었다. 젊은 아내 육영수는 박정희 통치행위에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눈에 안 보이는 형태로 조력을 한 탓이다. 많은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았던 고 김수환 추기경이 육영수를 가리켜 “국모라고 불러도 손색없다”고 자서전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털어놓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실은 그 이상이었다. 육영수는 현실정치의 변수였다. 청와대로 들어오는 많은 민원 진정서를 처리하면서 통치의 한 축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숫자는 많지 않지만 청와대 제2부속실의 스태프를 거느리며 민원 접수 등 고유 업무를 챙겼으며, 일부 고위직을 견제하는 등 눈에 안 보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0년대 초반 대통령의 민의수렴과 정보 수집 채널은 정보부, 보안사, 육영수 세 갈래로 나눌 수 있었다고 털어놓은 증언이 있을 정도다. 청와대 내 권력의 한 요소라서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등 권력 요직에 오르내리던 이후락, 김형욱 등의 인사에도 간접적인 입김을 발휘했다. 특히 그는 이후락, 김형욱 등 권력형 인사들의 천적이었으며, 실제로 그들에게 노골적인 비호감 의사를 드러냈다.

육영수가 가졌던 ‘작은 힘’의 위력은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욱 잘 드러난다. 1974년 8월 그가 비극적으로 타계한 뒤 유신체제는 지나치게 살벌하고 경화되는 쪽으로 흘러갔던 것도 사실이다. 육영수의 매직의 힘은 막상 그게 사라지고 난 다음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섰던 것이다. /조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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