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전기차(EV) 시장의 수요 정체(Chasm) 장기화로 국내 배터리 업계들이 로봇을 차세대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낙점하고 전략 재편에 나섰다. 로봇용 배터리는 고출력과 극한의 안전성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어 배터리사들은 각기 다른 기술적 접근법으로 시장 선점에 속도를 내고 있다.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차세대 전동식 아틀라스가 손인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8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3사는 각사의 주력 폼팩터와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로봇 시장 최전선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지난 11일 취임한 엄기천 배터리산업협회장이 "셀 중심의 성장을 넘어 소재·부품·장비를 아우르는 유기적 밸류체인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함에 따라, 로봇 배터리는 그 질적 진화를 시험할 최적의 무대로 꼽히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은 테슬라 ‘옵티머스’ 등 대량 양산형 휴머노이드를 일차적 타겟으로 삼았다. 핵심 무기는 고출력 모터 구동에 최적화된 4680 원통형 배터리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수십 개의 관절(액추에이터)을 동시에 가동해야 하므로 순간적인 고전류 방전 능력이 필수적이다.
LG엔솔은 기존 21700 대비 용량은 5배, 출력은 6배 이상 높은 4680의 압도적인 생산 능력을 앞세워 글로벌 로봇 배터리의 표준 주도권을 쥐겠다는 구상이다. 이미 6곳 이상의 주요 로봇 선도 기업에 배터리를 공급 중인 LG엔솔은 '피지컬 AI' 시대의 도래가 하이니켈 삼원계 배터리의 새로운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동명 LG엔솔 사장은 "로봇용 배터리는 고에너지 밀도와 출력을 모두 갖춰야 하며, 궁극적인 지향점은 전고체가 될 것"이라며 로봇 시장의 기술적 진보를 예고했다.
삼성SDI는 현대차·기아 로보틱스랩과 손잡고 ‘로봇 전용 고성능 배터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동안 로봇 업계는 전용 배터리가 없어 전동 공구나 경량 이동수단(LEV)용 배터리를 전용해 왔으나, 비정형적인 로봇 구조와 공간 제약으로 인해 최적화된 배터리 개발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양사의 협력은 배터리 형태를 로봇 몸체에 최적화하는 동시에 에너지 밀도를 높여 사용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특히 삼성SDI는 2027년 양산을 목표로 하는 전고체 배터리를 로봇 시장의 ‘게임 체인저’로 보고 있다. 사람과 밀접하게 접촉하는 서비스 로봇의 특성상 화재 위험이 없는 전고체 배터리는 최고의 마케팅 포인트다. 삼성SDI는 기술적 진입 장벽이 높은 하이엔드 로봇 시장을 선점해 수익성을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SK온은 당장 수익이 발생하는 스마트 팩토리 및 물류 자동화 로봇(AGV/AMR) 시장에 주력하고 있다. 휴머노이드 시장이 미래 가치라면, 물류 로봇은 현재의 확실한 매출처다. SK온은 파우치형 배터리의 유연한 설계를 활용해 로봇 내부의 좁고 복잡한 공간에 최적화된 전력을 공급, 물류 로봇 시장의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특히 현대위아 등 물류 자동화 솔루션 기업들과 손잡고 글로벌 생산 거점에 최적화된 배터리 팩을 공급하며 ‘BMS(배터리 관리 시스템) 통합 솔루션’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로봇의 불규칙한 전력 소비 패턴을 실시간으로 제어해 구동 시간을 극대화하는 지능형 BMS는 SK온이 로봇 시장에서 내세우는 핵심 부가가치다.
로봇용 배터리 밸류체인은 기존 EV와는 다른 차원의 기술적 해자(Moat)를 요구한다. 로봇은 가슴이나 등 부위 등 탑재 공간이 극도로 제한적이라 ‘공간 효율성’이 곧 성능이다. 이에 따라 배터리 업계는 규격화된 셀을 넘어, 로봇 설계 단계부터 깊숙이 관여하는 ‘코-엔지니어링(Co-engineering)’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EV 시장이 물량 위주의 양적 팽창에 집중했다면, 로봇 시장은 배터리 업계의 기술적 완성도를 시험하는 질적 진화의 장이 될 것"이라며 “결국 가벼우면서도 폭발하지 않는 기술력과 로봇의 복잡한 움직임을 제어하는 시스템 통합 능력을 누가 먼저 증명하느냐에 따라 로봇 배터리 시장의 승자가 갈릴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