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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정주영⑥]현대건설이 시발점, 자동차·중공업의 다각화

2015-12-16 10:46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이봐, 해보기는 했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현대그룹 창업주 아산 정주영(峨山 鄭周永)의 대표적 명언이다. 아산 정주영은 호암 이병철과 더불어 우리나라 기업 역사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은 기업가다. 아무 것도 없었던 어린 시절부터 상인의 길에 투신하여 돈을 벌고 집념과 불굴의 끈기 하나로 세계 최고의 글로벌 기업집단을 일구어 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아무도 해내지 못한 과업을 획기적인 발상으로 정면돌파한 우직한 위인이기도 하다.

2015년 올해는 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1915년 11월 25일生)이다. 미디어펜은 이를 기리며 좌승희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의 ‘아산 정주영’ 연구논문을 7회에 걸쳐 연재한다. 아래 글은 6번째 연재다. 좌승희 교수는 KDI를 거쳐 한국경제연구원장과 경기개발연구원장을 역임한 기업경제, 경제발전 전문가다. 한국비교경제학회, 한국규제학회, 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 제도에 대한 통찰력을 보인 바 있다.

좌 교수는 신제도경제학적 관점에서 아산의 기업경영 전략과 인생역정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한국 대기업들의 기업경영 행태를 이해하고자 했다. 신제도경제학적 관점에서 기업과 기업인은 특정 경제사회의 제도적 환경의 산물이다. 좌 교수는 논문을 통해 “그 제도적 환경의 내용과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 기업이나 기업인의 경영 및 인생행로 선택을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편집자 주]

 

   
▲ 좌승희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 미디어펜 회장

Ⅶ. 아산 선택의 성공과 실패, 어디서 왔는가?

1. 박정희 산업화 전략과 아산의 선택

1) 박정희와 아산, 둘도 없는 궁합

박정희는 “신상필벌”과 성과지상주의의 이념의 화신이었다. 박정희는 항상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잠언과 더불어 “자조정신”을 제일의 덕목으로 강조하였다. 그의 모든 시책이 이러한 성과에 따른 신상필벌의 원칙을 담고 있었다.

아산은 박정희와 이념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기업인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근검, 절약과 성실”을 모토로 “신뢰와 실력만이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길”이라는 자조정신을 체화하고, “뜻이 있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강력한 도전의식과 성과를 향한 불굴의 노력으로 박정희의 산업화 전략을 구현하는데 선봉장이 되었다. 둘 다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이며 성과지향적(成果指向的)인 면에서 아주 유사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정렴씨의 회고에 의하면 기업인들 중 국영기업을 이끈 박태준 포철회장과 더불어 대통령을 수시로 독대한 유일한 민간 기업인이었다는 사실로도 이해할 수 있듯이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잘 맞는 궁합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못할 일이 없는 기업인으로서의 창조성과 도전정신은 당대 어느 기업인도 흉내낼 수 없는 아산만의 특장이었다. 그의 “이봐 해봤어?”라는 화두는 끝없이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소위 “learning by doing”을 통한 창조적 도전정신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 성공하는 일류 기업이 많은 경제는 일류 경제가 되고, 기업생태계가 발달하지 못한 경제는 후진국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아산 정주영이 창업해서 일군 현대그룹은 대한민국을 이끈 성공일류기업이다./사진=미디어펜

박정희와 아산은 밀고 당기면서 한국의 산업혁명을 이끈 두 거인들이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아산의 박정희 회고가 바로 이 두 거인의 한국경제 발전을 위한 운명적 만남을 잘 보여준다 할 것이다.

“박대통령도 나처럼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나는 우리 후손들에게는절대로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는 염원이 서로 같았고, 무슨 일이든 신념을 갖고 ‘하면 된다’는 긍정적 사고와 목적의식이 뚜렷했던 것이 서로 같았고, 그리고 소신을 갖고 결행하는 강한실천력이 또한 같았다. 공통점이 많은 만큼 서로 인정하고 신뢰하면서 나라 발전에 대해서 같은 공감대로 함께 공유한 시간도 꽤 많았던, 사심이라고는 없었던 뛰어난 지도자였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혜택을 받은 것은 없었지만, ‘현대’의 성장 자체가 무엇보다도 경제발전에 역점을 두고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5).

2) 현대건설, 아산 도약의 시발점 (관련명제: 1, 2, 3, 13, 14, 15, 16, 17)

박정희정부의 근대화, 산업화 전략은 공교롭게도 아산을 위한 선택이나 다름이 없었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에너지 공급, 도로, 항만 건설을 필두로 국가 인프라를 건설해야 하고 여기에다 노동집약적 산업구조를 자본집약적 산업구조로 전환하기 위한 중화학산업 등의 기간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아산의 산업적 선택은 일찍이 자동차 수리와 건설로 시작하여 앞으로 다가올 산업화 시대를 미래 예견해서 준비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자동차 수리소(1940, 아도서비스;1946, 현대자동차공업사)로 초기 사업을 시작했지만 주력을 건설(1947, 현대토건사)로 하여 6.25를 거치면서 미군 상대의 공사에 집중하면서 일찍이 국제기준의 건설시공능력을 배양했고 이를 바탕으로 박정희정부의 최우선 순위의 건설계획이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1968-70)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마치 아산이 앞으로 올 기회를 미리 내다보고 준비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나아가 전기 공급을 위한 댐 건설, 교량 건설, 항만 건설을 통해 산업화의 인프라 구축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여기서 6.25를 계기로 시작된 미군 상대의 공사가 국제적 수준의 건설시공 경험과 시공능력 배양의 계기가 되고, 이것이 70년대 해외건설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는 것, 그래서 현대건설의 중동진출이 한국경제의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었다는 일련의 사태의 전개가 어떻게 이렇게 사전에 계획한 것처럼 놀라운 결과들을 만들어 냈는지 신기할 뿐이다. 사업성공과 실패가 소위 ‘운칠기삼’(運七機三)이라 하지만 기회는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진리를 깨우치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만일 아산이 처음 시작한 자동차에 매달려 건설을 소홀히 했었다면 이런 기회들이 안성맞춤으로 다가왔을까를 생각해 보면 우연치고는 너무나 필연적인 사태의 전개가 아닌가 싶다. 현대건설(1950, 현대건설주식회사)은 그래서 아산의 도약을 위해서는 물론 한국경제를 위해서도 결정적인 기여를 한 아산선택의 백미라 할 것이다.

   
▲ 아시아 2번째, 세계적으로 16번째로 독자 자동차 모델 생산국에 이름을 올린 포니 개발성공이후 1985년 첫 전륜구동 자동차인 포니엑셀의 신차발표회장에 참석한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사진=아산정주영닷컴

3) 자동차와 중공업 창업 (관련명제: 1, 2, 3, 13, 14, 15, 16, 17)

현대자동차(1967)는 국가가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하기 전에 미리 시작했는데 이는 최초 사업이 자동차 사업이었음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판단된다. 현대중공업(1972)은 중화학 공업화 전략의 일환으로 시작하였다. 이 두 산업이야 말로 중화학 공업화의 중추 산업으로서 이들 산업에서의 성공 없이 한국 산업혁명의 성공은 어려웠을 것이다.

자동차를 시작할 때 근대화와 산업화가 성공하여 소득 수준이 증가하면 마이카 시대가 온다는 생각을 했다는 아산의 회고를 보면서 - 물론 이는 경제상식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잇겠지만 - 그 당시 일인당 소득이 200불 미만의 최빈국 한국의 경제상황에서 그것도 경부고속도로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아산의 예지와 그 창발적 도전정신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중공업을 시작할 때의 일화는 너무 인구에 회자되어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건설과 중공업이 크게 다르지 않은 연관 산업이라는 생각, “나는 조선업자가 아니라 건설업자로서 조선소 건설을 생각했다”6)거나 “조선소는 조선소이고, 선박건조는 선박건조이다. 반드시 다 지어진 조선소에서 선박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병행해서 진행했다”7)는 회고는 오히려 오백원짜리 돈의 거북선 그림 마켓팅에 못지않은 창의적 사고가 아닌가 한다. 배를 집을 짓듯 공장을 짓듯 짓고, 조선소는 조선소대로 따로 지으면 된다는 발상이 조선업에 대한 성공적 진출의 관건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건설이 없었다면 중공업 창업을 그리 쉽게 - 물론 정부의 강권에도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지만 -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문어발”이 얼마나 치밀한 계획 하에 범위의 경제와 시너지를 고려한 관련 다각화의 성공 사례인지를 잘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현대’는 울산조선소라는 중공업 제작 기지를 활용해 주 베일 산업항 공사를 비롯한 중동지역의 대형공사들을 효과적으로 완수해 내면서, 해외건설과 중공업 제작역량이 서로 연계해 발전했다. 그 덕에 우리는 이미 1970년대에 자동차, 조선, 선박, 엔지, 산업플랜트, 발전설비, 해양설비, 중전기기(重電器機), 중장비 등 중공업의 핵심 분야를 망라한 중공업 체제를 구축했다. 건설, 자동차, 조선업을 모태로 하는 전형적인 관련 다각화의 과정을 거쳐 구축된 ‘현대’의 중공업 체제는 내수보다는 해외수요를 겨냥해서 국제적 규모를 갖추려했고, 또 자생·자주적이고자 하였기에 합작보다는 자주개발에 역점을 두었다.”8)

2. 5공 이후 아산이 부딪친 경영환경의 변화: 재산권 위협의 증대

친(親)산업화의 박정희 시대가 가고 5공의 시퍼런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아예 사라진 재벌도 있었지만 아산도 그에 못지않은 많은 시련을 겪었다. 박정희시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실패한 정책이라 규정하고 강제적으로 투자조정을 시도하였는데, 여기서 재벌들 간의 재산권 조정에 따른 분란이 적지 않았다. 이 와중에서 아산은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기업인들 중의 하나였다. 아산은 현대중공업의 발전설비 부문을 통째로 강탈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제 재벌의 재산권은 보호대상이라기 보다는 공공재처럼 취급되는 사회 분위기마저 형성되었다. 재벌은 이제 군부 앞에 무력한 부도덕한 탐욕스런 문어발집단으로 폄하되었다. 5공 정부는 박정희 시대가 이룬 공적을 폄하하는 것이 정권의 정당성 확보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 당시 전 세계의 이념적 조류인 사민주의 운동에 부응하여, 박정희 시대가 초래한 기업부문의 경제력 집중과 지역발전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균형된 경제사회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대기업에 대한 규제제도를 법제화하고, 대기업의 수도권지역 투자를 금지하는 놀라운 규제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들 규제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경제의 족쇄가 되고 있다.

   
▲ 지난 11월 18일 저녁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고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한 관객이 고 정주영 회장의 사진 앞을 지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1980년대 초 국보위에 의한 중화학투자 조정으로 겪었던 고초와 그 후 정치권력과의 어려웠던 싸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아산의 회고는 추후 아산이 왜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경제논리가 통하지 않는 암흑시대에서 시행된 강제적 조정으로 인해 발전설비 사업을 포기해야했던 나는, ‘현대’로 일원화하기로 했던 자동차가 얼마 안 되어서 다시 다원화되는 바람에 일관성 없는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9). “5공화국 동안 기업이 어렵지 않았을 때가 별로 없었지만 창업자(현대양행창업)였던 아우 인영이가 옥고까지 치르면서 1전 한 푼도 못 건지고 창원중공업 공장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잊혀 지지가 않는다”10). 이런 강제 사업조정과 관련한 신군부실세들과의 충돌에 이어 아산은 5공초에 전경련회장을 교체하겠다는 신군부실세들과의 충돌이 있었고, 그 후에도 지속적인 긴장관계 속에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면 박정희시대 이후 5공 전두환 정부와 6공 노태우 정부까지의 12년은 정치실세들이 정치민주화를 앞세우고 경제논리보다도 정치논리를 앞세워 민간경제계 위에 군림했던, 특히 대기업들을 압박하던 시대였다. 물론 그 이후 등장한 김영삼 정부 등 민간 정부들도 경제논리보다는 정치논리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아 기업경영 환경은 별로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산은 국가경영의 책임은 다하지 않고 경제계에 군림하여 호령하는 정치권력을 전쟁의 폐해에 비교할 정도였다. “나는 사람에게는 전쟁 이상의 어려운 고난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전쟁만큼의 고난은 아니지만 전혀 자격이 없는 이들의 손에 쥐어진 권력이라는 칼날 아래 기업을 하면서 정변 때마다 정권교체 때마다 그 때 그 때 겪은 고난과 고통도 쉽지 않았다”11).

그러나 되돌아보면 아산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그리고 88올림픽유치위원회 회장, 대한체육회장으로서 정부에 협조하면서 이 시대를 추후 정치와 대통령 출마를 위한 지적 충전과 준비기간으로 활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좌승희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 미디어펜 회장

5) 정주영(1998), p. 253.

6) 전게서, p. 168.

7) 전게서, p. 191.

8) 전게서, pp. 262~263.

9) 전게서 pp. 233~264.

10) 전게서, p. 265.

11) 전게서, p. 265.


*아래는 본고 전문의 목차. 위 글은 이 중 7번째 장의 1과 2 소주제다.

Ⅰ. 들어가는 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제2·제3의 아산 정주영이 필요한 한국경제
Ⅱ. 경제제도와 기업행위의 패턴; 이론적 분석 틀
Ⅲ. 경제발전과 기업의 역할
Ⅳ. 기업 지배구조와 다각화·전문화 이론
Ⅴ. 아산시대 한국경제의 제도적·정책적 환경
Ⅵ. 한국 기업가 정신의 특질: 사업보국 이념
Ⅶ. 아산 선택의 성공과 실패, 어디서 왔는가?
Ⅷ. 결어: 박정희 시대가 아산을 만들고, 아산의 선택이 한강의 기적을 이끌다.

원고 출처: 한국제도경제학회. 『제도와 경제』 제9권 제3호(2015.11.) 13~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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