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2300여 년 전의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민도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행복한 삶에 대한 그의 고민과 해법이 담긴 책이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ca Nicomachea)』이다. 그의 철학적 고민을 읽노라면, 마치 현대의 어느 철학교수의 담론인 듯 착각이 들 정도다. 그가 인식한 삶의 모습들과 탐구하는 내용들이 시공을 뛰어넘어 현재 우리 삶의 모습과 인간의 속성에 그대로 들어맞는 것을 보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민하고 깊이 있는 통찰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과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내면의 본성, 그리고 인간들이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사회적 교감의 원리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의미를 통찰해 내는 개개인의 능력은 결국 문명처럼 전수되고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과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것임을 새삼 느낀다. 서양 철학의 거성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사유의 여정에서 2300여 년 동안 인류의 훌륭한 길라잡이가 되어 왔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그의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eudaimonia)은 ‘좋은 것’, ‘최고 선(善)’ 이다. 행복은 그것 자체만 추구해도 되는 완결성, 자족성을 갖는다. 다른 어떤 것도 곁가지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좋음(agaton)’은 모두 행복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을 외적인 좋음, 영혼에 관계된 좋음, 육체에 관련된 좋음으로 유형화한다. 행복에 이르는 좋음의 길이 여럿인 셈이다.
공통적인 점은 어떤 길로 행복에 다가가든 행복을 결정짓는 것은 아레테(areté), 즉 탁월성(덕성)이다. ‘가장 좋음’만이 행복과 연결된다. 특히 우리가 인간적인 탁월성을 말할 때는 육체의 탁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탁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탁월성은 감정(pathos), 능력(dynamis)의 영역이라기보다 품성상태(hexis)의 수준을 말한다.
탁월성은 감정의 기복이 없는 무감정 상태(apatheia) 내지는 평정 상태(eremia)로도 규정되기도 한다. 아무튼 탁월성은 그것이 무엇이든 좋은 상태에 있게 하고, 품성의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하는 것으로 대변될 수 있다. 그렇다면 감성과 이성을 늘 좋은 상태로 유지하고 발휘할 수 없다면 탁월성을 성취하고 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성의 탁월성을 성취하기 위해 영혼의 역할이 중요하다. 영혼은 이성(logos)을 가진 부분과 이성이 없는 부분을 포괄한다. 이성이 작동하는 영역에서 탁월성은 지적 탁월성과 성격적 탁월성으로 나뉜다. 지적 탁월성은 학습에 의해, 성격적 탁월성은 좋은 행위(praxis)가 반복되는 습관에 의해 길러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즐거움과 고통에 관련된 성격적 탁월성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다양한 욕망과 즐거움, 고통에 대한 탐닉이나 회피의 선택적 상황에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중용의 상태가 ‘합리적 선택(prohairesis)’일 수 있으며, 이런 품성이 최고의 탁월성이며 이는 곧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합리적 선택의 원리는 욕구와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이성이다. 따라서 합리적 선택은 지성이나 사유 없이 생기지 않고, 올바른 성격적 품성상태 없이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결국 탁월한 품성상태를 갖춰야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갖가지 미혹에 빠질 때 늘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서 본 경험이 많지 않은가. 그 때 어떤 욕구, 어떤 즐거움을 선택을 하느냐는 바로 자신의 품성과 지성의 수준에 달려있다. 그러니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행복의 빛깔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슨느 중용(mesotes)은 제반 즐거움에 대한 절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플라톤 역시 대화편 『필레보스』에서 적도(適度: to metrion)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박종현 교수는 <필레보스>의 번역에서 ‘중용’대신 ‘적도’란 용어를 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성격적 탁월성을 갖추어야 하고, 그 탁월성은 중용으로서 달성된다. 중용은 지나치지 않고 모자라지 않는 상태이다. 감정의 영역에서 이런 중용을 취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 비겁한 사람은 용감한 사람을 ‘무모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반면 ‘무모한 사람’이라고 불린 사람은 오히려 그를 ‘비겁한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는 결국 어떤 두려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이 때 취해야할 중용은 어떤 것일까?
두려운 감정이 일어날 때 지나치게 대응하는 것은 무모함이지만, 비겁하게 구는 것은 모자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때에 적정한 중용의 감정은 바로 ‘용기’라고 말한다. 용기 있는 자는 지나치게 무모한 행동을 하지도 않고, 비겁하게 회피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중용이 아니라 용기와 소신에 따른 적정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중용의 자세라는 의미일 것이다.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중용의 지혜가 필요하다. 즐거움이나 고통과 관련해 넘치면 '무절제', 모자라면 '목석같음‘이 되고 만다. 이 때 필요한 중용은 ’절제‘이다.
이러한 중용은 개인의 감정영역 뿐만 아니라 재산이나, 명예 등 외적 욕망의 추구, 사람들과의 친교 등 사회적 삶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취해질 수 있다. 중용은 결국 자기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자신의 자발적이고 합리적 선택에 따라 행복이 좌우될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숱한 개별적인 사례에서 중용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중용의 자세를 갖기 위한 습관적 노력이 필요하다.
▲ 아리스토텔레스 흉상 |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해야 할 가장 나쁜 품성으로, ‘악덕(kakia)’, ‘자제력 없음(akrasia)’, '짐승 같은 품성상태'를 들었다. 이런 것들은 탁월성과 상극이다. 특히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실천적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다.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pathos) 때문에 그것을 하는 데 반해,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욕구들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 이성(logos) 때문에 그것들을 따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한 품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인 ‘합리적 선택’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울러 성격적 탁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실천적 지혜가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다.
“자제력 없는 사람은 욕망하면서 행위하지만 합리적으로 선택하면서 행위하지는 않는다. 자제력 있는 사람은 반대로, 합리적으로 선택하면서 행위하지, 욕망하면서 행위하지 않는다.”
그러면 자제력을 이끌어주는 성격적 탁월성은 어떻게 길러야 할까? 이러한 습관을 만드는데 필요한 덕목은 숙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잘 숙고한다는 것은 “유익함에 따른 올바름이자 마땅히 도달해야 할 것, 마땅히 해야 할 방식, 마땅히 해야 할 시간에 따른 올바름이다.”
우리의 행위에 의해 성취 가능한 것이 무엇일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숙고하게 될 때 합리적 선택이 가능해진다. 자신의 욕구에 대한 반응과 행동이 자신의 합리적 선택에 따라 이루어지고, 이런 행위 하나하나가 축적되어 습관적 행위가 되면 탁월한 품성이 만들어지고 행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기실 행복은 연습하기 나름인 것이다. 인생은 즐거움을 추구할 때 행복해 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 대한 즐거움이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즐거움이 촉각, 미각 등 대부분 육체적 요인에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인간이 이성의 활동에 의해 무언가를 깨달으며 느끼는 희열이야말로 진정한 즐거움이라 정의한다.
감각의 쾌락추구가 아니라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ia)를 통해 정신적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한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의 행복론도 이런 즐거움일 것이다. 또한 공자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라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의 즐거움일 것이다. 이렇듯 감각적 욕구의 충족을 통한 즐거움도 크지만, 이성적 욕구를 통해 얻는 즐거움 또한 고귀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의 영역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한다면 그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사회성을 완성시키는 즐거움으로 친애(philia)를 강조했다(친애의 개념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정감의 상태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친애는 사회적 삶에서 취할 수 있는 탁월한 중용의 하나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친애, 친구 간의 친애, 사회에서 교제하는 사람 사이의 친애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친애는 ‘합리적 선택’에 기초한 품성상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순수성, 서로 사랑과 배려를 주고받는 상호성, 그리고 서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인지성을 고루 갖출 때 좋은 친애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또 이런 요소들이 결핍될 때 친애관계는 해체되고 만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자기애를 넘어서 타인에 대한 친애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행복도 증진하고 인간적인 사회성을 완성시키는 즐거움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가장 완전한 친애는 좋은 사람들, 또 탁월성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친애이다.” 좋은 사람들, 탁월한 교양인들이 많아질 때 사회 속에 친애 관계는 풍성해진다. 좋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자기애에서 타인애로 나아갈 때 친애는 샘솟는다. 친애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즐거움을 준다. 더불어 사는 친애를 실천하는 행복한 사람이 넘치면 그 사회는 저절로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자신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식에 스스로 취해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포근하고 달콤한 말이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은 가정과 이웃, 사회,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더 많은 사랑을 받기를 갈구하게 될 것 같다.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아도 늘 부족한 사랑에 대한 불만이 가득할 것 같다. 이런 상태에서 행복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서 더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친애가 넘치고 사회 기풍은 견실해질 것 같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유익하게 만들고, 타인과 사회에 유익을 보태게 될 터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를 더 바라는 대중들의 풍조를 꼬집은 바 있다. 이제 우리 사회에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좀 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이런 품성의 탁월성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교육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누구나 동일한 품성 바탕을 갖고 태어난다고 본다. 성선설 입장도 아니고 성악설 입장도 아니다.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이 오로지 성장과정과 교육이 어떠한가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탁월한 품성은 성장과정에서 여러 감성과 행동의 경험과 학습에 의해 길러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감정과 행위들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도록 습관화 하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자발적 노력이 어려운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탁월성으로 유도해 내기 위한 규제적 입법 및 정치체계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행복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달렸다. 자신의 성격과 습관을 어떻게 키우느냐가 중요하다. 탁월한 품성을 기르고 스스로 고귀하고 소중한 것에서 중용의 즐거움을 찾고 이를 실천할 때 행복은 자기도 모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이런 고전 읽기를 통해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것 또한 ‘탁월한 즐거움’이 아닌가.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도서출판 길(2011). 48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