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로 정부가 전략비축유(SPR) 방출 가능성이 커진 가운데 비축유 대여 시 정유사들의 '석유제품 수출 제한' 조치로 연계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확정된 사안은 아니지만 이 같은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 정유부터 석유화학으로 이어지는 국내 기업들의 밸류체인이 연쇄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로 정부가 전략비축유(SPR) 방출 가능성이 커진 가운데 비축유 대여 시 정유사들의 '석유제품 수출 제한' 조치가 연계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여수산업단지 전경./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10일 글로벌 에너지 전문매체 아거스 미디어에 따르면 최근 우리 정부와 정유사 간 비축유 방출 관련 논의 과정에서 수출 제한 조치시 발생할 수 있는 정제 손실에 대한 피드백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미국, 일본 등을 포함한 G7 국가에서 전략비축유 방출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다. 중동 전쟁이 자칫 장기화 될 수 있어 우리 나라 역시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다만 정부 비축유가 국민 세금으로 조성된 국가 안보 자산인 만큼 정부에서는 대여하면서 조건을 걸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축유를 정유사에 대여했는데 정제된 휘발유와 경유를 수익이 큰 해외 시장에 수출해 버리고, 정작 국내 주유소 기름값은 치솟는다면 정부로서는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비축유를 빌려주는 전제 조건으로 수출 물량 조절이나 국내 시장 우선 공급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같은 시나리오가 거론되자 국내 정유 4사(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내 정유산업은 원유를 전량 수입하지만 고도화된 설비를 바탕으로 생산된 제품의 50~60%를 해외로 수출해 이익을 내는 구조다.
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인위적인 수출 통제가 불러올 '수직계열화(COTC) 밸류체인'의 붕괴다. 수출길이 좁아지면 내수 시장에서 소화하지 못한 초과 물량이 재고로 쌓이고 이는 원유 정제 설비(CDU)의 가동률 하락으로 이어진다. 이와 함께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기초 원료인 나프타 생산 역시 연쇄적으로 급감하게 된다.
현재 정유 4사는 단순 정제업을 넘어 조 단위 자금을 투입해 석유화학 산업으로 영토를 확장한 상태다. 에쓰오일이 9조 원 이상을 투입해 울산에 짓고 있는 샤힌 프로젝트(TC2C), GS칼텍스가 2조7000억 원을 들여 완공한 올레핀 생산 시설(MFC), HD현대오일뱅크와 HD현대케미칼로 이어지는 중질유 석유화학 시설(HPC), 그리고 SK이노베이션 산하 SK지오센트릭 등의 고부가 화학 생태계 모두 자체 정제 설비에서 나오는 '저렴하고 안정적인 나프타 조달'이 핵심 경쟁력이다.
수출 제한 검토가 자칫 고부가 화학 소재 산업의 원가 경쟁력까지 질식시키는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글로벌 시장 역학 관계를 살펴보면 기업들이 체감하는 위기감은 더욱 크다. 아시아 최대 수출국인 중국은 최근 자국 내 물가 안정과 탄소 배출 저감을 이유로 자국 소규모 민간 정유사와 국영 정유사들의 석유제품 수출 쿼터를 강력히 틀어 쥐고 있다.
통상적으로 중국 물량이 글로벌 시장에서 빠지면 역내 석유제품의 공급이 부족해져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 등 수출 크랙(Crack)이 크게 튀어 오른다. 한국 정유사들에게는 실적을 방어할 절호의 기회지만, 수출이 묶인다면 이 막대한 기회비용을 허공에 날리게 된다. '물가 안정'을 우선하는 정부와 1분기 실적 부진을 만회해 배당 여력을 키우길 원하는 '주주 및 글로벌 투자자'들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셈이다.
원가 부담은 계속 커질 가능성이 크다. 정유사들은 호르무즈 해협 등 중동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미주 등으로 원유 도입선을 다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운송 거리가 길어지고 시장 불안 심리가 겹치면서 해당 지역 원유의 단기 물량 프리미엄과 해상 운임이 치솟는 추세다. 비싼 원유를 들여오고도 고수익 수출을 하지 못한다면 팔수록 적자가 누적되는 구조에 갇힐 수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실제 수출 금지령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시나리오가 시장에 거론되는 것 자체가 4월 이후 글로벌 단기 입찰에 참여해야 하는 기업들의 운신 폭을 좁히고 있다"며 "국가 에너지 수급 방어라는 대의에는 적극 공감하지만, 산업의 기초 체력인 정유·화학 수직계열화 생태계가 훼손되지 않도록 정책적 유연성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지침이나 확정된 사안은 없는 만큼 향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나 논의 방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석유화학 업계 등 다운 스트림 공정에 있는 국내 기업들의 우려를 생각할 때 수출 금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라는 견해도 있다. 석화 업계는 전쟁이 장기화 될 경우 정유사 등 정제 업체들이 원료 비축을 이유로 물량을 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결국 정부가 비축유를 방출할 경우 업계 간 이해 관계와 수익 조정에 세심한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산업부 측은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아직 확정된 바가 없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