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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이름 주기철…모진 핍박 이겨낸 '겨레의 어른'

2015-12-25 23:13 | 김세헌 기자 | betterman89@gmail.com

[미디어펜=이상일기자] 25일 성탄절을 맞아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체포돼 옥중에서 순국한 주기철(1897.11~1944.4) 선생에 대한 누리꾼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 연합뉴스

주기철 선생은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으나 건강 악화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 교회 집사로 신앙생활을 했다.

주기철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경남 창원군 웅천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후 주기철 선생은 1920년 12월에는 창원 웅천청년운동단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의사(議事)'로 선출됐다.

이어 주기철 선생은 1936년 장로교의 본산인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부임했다. 주기철 선생 부임 당시 평양은 기독교 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전통 깊은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특히 주기철 선생 부임 당시 총독부에서는 1938년 2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수립하고 경찰력을 동원해 학교와 학생,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주기철 선생은 1938년 9월 전국 장로회 총회가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대항해 '일사각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신사참배 거부를 호소했다.

그러던 중 주기철 선생은 일경에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가석방된 후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설교를 계속했다.

이에 일경은 주기철 선생을 1940년 7월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선생을 또 체포했고, 주기철 선생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주기철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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