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문상진 기자] 너무 일찍 터트린 샴페인이었을까? 17년 만에 나온 노사정 대타협에 박수를 보낸 지 4개월만에 한국노총이 파기 카드를 꺼내들었다. 외면상 이유는 지난달 30일 정부와 노동전문가들과 논의해 발표한 일반해고 지침 초안을 ‘쉬운 해고’라며 꼬투리 잡았다.
억지나 다름없다. 노동전문가들은 정부가 공개한 지침은 “초안이라 향후 수정할 여지가 있는 데다 일반 해고와 관련된 기존의 법과 판례를 정리한 수준이어서 ‘쉬운 해고’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사측에서는 기존 해고보다 더 어렵게 만들었다면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11일 한국노총은 ‘노사정 합의 파탄’을 선언하고 노사정위 탈퇴를 비롯한 구체적인 대응방침은 오는 19일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노사정 대타협이란 거창한 말과는 달리 구체적인 타결 내용도 없는 무늬만 대타협이었다. 이마저도 무능한 국회로 말미암아 해가 바뀌도록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지지부진했다.
▲ 11일 직무능력 중심의 인력운영 방안 모색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가 열린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민주노총, 한국노총 관계자들이 토론회 참석을 요구하며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시간을 끌면서 꼬투리잡기에 나섰던 한국노총은 정부의 초안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파기를 선언했다. 그들에게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빌미를 잡을 기회만 노렸다. 모든 책임을 정부에 뒤집어 씌우고 자신들은 밥그릇 지키기로 돌아갔다. 대타협의 정신도 일말의 책임감도 없는 무책임의 극치다.
한국노총은 왜 이 시점에서 민노총의 2중대라는 불명예까지 감수하면 파기 선언을 했을까? 한국노총이 얻을 것과 노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행태로 몇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코앞의 총선이다. 석 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새로운 논란의 불씨를 당겨 정치적 흥정을 해 보자는 것일 것이다. 선거는 이들에게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여든 야든 표를 가지고 흥정하는데 이겨낼 장사는 없다. 표는 그 어느 것보다 효과 높은 강력한 무기다. 19대 국회의 무능을 본 이들에게 표 장사는 그야말로 앉아서 얻어걸린 밥상이다.
둘째는 고용시장 유연성과 관련된 노동개혁의 알맹이는 피해가자는 일종의 꼼수다. 이미 노조는 정년연장, 실업자 지원확대, 각종 취업 프로그램 강화 등 챙길 건 다 챙겼다. 남은 건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 같은 아킬레스건이다. 노사정 대타협 당시 한국노총 김동만 위원장은 “청년 일자리와 비정규직의 눈물을 어떻게 닦아줄 것인가에 대해 노동계가 큰 그림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청년 고용 확대와 노동시장 유연성에 목매고 있는 정부의 카드를 훤히 읽고 있었다. 챙길 건 다 챙긴 한국노총이 결국 제 밥그릇을 챙기자 청년 고용이나 비정규직의 밥그릇은 걷어 찬 셈이다.
셋째는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다. 지난해 ‘9·15 타협안’이 노동개혁의 끝인 양 의기양양해 자화자찬에 빠진 김대환 노사정위원장과 핵심쟁점에 대해 ‘합의하자는 합의’였을 뿐일진데 이에 매달려 온 고용노동부를 상대로 다시금 칼을 겨눈 것이다. 고용부는 해마다 3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을 한국노총에 지원해 왔다. 지금껏 고용부는 예산지원 등을 내세워 노조를 마치 산하단체처럼 관리해 왔다. 아쉬울 게 없어진 한국노총은 고용부와 노사정위원회의 길들이기엔 나선 것이다. 한국노총의 실체다.
여기까지가 한국노총의 아전인수격 속셈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한국노총의 노사정대타협 파탄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2014년 기준 한국노총의 조합원 수는 약 84만 명이다. 국내 전체 노조원 약 190만 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내 전체 임근 근로자 1800여만 명을 기준으로 하면 5%도 안 되는 규모다. 이들이 노사정위원회 노측의 대표였다. 해서 일부 전문가들은 이들의 대표성에 일찍이 의문을 제기해 왔다.
이제 한국노총의 노사정 협의 파기로 그들의 대표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다. 만약 한국노총이 의도를 가지고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했다면 이들은 애초 노사정위원회를 부정했던 민주노총보다도 더 비난받을 행태를 저지른 것이다. 95%의 노동자를 배신한 것이다. 청년 고용의 길을 스스로 막아버렸다는 영원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멍에를 지는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미국의 금리인상과 중국의 경기 둔화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경제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조선은 물론이고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어느 하나 제대로가 없다. 파산 위기에 내몰리는 기업이 늘고 명예퇴직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제 밥그릇이나 챙기자고 꼼수를 쓴다면 앞길은 뻔할 뻔자다. 집단이기의 늪에서 자멸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일각에서는 “한국노총의 파탄 선언은 노동계의 고질적인 내부 정치, 계파 문제가 반영된 결과”라며 “사실상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자해 행위”라고 진단했다. 또 한편에서는 “사회적 합의도 중요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정부가 노동계 등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노동개혁을 추진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한다.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노동단체의 박수를 받으며 노동개혁을 한 경우는 없다”며 “미국 영국 독일 등 어떤 나라도 노조와의 합의를 통해 노동개혁을 추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노총이 귀담아 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