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은 지난 1월 13일 2016 자유경제원 교육대토론회 ‘교육으로 다시 희망을 쓰자’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자유경제원은 “교육이 희망이었던 대한민국에 ‘교육망국론’이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교육은 ‘정치화’ 되어가고,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도는 중단되었다”고 진단했다. 학생·학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의 질’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이 인기영합주의 정책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현실속에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자유경제원은 “특히 올해는 총선이 있는 중요한 해입니다. 총선에서 쏟아져 나올 각종 인기영합주의 정책으로부터 교육을 지키고, 교육경쟁력 강화를 위한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아래 글은 이근미 소설가의 ‘올바른 교육으로 바른 정치 세우는 공격적인 자세 필요’라는 토론문 전문이다. |
올바른 교육으로 바른 정치 세우는 공격적인 자세 필요
▲ 이근미 소설가
우리나라만큼 짧은 시기에 발전한 나라도 찾기 힘들고, 정책이 자주 바뀌는 나라도 드물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바뀐 교육정책 때문에 복잡해진 입시 방식 때문에 새로운 직종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접한 직종은 ‘자녀를 명문대에 보낸 엄마’가 ‘맞벌이 엄마’ 대신 사교육을 설계하는 ‘입시 컨설턴트’이다. 딱 맞는 참고서와 학원을 선택해주고 내친 김에 아이가 학원가는 것까지 독려해주는 일을 한다.
문제는 ‘논리’에 입각하여 긍정적으로 발전해 나가면 다행일 텐데 때마다 정치논리가 개입되어 교육이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정치는 왜 교육을 건드리는가. 가장 손쉽게 변화가 드러나기 때문이리라. 전 국민이 관심 있는 분야인 데다 곧바로 뜨거운 반응이 나오니 유혹적일 수밖에 없다. 지지층의 입맛에 맞는 대책을 내놓으면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나니 정치권이 갈지자 행보를 하는 것이다.
그간 현장에서 만난 여러 교육전문가들이 강한 톤으로 부르짖은 말들이다.
“한국 교육이 바로 가는 길은 교육부를 없애는 것뿐이다.”
“교육부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교육부 장관을 부총리로 만든 건 ‘더 관여하라’는 의미인데, 본질적으로 교육부는 교육에 관여하면 안 된다. 교육부 직원이 500명(2007년 기준)인데 그 직원들 먹여 살리려고 우리 국민이 교육을 하고 있다.”
“대학이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한다. 사립대는 정부로부터 도움은 못 받고 규칙과 지시만 받는다. 사립대는 독립된 기관이다. 대학에 모든 권한을 줘야 한다.”
“교육부는 행정을 하는 곳인데 교육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교육부에서 심지어 교과서 택하는 것까지 시시콜콜 참견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부가 달라진 기준을 세워 일방적으로 지휘하니 불만 표출이 심해지고 있다. 가장 큰 반발에 부딪친 사안은 아마도 사립학교법이 아니었나 싶다. 종교단체나 개인이 엄청난 재산을 희사해 만든 교육기관에 정치권이 의도를 갖고 규제에 나서 큰 문제가 됐었다. 60년간 육영사업을 해온 모 재단 이사장은 “정치권은 교육기관을 ‘육성과 진흥’이 아닌 ‘감시와 통제’로 다스린다”고 분통을 터트리면서 “사학법을 면밀히 검토하면 규제사항이 417군데나 된다”고 통탄했다.
정치권이 교육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손을 대는 것은 앞 정권과 차별화해야 한다는 강박에다, 짧은 통치기간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교육부가 최소한의 지원만 하겠다는 각오, 정권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기준을 세워 교육이 올바로 가도록 돕겠다는 정신, 그것이 필요한 때이다.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라
교육부가 간섭을 최소화하고 일관된 기준으로 교육현장을 돌본다 하더라도 교육이 과연 정치와 거리를 둘 수 있을 것인가. 결론은 회의적이다. 교육정책이 정치권에 의해 오락가락하면서 계속적으로 변하는 것도 문제지만, 교육현장을 ‘신념 실행의 장’으로 여기는 세력이 있어 더 큰 문제이다. 정치와 교육의분리는 상당히 풀기 힘든 과제이다.
올바른 국가관을 가진 이들이 교육현장에서 선한 힘을 발휘해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이다. 학부모들은 ‘자녀 성적’이라는 이기적인 틀에 갇혀 학교 현장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학부모들 탓할 것 하나도 없다. ‘정치와 교육’의 경계선에서 활동하는 이들이야말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교육감 선거에서 좌파는 ‘우리 중에서 누가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단일화 하지만 우파는 ‘반드시 내가 해야 된다’는 욕심으로 패배를 자처, 교육현장을 정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어 버리고 있다. 교육현장에 대해 ‘좌파 일색’ 운운하며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높은데, 일신상의 영달과 이기주의에 빠진 ‘얼빠진 우파’들 행태 앞에서 할 말을 잊게 된다.
긍정사관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
▲ 서울중등교장평생동지회가 지난해 10월 광화문 청계광장 앞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관련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서울중등교장평생동지회 회원들은 정부의 중학교 역사 과목, 고등학교 한국사 과목의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사진=미디어펜
한국사 국정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비단 역사교과서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국어교과서에 실리는 자료 역시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국어 교과서에는 설명문·논설문·수필·시·소설·전기·희곡·일기·서한문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이 실린다. 글을 싣는 기준은 ‘무수한 글 가운데에서 특정 단위 학교의 특정 학년의 학생들에게 공통되는 흥미와 이해 수준에 맞는 것이라고 판단되어 선정된 것’이라고 되어있지만 ‘선정위원들의 기호(정치성향)에 맞는 것’이라는 게 맞는 표현이다.
앞서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에 대해 토론하면서 확인한 바대로 국어교과서에는 요즘 학생들의 기호에 맞지 않는 ‘이념 성향이 짙고, 어둡고 부정적인 내용의 작품’이 다수 실려 있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선정위원과 선정 작품을 개선하기 힘들다는 게 문제이다.
한국문단의 3분의2 이상이 좌편향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문단 권력이 대개 좌편향인 데다 좌편향 문예단체들이 번성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에 앞서 한국의 특수상황이 그런 풍토를 조성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핍박, 한국전쟁 전후 혼란기, 산업화와 독재정권에 대한 반항 등으로 좌편향의 타당함이 공고해진 면이 있다.
어둡고 폐쇄적이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내용이 주목 받으면서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도 무겁고 힘겹기 짝이 없다. 성인이 되기 전에 적개심부터 키우게 되는 정서교육이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도전보다 ‘헬조선, 수저타령’을 먼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주사파’에 깊이 심취했던 세대가 여전히 교육현장에서 중추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정치와 교육의 결별은 한동안 힘들 거라고 예측된다.
견고한 성을 흔들라
정치색이 짙은 국어교육의 결과는 어떠한가. 월드컵 4강, 올림픽 10위권, K팝의 세계화, 기능올림픽 우승, 세계적인 음악콩쿠르 석권 등 속속 들려오는 승전보 속에 문학은 제외되어 있다. 오히려 문단의 권력화와 유명작가 표절사태로 시끄럽기만 하다. 특히 세계대전을 겪은 나라의 작가들이 전쟁을 소재로 명작을 발표한 것과 달리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세계적인 작품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이 중국과 일본의 노벨문학상 작가 이름만 외우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2012년 12월 김지하 시인이 창비 백낙청 편집인을 향해 일갈한 내용에 답이 있을까
<싸이의 말춤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바마가 참석하는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다. 욘사마에 이어 한류의 붐이 와 있다. 한류-르네상스의 핵은 '시와 문학의 참다운 모심'이다. 그런데 이 못된 쑥부쟁이가 한류-르네상스의 분출을 가로막고 있다. 잘라 말한다. 자칭 한국 문화계의 원로라는 '백낙청'이 바로 그 쑥부쟁이다.>
김지하 시인은 “백낙청은 한국 문학의 전통에 전혀 무식하다. 그저 그런 시기에 '창비'라는 잡지를 장악해 전통적인 민족문학 발표를 독점했을 뿐이다. 수십년 동안 창비출판사에서 단 한 번도 지나간 한국 시문학사의 미학적 탐색을 시도한 적이 없다. 무식 때문이다. 우선 정치관부터 바로 세워라. 그런 것도 없는 자가 무슨 정치 평을 하는가? 내가 '깡통 빨갱이'라고 매도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라!” 등의 독설을 날리면서 “문학자는 참된 마음으로 문예를 부흥시켜 이 나라를 '문화대국'으로 키워가야 한다. 이게 바로 1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에서 배워야 하는 테마”라며 백낙청 편집인에게 스스로 사라지라고 권했다. 김지하 시인의 판단이 다 옳은 건 아니겠지만, 견고한 성을 뒤흔들어 모두 에게 경종을 울린 용기를 배워야 한다.
현장에서 행동으로 보여줘야
정치로부터 교육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겨야 할 대상, 타도해야 할 대상 보다 한 발 더 나서는 것이 해법이다. 토론회를 통해 문제점과 해법이 도출되면, 현장에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앞선 위치를 점한 이들은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강한 의지로 올바른 생각을 현장에서 구현해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지금은 문을 닫은 전교조 계열의 ‘전국국어교사모임(전국모)’이 설립한 ‘나라말’이라는 출판사가 있었다. 2012년 당시 전국모 소속 국어교사가 4,000여명 이르렀다. 나라말에서 책을 내면 전국모 교사들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구입하니 기본 4,000권은 팔린다는 결론이다. 여러 베스트셀러를 낸 데다
어떤 책이든 재판 이상 찍기 때문에 작가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출판사였다. 나라말출판사에서 발간한 책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었다. 일반출판사가 잘 다루지 않는 외국명작 단편과 한국고전을 발굴하여 각광받았는가 하면 ‘사상적 편향성이 짙은 책들을 출간한다’는 질타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전국모 교사들이 국어교육을 위해, 학교 도서관에 책을 비치하기 위해, 단합하여 실천했다는 점이다. 우파 교사들이 그런 노력을 했다는 뉴스는 접하지 못했다.
인권보다 인성 가르쳐야
어른들의 생각을 그대로 주입받는 아이들이 점점 자라 어른이 되고, 교육 받은대로 그들은 또 가르치고 행동하게 될 것이다. 학교에서 역사교육을 받지 않아 한국전쟁이 북침인지 남침인지,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애들을 만든 세력, 그들을 질타만 하고 있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 올바른 시민으로 키우는 일을 ‘지금’ 해야 한다. 바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면 올바른 정치와 교육이 구현될 것이다.사실 요즘 학교 현장은 이념문제보다 인성문제가 더 심각한 듯 보인다.
민주화 바람과 함께 불어 닥친 ‘열린교육’ 열풍이 교육의 무게 중심을 학생 중심으로 치우치게 했다. 그 이전에 지나치게 교사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교사가 학생에게 두드려 맞는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의 ‘인성’이 아닌 ‘인권’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어떤 형태로든 체벌과 훈육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교육 현장의 작은 문제들도 정치적 영향을 받는 풍토이니 개선이 어려운 실정이다.
교육이 정치를 정화
고대 철학자들은 ‘교육은 가장 좋은 것, 인간 행복의 정수이고 정치를 포함한 모든 활동의 기준’이라고 설파 했다. 교육이 정치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교육이 제대로 되면 정치가 바로 서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질타받는 분야가 다름 아닌 정치이고 정치인들은 국민의 공적이 되고 있다. ‘종북좌파’ 를 만들어낸 80년대 주사파다수가 현실정치인이 된 걸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1980년대, 대학에서 주체사상을 공부하면서 기성세대를 욕하고 돌을 던진세대가 이제 사회로부터 돌을 맞고 있다. 수업시간에 운동권서적을 읽고, 과제 대신 혈서를 방불케 하는 대자보를 쓰고, 시위를 밥 먹듯 하면서 정치인들에게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을 하고, 우파 교수들을 내쫓고, 수시로 휴강시켜 비운동권들의 수업까지 마비시킨 일그러진 세대. 그 세대의 많은 부류가 지금의 정치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띠를 형성하고 한 세대를 같이 걸어가는 그들이 짓밟은 땅이 앞으로 다 회복되려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른다. 이들이 80년대에 자생한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 해방공간, 한국전쟁 을 거치며 이어지는 쓴 뿌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질기고 독해 쉬 사라지기 힘든 음습한 힘. 정치로부터 교육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수동적인 자세로는 힘들다. 올바른 교육으로 정치를 바로 세우자는 공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국민이 정신 차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점차 노쇠해가면서 외면 받는 잘못된 세력들이 남긴 질긴 흔적을 속히 지우고 새 힘으로 뭉칠 때이다. /이근미 소설가